12월 2일 대림 제1주일: 루가 21, 25-28. 34-36.

겨울의 문턱에서 우리는 대림(待臨)시기를 맞이합니다. 오늘은 그 첫 주일입니다. 교회 전례의 새 주기(週期)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낮의 길이도 많이 짧아졌습니다. 대자연도 푸른 생명의 빛을 잃어가면서 죽음의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전례의 주년(週年)이 끝날 때와 새 주년을 시작할 때, 우리는 삶의 종말을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마음에 새깁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면서 발생시킨 이야기입니다. 해와 달과 별 등 천체가 흔들리고,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며, 기절할 것이라고 복음은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신다고 말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구약성서에 실린 유대교 묵시문학이 이미 사용한 것들입니다.(하까 2,6; 요엘 4,16; 집회 16,18; 다니 7,13-14 참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서의 묵시문학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묵시문학이 이야기한 세상의 종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친숙한 그 문서들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창조와 세상의 종말에 대한 구약과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은 인류역사의 기원(起源)과 종말(終末)에 대해 알리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 또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를 알려 주는 이야기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들은 그 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가 하느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또 세상의 의미에 대해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이야기로 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의 복음으로 초기 신앙인들이 우리에게 알리는 것은 우리 삶의 최종적 가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한 다음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일에 얽매이지 말고, 머리를 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안에 영접하여 그분의 일을 실천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이어서 그들은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고…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도 말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은 사람들이 모두 열심히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인생의 보람으로 삼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과 ‘세상 걱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한 사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일을 보도록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 자유는 ‘먹고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은 편견(偏見)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은 높으신 분, 우리가 가진 것을 당신께 바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편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당신의 뜻과 계명을 지키도록 원하시는 절대자라는 편견입니다. 그것은 높은 사람들이 무섭게 지배하던 옛날 인간 사회의 관행에서 얻은 편견입니다. 예수님의 삶 안에 보이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사람을 억누르고,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빼앗아서 당신의 영광을 찾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그들을 해방시킨 사실을 해마다 크게 기념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것을 원하신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미움 받고 십자가에서 그 최후를 마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강요하던 율법과 성전 의례에 맹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은 율법과 성전 의례에 얽매여 종과 같이 비굴하게 사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우리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보고, 그것을 영접하여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소외시킨 이들과 어울렸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병자와 장애인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면서 하느님이 그런 불행으로 사람을 벌하시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고치고 살리는 것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부모는 연민(憐憫), 곧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자녀들을 대하고 그들과 함께 있어 행복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버리거나 보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에 대해 자기들과 달리 말하는 예수님을 그냥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제거하였습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연민 혹은 불쌍히 여김은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억제합니다. 연민은 강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불쌍히 여김을 실천하면, 우리가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목숨까지 바치면서 알려주신 그 불쌍히 여김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한 해가 또 지나가고 있습니다. 열 두 장이었던 달력이 이제 마지막 한 장만 남아서 우리의 아쉬움을 대변합니다. 우리의 삶이 불쌍히 여김과는 거리가 멀었었고, 예수님 혹은 하느님이라는 이름마저 우리가 더 많이 갖고, 더 잘살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말씀과 같이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겨서’ 산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연민이 마음 안에 살아 있고, 그것이 우리의 몸짓으로 나타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인이 누리는 참다운 자유로 보여야 합니다. 땅에 굴러다니는 낙엽을 밟으면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만 마음을 빼앗겨 살다가 낙엽으로 지는 우리의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대림절은 하느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 자리 잡으시도록 비는 계절입니다. 세월도 가고, 우리도 갑니다. 하느님의 연민이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고 그것이 우리의 몸짓으로 나타난 그만큼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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