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사랑한 여성들-11]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요한 4,29)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무더운 한낮, 남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으려 한 여인이 우물로 다가온다. 마침 선교 여행을 다니시던 예수님께서 그 우물가에서 잠시 쉬고 계셨다. 예수님은 마음의 상처가 깊은 그 여인을 알아보고 말을 건네신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그 여인은 현실의 삶 안에서 존재의 근원을 깨닫게 되기까지 예수님과 계속해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벗어버릴 수 있는 구원의 샘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달려가 사람들을 예수님께 초대한다(요한 4,1-42 참조).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이 사마리아 여인의 행동에서 선교의 핵심을 찾아볼 수 있다. 선교는 파견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missio)에서 나온 말이다.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발견한 그 기쁨으로,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하러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사도 시대부터 현재까지 예수님에게 구원의 샘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나누기 위해 노력한 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캥크레애 교회의 선교에 종사하며 일꾼(diakonos)으로 불렸던 포이베(로마 16,1), 남편 아퀼라와 함께 부부 선교사로 활약한 프리스카(로마 16, 3-4), 활동수도회의 효시가 된 안젤라 메리치 성녀(1474-1540) 등이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이번에는 한국 가톨릭교회 최초의 여성 회장이었던 강완숙 골롬바(1761-1801)를 만나고자 한다. 강완숙 골롬바는 자신을 믿고 지지해주던 주문모 신부의 신임 아래 1795년, 당시 4000명이던 조선의 신자를 6년 후인 1781년에 1만 명 정도로 끌어올리는 선교 활동의 핵심 역할을 했다.

▲ 순교자 현양동산, 2011 ⓒ박홍기

세상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찾다

그녀는 양반 가문의 서녀였다. 남다른 지혜와 담대함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었기에 사회의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자신 안에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움츠러드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아픔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 불교에 귀의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불교에서도 세상의 큰 이치를 얻을 수 없다고 여기고 홍성의 양반인 홍지영의 후처로 결혼 생활에 들어간다. 그러나 남편 홍지영의 줏대 없고 용렬하지 못한 성품을 보면서 그녀는 다시 절망한다. ‘속세를 떠날 생각만 했다’는 그녀에 대한 기록은 당시 그녀를 둘러싼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부터 그녀의 삶은 달라진다.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敎)의 이름이 바르니 교의(敎義)도 틀림없이 참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 후 ‘천주실의’ 등을 직접 연구하며 신앙을 받아들인 후에는, 몰라보게 쾌활해지고 밝아졌다.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

이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은 재능을 억누르며 집안에만 갇혀 있어야 했던 그녀의 부서진 마음을 싸매어주고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그녀는 도리에 밝았기에 먼저 남편과 가족과 친척들에게 전교를 실천했다. 그녀의 진실 됨은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에게까지 깊은 감화를 주었고, 이들이 (아들과 아버지보다도) 그녀를 더욱 의지하게 하도록 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에 옥에 갇힌 신자들에게 음식을 넣어주다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이에 남편은 자신에게까지 화가 닥칠까 두려워하며 헤어져 살기를 바랐다. 그러자 강 골롬바는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불꽃처럼 타오르다

1794년 1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다. 주 신부는 조선 교회를 이끌어갈 큰 인물로 정약종, 황사영, 유항검, 여성으로서는 강완숙을 신임하게 된다. 그녀의 영민함과 성실함, 그리고 교회에 대한 헌신의 마음을 읽고 1795년 ‘골룸바’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이어서 평신도 교리연구단체 및 선교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여회장으로 임명하기에 이른다.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작고 큰 어려움에 봉착하는 신앙공동체의 일을 마치 뒤엉킨 뿌리 뭉치를 끊는 손과 같이 능란하게 처리하였으며, 남자들 중에서도 교우가 많았지만 모두가 기꺼이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사영의 <백서>에도 ‘강완숙은 대단한 말솜씨와 이치에 합당한 말로 교리를 가르쳤다’고 나오니 그녀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당시 얼마나 혁혁한 활동을 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그녀의 선교는 양반가의 부녀자들뿐만 아니라, 폐위돼 아무도 찾지 않았던 왕가의 여인들, 폐궁의 종들, 자신의 머슴과 하녀로 있던 이들에까지 골고루 미쳤다. 신앙 안에서 평등 정신을 생활 속에서 몸소 실천한 것이다. 또한 그녀는 ‘양반 부녀자가 있는 집은 함부로 수색할 수 없다’는 당시의 법을 이용해 주문모 신부를 6년 동안이나 숨겨드리고 보필했다. 주 신부의 입국으로 빠르게 신자수를 늘려가던 조선 교회가 탄탄한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힘이 된 것이다. 그녀의 집에서 한 달에 6-8차례 정도의 ‘첨례(전례활동)’도 이루어졌다. 당시 풍습으로는 처녀들이 동정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기도하고 공동 경제 활동을 함으로써, 여성들도 자립할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결국 그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사학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모진 고문 끝에 순교의 영광을 쓰게 된다.

220년 전에 이미 모범을 보이다

얼마 전, 명동성당 130년 역사상 첫 여성 사목회장이 선출되어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220년 전, 강완숙 골룸바 회장은 여성의 사회 활동이 극히 제한적인 당시 문화에도 굴하지 않고 이 땅에서 여성 사도요 선교사로서 이미 그 모범을 제시하였다. 의미 없던 삶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기쁨을 이웃과 나누고픈 열정으로 일생을 헌신했다. 나도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가까운 이들에게 전교활동을 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얼마 전부터 그들을 지향하며 매일 ‘비신자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는 소극적 선교를 하고 있다. 예수님을 본받아 작은 실천의 모습을 이웃에게 보여 준다면 이 모두가 하나의 선교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분재(盆栽), 즉 일본어로 ‘본사이’라 일컽는 것은 커다란 나무를 작은 화분에 심고 조그맣게 키우는 기술이다. 그런데 그 기술의 핵심은 ‘중심뿌리’ 즉 주근을 잘라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10미터도 자라는 나무가 30-50센티의 난쟁이 나무로 자란다고 한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이 중심뿌리는 무엇인가 자문해 본다. 로마 박해시절을 겪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점진적으로 늘어난 것은, 믿음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과 이타적 사랑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날마다 자신들의 순수하고 높은 수준의 윤리적 삶의 향기를 전했는데, 즉 재앙이나 역병이 돌았을 때 기꺼이 다친 이들을 돌보아 준 그들의 선행이었다. 선교의 ‘중심뿌리’도 바로 이러한 사랑의 향기가 아닌가 한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사랑을 만난 그 체험이 ‘중심뿌리’가 되어, 서로서로가 큰 나무가 되도록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부터 노력해야겠다.

 
 

도희주 (수산나)
1971년 대구 출생, 가톨릭대 신학과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서강대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주석성서>, <미사의 신비>, <성찬의 9일 기도>, <연옥을 피하는 방법>의 편집과 번역을 담당했다. 2011년 3월 자녀 세 명과 함께한 전국 성지순례책 <햇살 속으로>를 집필했으며 가톨릭 영성을 담은 책을 기획·출판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http://oturo.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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