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 로망 캐리커처리스트” 시사만화가로 살던 이동수 씨가 자신에게 붙인 또 다른 이름이다.

“땅을 딛고 하늘을 보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땅만 보면 방향을 잃고, 하늘만 보면 넘어지죠. ‘레알 로망’이라는 의미도 마찬가지에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실재 없는 낭만은 가짜고 낭만 없는 사실은 팍팍하죠. 한쪽만 선택하고 바라보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 '레알 로망 캐리커처리스트' 이동수 씨. 그는 자신이 그려주는 캐리커쳐 한 장이 그림의 주인공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속깊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정현진 기자

‘레알’은 현실(Reality), ‘로망’은 낭만(Romance)에서 가져왔다. 오롯이 현실적이지 못하고, 낭만적일 수도 없는 세상에서 그는 낭만적 현실주의자의 길을 택했다. ‘즐겁게 싸우자’는 역설을 살아내야 하는 삶의 현장에서 그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선택한 최선이자 이상이다. 그래서 그는 현장의 만화가로 거리에 서 있다. 사람들이 보고 알아야 할 현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찾은 행복한 그림
지치고 우는 이들에게 건넨 한 장의 위로

언제부터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 이동수 씨는 어린 시절 만화를 무척 좋아했다. 좋아하니 그리고 싶었고 손에서 그림을 놓지 않았다. 장남의 책임감으로 미대에 진학하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만화를 익혔다. 본격적으로 시사만화가의 길을 걸은 것은 대학 학보 만평이 시작이었다.

일반 직장에 다니면서도 끊임없이 만평을 그렸다. 그렇게 만화가 조직에서 활동하던 2000년 쯤 문득 자신과 동료들이 점점 현장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의 본질보다는 현실적인 껍데기에 매몰된다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어느 일간지에 만평을 연재하고 있었어요. 단병호 선생을 그리고 있는데, 너무 안 되는 거예요. 문득 생각했죠. 비판해야 할 나쁜 사람들은 보지 않고도 쉽게 그리는데, 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그리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그때부터였어요, 앞으로는 좋아하는 사람들,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 작년 겨울, 유성기업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한 미사에서 그린 그림. 예수회 최영민, 김정욱 신부다. ⓒ정현진 기자
현장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는 작은 바람은 금방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동안 그는 인권단체 소식지와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소식지 등에 그림을 실으면서 마음을 이어갔다.

그러던 2009년 용산참사가 일어났다. 달려간 참사의 현장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만화를 그려 알리자고 결심했다. 만평이 실리기까지는 일주일, 한 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니 상황을 취재하고 그림으로 기사를 써 바로 알릴 수 있는 곳에 기고했다.

“용산 참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1년이 지속되면서, 주변 사람들이 온통 우울하고 무력해졌어요. 다만 분노만이 가득했죠. 스스로 묻게 됐어요.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용산에서 행복을 논하는 것이 어불성설이었지만, 결국 그곳에서 빼앗긴 것도, 찾으려 했던 것도, 살던대로의 행복한 삶이니까요.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어떤 정부든 관계없이, 결국 우리 행복은 우리가 일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부는 그 행복을 위한 보조자에 불과한 것이죠.”

그런 생각의 끝에 행복을 일구는 방법으로 캐리커처를 선택했다. 문화인들이 모여서 프로그램을 짰고, 그 속에 이동수 씨의 캐리커처 프로그램이 자리를 잡았다. 모두 지쳐있었지만 사람들 각각의 숨어있는 아름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모습을 그렸다. 처음에는 그들을 웃게 하자는 목적이었는데, 점점 그 자신이 행복해졌다. 그 후, 그는 어디에서든 그림을 그렸다. 기륭전자, 재능교육, 콜트콜텍, 유성기업, 한진중공업…. 울다 지치고, 폭력에 밀려 쓰러진 사람들도 그의 작은 화첩 안에서는 환하게 빛을 내며 당당히 서 있었다.

가만히 있기에 너무나도 불편한
현장에서 깨닫게 된 진실, 알고 나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어

소외된 중에도 더 소외된 현장을 찾는다는 그는 “문서를 통해 정제된 내용을 아는 것과 현장의 목소리는 100배 쯤의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늘 노동자들은 ‘그쯤 했으면 됐다’는 말을 듣고, (사측의 부당함을) 이해할 것을 강요당한다. 용역들 역시 기업의 허물을 그들이 대신 뒤집어쓰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목도하는 것은 불편하지만, 그들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훨씬 불편하다”고 말했다.

“처음 재능교육 해고자들의 문제를 접했을 때, 이해할 수 없었어요.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았으니까요. 저들은 시장경제를 외치지만 오히려 국가 체제를 위협하고 시장경제를 망치는 것은 그들이었죠. 경제구조는 급격히 변하는데, 노동자들을 보호할 법적 장치는 따라오지 못하고 심지어 법적 보호 장치가 생기지 못하도록 방해하죠. 용납할 수 없었어요.”

노동을 노동일 수 없게 만드는 것, 노동자의 삶을 너무 쉽게 불법으로 만드는 부당함을 목숨 걸고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 맡겨놓을 것이 아니라, 누구든 다각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소식지 9월호에 실린 이동수 씨의 만평 (사진제공/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땅을 딛고 하늘을 보며, 하늘땅을 잇는 사람들
십자가의 고통마저 이긴 예수의 치열한 사랑이 삶의 화두

이동수 베드로.

그는 1986년 세례를 받았다. 주변의 친구들이 모두 가톨릭 청년회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세상을 고민하고 삶과 실천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하고 싶어졌다. 이동수 씨는 “저들이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처음에는 무엇이 신앙인지 잘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달은 것은 예수의 사랑이었다. “예수가 끝내 승리한 것은, 아마도 사랑을 말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물으면서, 자신을 매료시킨 예수의 매력은 결국, 사랑이었다고 말했다.

“어느 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말이 확 와 닿았어요. 소름이 끼쳤죠. 그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지도 못하는 다른 이들을 위해 뭔가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생각했어요.”

그는 지금은 이른바 ‘무늬만 신자’라고 고백하면서도, 당시 얻었던 특별한 감화, 삶에 대한 자세는 남아있다고 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가 보여준 치열한 사랑은 그의 삶에도 화두로 전해졌다.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 위로를 전하는 그림
분노와 상처로 정상일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측은지심

그는 옳지 않은 일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도 그림을 통해 불의한 권력을 꾸짖는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비판하고 욕하는 중에 함께 상처받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는 온통 군사독재시절을 지나왔습니다. 문득 그런 시절을 살아온 이들이 ‘정상’일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됐어요.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모두가 공통적으로 분노와 상처를 지니고 있지 않을까요? 인간 원형의 정신세계가 무너지고 왜곡된 사회, 왜곡된 역사를 견디지 못해 자기합리화하고 ‘야만’을 그리워하게 된 사람들…. 그런 세상을 옹호하는 이들이나 비판하는 이들 모두에게 측은지심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선택한 것이 ‘위로’다. 위로하려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보고, 그리다보니 그는 늘 웃는다. 사람들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마음이 정말 좋다고 말했다. 캐리커처의 힘은 풍자에 있지만, 이동수 씨는 굳이 풍자만을 고집하지 않게 됐다. 이른바 ‘타협’의 결과라고 했지만 ‘배려’라고 고쳐 말해주고 싶었다.

▲ 현장 노동자들을 그리는 이동수 씨. 처음에 싸움의 현장에서 그림 그리는 것이 낯설었던 이들도 이제는 그가 무엇을, 왜 하는지 알고 있다. ⓒ정현진 기자

그는 “작은 경험 때문에 그 사람을 위한 그림이라면 풍자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지녔어도 일방적 풍자는 상대를 오히려 불쾌하게 하기도 하더라”면서, “그렇다고 예쁘게만 그리면 왜곡이 되니, ‘최대한 닮았지만 조금 더 예쁘게’ 그리려고 한다”며 웃었다.

그는 요즘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최고의 작품으로 현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하겠다’는 것. 그래서 그림에 대한 생각도 바꿨다. 일필휘지로 빨리 잘 그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열심히 정성껏 그리겠다는 생각이다.

아직도 어떻게 그려야 잘 그릴 수 있고, 자신만의 색을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을 전했다.

“기륭전자 싸움이 승리한 후 열렸던 문화제에서 김소연 씨의 얼굴을 그렸어요. 늘 싸우고, 지치고 힘든 모습만 비춰졌는데, 그날 그렸던 그녀는 해맑은 소녀의 모습이었어요. 그 얼굴을 보면서 이렇게 맑고 순수한 사람들을 악에 받쳐 싸우게 만드는 세상에 대해 다시 생각했죠.”

이동수 씨를 이끄는 힘은 상식이 무너지고 강탈을 체계화하는 권력에 대한 분노다. 그는 “만화가 세상을 풍자해야 하는데, 오히려 현실이 풍자를 넘어선다. 훨씬 적나라하고 풍자적인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말하면서, “더 큰 문제는 많은 이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계속 알리는 것이 또한 나의 몫”이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자신의 구호가 ‘부르면 달려갑니다’라고 했다. 용역보다, 경찰보다 현장의 사람들에게 먼저 가 닿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곳도 노조파괴에 맞선 골든브릿지 투자증권 노동자들의 파업 200일 대행진 현장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어느 때처럼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렸다. 눈과 손을 바삐 움직여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는 그의 입가에 어느덧 작은 웃음이 핀다. 누군가 그의 모습을 담아낸다면, ‘냉혹한 세상에 전하는 작은 위로’라는 제목을 붙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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