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꼭 40년 전에 쓰여진 잡지에서 ‘오늘’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참 묘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지금은 폐간된 <사목>지 창간호를 다시 보았다. 주교로부터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는 행운은 다 낡은 잡지에서나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씁쓸해 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불어넣은 참신한 성령의 바람이 아직 그 훈기가 날아가 버리기 전에 우리 한국교회에도 깊은 흔적을 남겨놓았음을 보고 있다. 다른 사제들에 앞서 주교들이 먼저 각성되었던 특별한 사건이었다. 1967년 5월 <사목> 창간호에는 ‘교회의 자아비판’이라는 부제가 달린 전주 교구장 한공렬 주교의 글이 게재되었다. 그 분의 육성을 잠깐 들어보는 것은 지금교회에도 유익할 것이다.

“사제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있다. 우선 신자들의 눈에는 사제들이 정상적 인간으로서의 성장에 도달하지 못한 미숙한 존재로 반영되는 것이다. 그들이 신앙의 눈으로 사제를 볼 때는 그 신적 권위를 인정하려고 노력하지만 사제를 인간으로 볼 때 과연 존경할만한 인격의 소유자들로 인정하는 데 주저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어서, 사제들에게 대한 그들의 태도가 석연치 못함을 느끼는 수가 많다. 또 한 가지 그들의 불만은, 사제들이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난문제에 대하여 무감각하며, 시대적 요청에 대하여 백지상태이며, 사회진보에 대하여 사제들이 적응하려는 태도가 너무나 미온적이라는 데 있다. 그들의 요구는 사제가 그 받은 신품성사에서 오는 신권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인들과 같이 나날이 그 신학지식을 더욱 깊이 닦고 솔직하고 성실하게 그 직책을 봉행함으로써 인격을 도야하여 그 감화력을 사회에 발휘하여 존경받는 인격의 소유자가 되어 달라는 데 있다. 그들의 이와 같은 불만과 요구가 성직에게 대한 원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동기(同氣)로서 하느님의 집안 일이 잘 되어나가기를 바라는 순정에서 오는 것이라고 우리는 보아야 한다. 사제가 이러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원인이 우리 편에 전연 없다고 부인하기 전에 냉정하게 자아비판을 해 보는 것이 현명한 태도일 것이다. 서품 당시 위대한 포부와 열광에 가까운 정열을 가지고 출발한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그 이상과는 점점 먼 거리에 있게 되며, 성직에 대한 애착, 성무이행에 대한 박력을 잃어버리고, 사제직 자체에 대한 권태 혹은 후회까지라도 때로는 느낀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주교는 사제가 자신의 신분이 아니라 직책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만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즉 “우리의 특수계급이라는 사회적 위치를 포기해 버리고 하느님의 백성의 한 사람, 또 이 백성을 위하여 오직 봉사하는 시종(侍從)이라는 본연의 위치에 들어가서 우리 자신을 돌아다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외형적 교세 성장률의 그림자가 너무 길기 때문이다. 교회는 경제적으로 중상층 중심이 되어 부유함 때문에 복음적 긴장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과 교회를 가름하는 잣대를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복음이 말하는 복음적 신실성의 유일한 잣대는 ‘사랑’일 텐데, 특히 세상이 돌보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들며, 사실상 많은 가난한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실정이다. 본당에선 교우 중에 70%에 이르는 신자들이 사실상 냉담 상태에 있으며, 이를 두고 ‘쉬는 교우’라고 아무리 듣기 좋게 말한다고 해도 당분간 이들이 다시 애초의 성사생활로 돌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지식인들에게 사제는 성사집행의 우위를 점하고 있을 뿐, 사회적 유아(乳兒)로 비추어지고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사제들의 복음적 열정을 문제 삼는 것이며, 세상을 사는 다른 신자들에게 아무런 지침도 제공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럴 때 신자들은 고개를 돌리며 사제들에게 “공부 좀 해라!”고 쉽게 말한다. 필요하다면 사목일선에서 많은 부분을 신자들의 몫으로 돌리고 먼저 공부 좀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 사례로, 우리 신앙의 실 내용이 단지 기도만 열심히 하고 성사생활에 부지런함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면, 신자들이 일상에서 직장에서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복음을 사는 게 중요한 것이라면, ‘사회적 복음’인 ‘사회교리’를 사제들이 알아듣고 있어야 하지만, 세상사에 대하여 복음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제를 찾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신자들에게 ‘신앙과 생활의 분리’를 따져 물을 수 없다.
한편 사제들이 본업(本業)처럼 해야할 일이 ‘마음공부’일 텐데, 수행의 전통이 부실한 재속사제들에게 마음공부도 공염불이 되기 쉬워서 사제들의 도덕적 인격적 수준마저 의심받게 된다면 사제의 존재 이유가 상당 부분 무너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오늘날 사제는 ‘종교적 공무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사제란 직분이 그저 낮은 수준의 ‘철밥통’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우리 교회에는 미래가 없다. 어느 전직 목사의 말대로 교회가 고급스런 문화센터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40년 전에 우리교회는 작았지만 활력에 넘쳐 있었다. 이제 다시 그 시대에 교회가 누렸던 활력을 되살릴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 4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숙고하고, 공의회 정신으로 지금 교회를 다시 읽어야 한다. 


한상봉 200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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