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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삶의 연장선에서, 죽음을 본다
문양효숙 기자  |  free_flying@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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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11.19  11:5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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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있으면 당신이 떠난 지 꼭 3년이 됩니다. 잘, 지내고 있나요? 당신이 있는 곳은 제가 경험해 보지 않은 세상이라 ‘잘’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왠지 아주 평온하고 좋은 곳 일거라는 느낌이네요.

아주 오랫동안 죽음은 저에게 넘어설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어요. 어렸을 때엔 전쟁이 나서 죽는 꿈을 며칠간 계속 꾸기도 하고 간혹 TV에 죽어가는 이들의 모습이 나오면 견딜 수가 없어서 방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답니다. 무의식속에서 저를 둘러싼 세상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한 곳이라 느꼈던 걸까요? 저에게 죽음은 ‘나’라는 존재의 영구소멸 혹은 모든 것의 종말, 이별, 미지의 세계, 끝없는 허무, 이 모든 것들을 담은 어두움의 세계였어요. 당신을 보낸 후 이 두려움은 더욱 극심해졌습니다. 저는 저 뿐만 아니라 제 뿌리이자 고향인 엄마마저 사라질까봐 늘 노심초사 안절부절 했지요.

   
ⓒ박홍기

그래요 실은, 그래서 사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죽음을 대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아래에는 삶을 대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몸이 조금 안 좋을 때에는 곧 죽을 병이구나 싶어 병원도 가지 못하고 불안에 시달리는가 하면, 비행기를 타거나 조금 먼 여행길을 떠날 때에는 이 세상과 영영 안녕을 고하는 심정이었지요. 일상의 무의미함이 주는 수렁 속에서 저는 ‘얼음’을 외치고 오랜 시간 제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무엇인가가 내 어깨를 치며 ‘땡’을 외쳐주기를, 그래서 내가 발을 떼고 움직일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가 보지 못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저의 ‘지금’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었지요.

돌아보니 터닝 포인트는 분명, 그 때였습니다. 죽음에 임박해서 속수무책으로 미지의 세계를 만나고 싶지 않았던 저는 떨리는 목소리로 스승님께 물었지요.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스승님은 저의 겁에 질린 얼굴을 바라보시더니 이렇게 대답해주셨습니다. “몰라. 안 가봐서. 그런데 엄청 좋은 게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어.” ‘엄청 좋은’이라는 말, 지금도 잊혀지지 않네요. 신기하게도 그 말은 저를 둘러싸고 있던 두려움의 기운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얼음’ 상태였던 제 어깨를 건드려준 것은 두 가지였던 것 같아요. 하나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無常)의 진리, 또 다른 하나는 세상 모든 존재들의 연결성이었지요. 저는 불변, 불멸의 무언가가 제게 안정감을 주리라 여겼습니다.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갈구했고 그렇게 묶어두려고 버둥댔습니다. 집착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모두 그런 잡아두려함에서 시작되던가요.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 세포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변하고 느낌도, 감정도, 생각도, 나라는 존재도 끊임없이 변하고, 사람과의 관계, 나아가 온 우주도 끊임없이 흐르고 변했습니다.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때 제게는 영원불변함이 주는 안정감보다 훨씬 큰 편안함과 자유로움이 찾아왔어요.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니 저도 그렇게 흐르겠지요. 그러니 언젠가는 죽음의 세계를 만나는 것도 당연한 이치일거예요. 게다가 저는 세상과 동떨어진 어떤 개별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어요.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우주의 한 부분이며 분절된 개체가 아니었습니다. 나아가 스승님은 “죽은 이후의 세상마저도 우리와 완전히 분리된 세상이 아니다. 그 분 안에서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신기하게도 저는 죽음을 직면하고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면서 삶도 새롭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죽음이 삶을 위협하는 자리가 아닌 삶의 연장선에 있음을 깨달아가면서 사는 것도 예전처럼 무섭지 않아요. 당신을 보내면서 우리 모두가 ‘정말’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어요.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이었지요. 그것을 깨달아가면서 오늘을 사는 게 어떤 것인지, 하루를 살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디에 마음을 쏟아야 하는지를 배워가고 있는 듯 합니다. 임사체험을 비롯, 평생 죽음에 대해 연구한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플러로스는 “내가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은 상대방이 들을 수 있을 때 말을 하면서 살라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마음을 전하는 것, 내가 오늘 하루 만나는 세상에 충만히 존재하는 것, 그것이 제가 찾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마음처럼 쉽지는 않아요. ‘정신없는 일상’이라는 흔한 핑계 속에서 중심을 잃고 살 때가 많거든요.

누군가가 제게 이 모든 과정이 ‘당신이 떠나면서 주고 간 선물’이라 하더군요. 이별한 후 남는 것은 결국 상실감과 고통뿐이며, 그것들은 그저 견디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겼던 제게 죽음에 대한 다른 이해는 분명 큰 선물입니다. 이런 소중한 선물을 남겨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위령성월에, 우리는 앞서서 하느님께 돌아간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합니다. 살아있는 우리가 죽은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삶’이라 부르는 것과 ‘죽음’이라 부르는 것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는 단절되지 않은 하나의 세상이기 때문이겠지요. 단지 기억하는 것을 넘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때로 슬프고 외롭게 이 세상을 떠난 영혼들도 기억하게 합니다. 때 늦은 안타까움과 우리 스스로의 무기력을 넘어 지금의 삶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위안을 갖게 합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채 죽어간 이들마저 ‘같은 세상’에 있다는 아주 큰 연대감을 느끼게도 하구요.

다른 세상의 영혼을 위한 기도와 함께 죽음에 대한 생각도 깊어지는 11월입니다. 큰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을 당신을 위해 기도하며. 삶에 아주 가까이 있는 죽음에 귀를 기울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이렇게 하느님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함께 걸어 나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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