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8일(연중 제33주일) 마르 13, 24-32

교회 전례(典禮)의 주기(週期)는 12월초, 대림 첫 주일에 시작하여, 그 다음 해 11월 말,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끝납니다. 전례주년(週年)이 끝나가는 시기, 곧 오늘과 같은 날에는 미사 복음으로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유대인이고, 그들이 세상 종말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은 당연히 유대교 묵시문학의 언어를 상기합니다. 묵시문학은 기원 전 2세기 유대인들이 남긴 문서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 문헌에 익숙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세상의 종말을 말할 필요가 있을 때, 그들은 그 문헌의 언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이 세상의 종말에 큰 재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은 결과입니다. 성전의 파괴, 전쟁과 반란,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 박해 등이 모두 유대교 묵시문학에 나오는 주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미래가 온다는 사실을 말하는 주제들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봅니다. 신앙은 세상의 미래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세상 종말의 ‘시와 때’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씀하셨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기원 후 66년,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전쟁은 4년 후, 유대인들의 완전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들의 수도 예루살렘은 폐허로 변했고, 예루살렘의 성전도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유대인들의 패전과 예루살렘 및 성전의 파괴를 겪으면서 그것이 세상의 종말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느님이 주시는 새로운 미래를 보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려 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건강한 미래를 위해 운동하며, 건강식품과 보약을 먹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대우받는 미래를 얻기 위해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합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의 지혜와 노력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려 합니다. 그것을 잘하는 사람을 우리는 슬기로운 사람,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미래를 살자는 운동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참다운 우리의 미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재물과 권력을 얻어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이 다가 올 때도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라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미래가 당신 안에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초능력을 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열려라 참깨!’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불행을 퇴치하고 인간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일만 실천하며 살았던 생명이 겪는 종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곧 자기의 현세적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이 세상은 오래 살려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부활하셨다는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의 참다운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일만이 세상과 시간을 넘어 존속할 것입니다. 푸르던 대자연에 아름다운 단풍이 들더니 어느덧 낙엽 되어 떨어지고, 우리의 발에 밟힙니다. 우리의 삶도 늘 푸르지만 않습니다. 단풍도 들고, 낙엽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소중히 생각하였던 우리의 자존심, 명예, 지위, 재물도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는 잠시의 푸름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만,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삽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자리 잡으신 그만큼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지키고, 명예를 얻는 것이 우리 인생의 최대 과업이나 보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셔서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선한 시선과 몸짓, 조금 더 관대하고 자비롭고, 사람을 살리는 몸짓이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도 없고, 하느님에 대해 논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관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관찰하고 논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변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이 동기가 되어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날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나만을 위해 사는 나의 나라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내가 구상하고 내가 실현하는, 나의 미래만이 내 인생의 최대 보람이라면,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미래는 나에게 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실현하는 나의 미래를 축복이나 하고 계시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내어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힘으로 보장하겠다는 환상을 버리고, 하느님이 주시는 하느님의 미래를 찾아 나서라고 권합니다. 그것은 나 한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고, 나 한 사람을 치장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예행연습이 없습니다. 한 번 주어진 삶입니다. 한 번 하는 모험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부부가 되는 것도,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도 모두 예행연습이 없는 모험입니다. 인간이 하는 소중한 일들은 모두 이렇게 연습도 없이, 준비된 대사도 없이, 보장된 것도 없이 감행해야 하는 모험들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자신만을 위해 살면, 반드시 실패하는 모험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사는 일도 하나의 모험입니다. 보고 확인할 수도 없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모험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하신 모험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활은 그 모험의 결말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하느님이 주실 미래를 택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현재 자기 안에 살아 계시게 삽니다. 하느님의 현재를 사는 사람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하실 자비로운 일을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을 빕니다. 우리의 뜻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기에 우리에게는 어려움, 곧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것이 자녀인 우리가 하느님의 자유를 사는 길이고, 또한 하느님의 미래를 우리 안에 영접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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