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적 성장을 위한 예술치료 프로그램을 하기 시작하면서 신자 분들과 폭 넓게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 가운데 특별히 마리아에 대한 신자들의 깊은 애정과 신뢰, 그리고 애타는 갈망을 읽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우리는 신앙생활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보다 더 많이 더 자주 성모님의 이름을 부른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으로 시작되는 성모송을 자주 입술에 올려야 하는 로사리오 기도가 가톨릭 신자들의 가장 대중적인 기도양식이기 때문이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어이쿠! 어머니”하듯이, 우리는 엄마이신 마리아에게 특별한 애정을 담아 기대고 싶어 한다. 아드님 예수와 우리들 사이에서 가장 친밀한 눈빛으로 우릴 받아들일 태세를 언제나 갖추고 계시는 분이 마리아라고 ‘정서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친밀감을 확인하기 위해서 몸을 만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러한 스킨십은 그들의 사랑을 더 실제적이며 깊은 차원으로 인도한다. 그렇다면 과연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가장 자주 어린 시절의 아드님 예수의 몸을 어루만졌을 것이고, 아드님 예수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필요할 때 필요한 음식과 음료를 나누어 주셨을 것이다.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깊은 일치를 경험한 마리아와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마리아께 공경을 드리는 것은 곧 예수님께 드리는 사랑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분들은 서로 온전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당신의 자식을 받아들이듯, 십자가 아래서 요한을 제 자식으로 삼으셨으며, 또한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일 분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때로는 어린애처럼 이기적인 요구일지라도 받아주시려 애쓰실 것이다.

로사리오 기도는 대개 청원기도이다. 무엇인가 바라는 바가 있어서 우리는 묵주알을 굴리며 간절하게 마리아께 매달리는 것이다. 우리가 주로 바치는 묵주신공의 ‘지향’은 무엇일까? 교회공동체 안에서 바치는 공동기도가 아니라면 대개 내 자식을 위하여, 내 가족을 위하여 모든 묵주알을 바친다. 우리 가족들의 건강과 안전과 성공을 위하여 비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문제는 우리의 기도가 거의 90%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개인 구복적(求福的) 기도’라고 부른다. 복을 비는 것이야 종교생활에서 빠질 수 없지만, 개인의 복만 빌어서야 제대로 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빌어서 소원이 성취되지 않으면 그 원망의 화살을 마리아께, 하느님께 돌리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이렇게 저렇게 간청했건만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 야속한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 하며 나서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것은 참 위태로운 신앙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의 기쁨만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모든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요구한다. 배고프면 밥 달라, 목마르면 물 달라 청한다. 엄마는 무조건 내 요청을 들어주기만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른이 되면 엄마도 엄마 이전에 한 여자임을 깨닫는다. 한 여자로서 한 사내의 아내로서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힘든 날들이 많았을까, 생각하며 그분을 위로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젠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정말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헤아리게 된다. 이제 내 사정에 얽매어 청하기 전에 그분 마리아가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모님은 예수님이 원하던 것을 원했기에 ‘거룩한 엄마’(聖母)가 되신 것이다. 그분은 예수님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원하시던 바가 그대로 이뤄지기를 갈망했다. 바로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세상이 평화를 되찾고 만인이 자매형제로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가족주의에서 벗어나 모든 이들을,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내 가족처럼 돌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른이 된 신앙인들의 기도는 조금씩 바뀌어야 한다. 무엇을 좀 해달라는 기도는 좀 접어두고,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이든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청해야 한다. 아픔일랑 제게 주시고, 세상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오길 갈망하는 것이다.

최근에 어떤 책 광고지에서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는 카피를 보았다. 마음 한번 잘 먹으면, 신중하게 헤아려 세상을 살아간다면 인생에서 실패란 없다는 꼬임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달라야 한다.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어도 ‘그분 안에서’ 행복해야 참 신앙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생을 마감하였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완전히 구겨진 삶이었고 실패자의 죽음이었지만, 하느님의 시선은 달랐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였다. 우리들의 신앙은 세상과 다른 기준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기준은 가족과 함께 가족을 넘어서는 사랑이다. 그럼 오늘 우린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한상봉 / 200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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