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교우들이 본당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정서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른바 ‘은혜와 상처’의 정서다. 레지오 회합에서 단원들끼리 서로 주고받은 말로 상처를 받고 성당을 등지는 경우가 있다. 봉사단체 활동을 하면서 어떤 사안을 두고 단원들 사이에 의견충돌이 일어나면 바로 ‘상처를 받았다’며 단체 활동을 접거나 심지어 성당을 등지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김용길 기자
반면에 성지순례의 경우에는 순례의 참뜻을 성찰하고 묵상하기 보다는 단순한 야외 나들이 같은 성격의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나서도 그날의 기분을 ‘참 은혜로웠다’고 쉽게 표현한다. 또한 단체 안에서 단원 사이에 즐겁고 분위기 좋게 어울리게 되면 ‘신앙생활이 참 은혜롭다’고 이야기를 한다. 결국 복음적인 색채가 없는 일회성 행사를 하면서 기분만 즐거우면 ‘은혜로웠다’는 말을 남발한다. 우리는 왜 그렇게 성당에서 ‘은혜롭다’는 말과 ‘상처받았다’는 양극단의 정서가 쉽게 표출하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며 복음적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이뤄지지 않고, 내 성격과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내 기분과 감정이 즐거우면 은혜로운 것이고, 기분이 조금 상하게 되면 상처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극히 사소할 수 있는 일을 두고도 은혜와 상처라는 극단의 정서를 쉽게 표출한다.

어떤 경우에는 이 ‘상처’라는 말 한마디로 사안의 본질을 흐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결코 복음적이지 못한 사안을 두고 어떤 교우가 교회에 의견을 제시하면 그 의견을 받아들이고 숙고하기 보다는 사제나 평신도나 가릴 것 없이 그 의견에 대해 ‘상처를 받았네’ 하며 거두절미 막아버리기 일수다. 복음에 비추어 볼 때 왜곡되고 잘못된 고정관념이 교회 안에 남아 있다면, 누군가 그것을 개선시키고 변화시키고자 고언을 하게 된다. 이런 의견을 받아들이고 숙고해야 교회가 그나마 새로워질 수 있다. 내가 듣기 싫고 받아들이기 거북한 것을 두고 무조건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지는 숙고해야한다. 이 고언을 상처로 치부할 것인가 나와 교회를 위한 담금질로 삼을 것인가 식별할 줄 아는 노력이 아쉽다.

달면 은혜롭고, 쓰면 은혜롭지 못한가

얼마 전 우리 마을 구역모임으로 수도원 일일피정을 다녀왔다. “순교”라는 테마를 정해서 기존의 수도원에서 제공하는 피정프로그램을 이용하지 않고 자체 준비 · 기획한 프로그램으로 구역피정을 진행하였다. 틀에 박힌 박해시대의 한국순교성인 이야기를 벗어나 새로운 관점으로 순교의 의미를 다뤄봤다. 안중근, 본회퍼의 죽음과 김훈의 소설 “흑산”, 그리고 영화 “신과 인간”을 내용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다뤄왔던 한국순교성인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다른 시각에서의 광범위한 이야기들로 묵상하고 토론하고 외부강사의 강의를 들었다.

토론과 강의식 피정을 진행하다보니 예상한 바이긴 했지만, 몇몇 구역반원들은 금세 피로감을 느끼며 따분하다는 인상들이 역력했다. 만약, 고요한 수도원 분위기에 맞춰 종교적 감성지수를 파고드는 언어를 동원한 프로그램으로 진행했더라면 이들의 반응은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귀에 듣기 쉽고 감성적이고 심미적인 언어들에만 반응을 하며 그것을 신앙적으로 은혜롭다고 쉽게 포장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앙생활은 나의 기분과 감정을 벗어나 하느님께로 향한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내 기분과 감정에만 의지하여 내가 보고 싶은 것, 내가 듣고 싶어 하는 것, 내가 말하고 싶은 것에만 의지하려고 한다면 나의 신앙생활은 단지 나의 기호와 감정에만 맞춰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내 기호와 감정에 맞으면 은혜요, 내 기분과 감정에 맞지 않고 반하게 되면 상처라고 쉽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은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내가 지금 쉽게 이야기하고 있는 상처와 은혜는 과연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늘 살피고 생각하고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다.

황산 (서울대교구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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