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

1. 고민의 출발 - 가톨릭 교육, 길을 잃다.

지난 5월 31일 주교회의 교육위원회는 한국사회 안에서 가톨릭 학교와 교육의 미래 전망을 위한 매우 뜻 깊은 세미나를 주최하였다. 이 세미나는 현재 가톨릭 학교가 처해 있는 상황을 한국사회의 전반적 교육현실의 맥락에서 조명하면서 가톨릭 학교의 고유한 가능성과 방향을 집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이 세미나는 한국사회 안에서 가톨릭 학교의 존재 이유와 그의 구체적 실현을 위해 시대의 굴절된 흐름을 거스르는 용기가 절실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향후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또 그 본연의 과제를 새롭게 의식하고 구체화하는데 많은 동기와 자극을 주리라 여겨진다.

다른 한편, 최근 대학입학 전형과 관련하여 내신 성적 반영비율을 놓고 벌어진 교육인적자원부와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의 줄다리기는 한국 교육현실의 난맥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 중의 하나이다. 여기에 가톨릭계의 한 대학이 줄다리기의 전면에 나섰다. 여기서 우리는 가톨릭계의 대학이 시장주의 경쟁논리의 늪에 깊이 빠져 있는 한국의 다른 대학들에 비해 도대체 어떤 차별성이 있는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한국사회의 교육현실을 비추어 볼 때 과연 가톨릭계 학교로서의 고민과 대안모색이 충분한지도 심히 의심스러웠다.

오늘날 가톨릭 학교가 처한 위기의 근본원인은 한국 교육의 현실이나 제도만이 아니라 가톨릭 학교의 뚜렷한 방향감각의 상실에 있다. 때문에 여기서는 무엇보다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 문제에 초점을 두고 그것을 바탕으로 가톨릭 학교의 미래전망을 위한 진단을 하기로 한다.

2. 가톨릭 학교로서의 정체성? - 사례 보기

“학생들은 20-30년 동안 ‘오직 정답 찾기 공부’만 하면서, 학부모들은 제 자식 1점·1등이라도 더 높이려고 무한정 사교육비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투자’하면서, 교사들은 입시교육과 인간교육 사이에서 ‘부적격, 무능력 비판의 직격탄’으로 소신을 잃어가고 있다.” 오늘의 이러한 한국 교육 현실은 가톨릭 학교를 크게 비껴가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재 가톨릭 학교가 근본적으로 가톨릭 학교로서의 정체성-가톨릭 학교의 존재 이유와 그 구체적 사명의 실현과정을 포괄하는 의미에서-을 적절하게 실현하기 어려운 외적 조건과 내적 형편에 직면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재 학교 현장은 대학 입시라는 올가미에 갇혀 점점 더 정도(正道)를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전인형성과 자아실현’이라는 학교 교육의 본질적 목적은 외면당한 채 일류 대학 입학과 성공이라는 오직 실용적인 목적만이 추구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로 인해 학교는 ‘전인을 양성하는 교육의 장’이라는 본연의 정체성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고, 학생들과 학부모들로부터도 신뢰를 잃고 외면당하고 있다. 또한 세계적인 흐름에 있는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은 학교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은 교육에 시장원리를 도입하여, 교육의 수월성을 높이고 세계화에 대비한 경쟁력 있는 인적 자원을 확보한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학교 안에 교육 경쟁이 더욱 심화되고 비인간화 현상이 상응하여 급증하고 있다. 그러한 과정 중에 학교장과 교사, 교사와 교사, 교사와 학생, 학교와 학부모간에 의견이 분열되고 대화가 단절되어 학교 구성원 상호간의 벽은 점점 더 높아만 가고 있으며, 학교 교육 공동체의 균열 또한 커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학교 현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톨릭계 학교에서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가톨릭계 중등학교들은 고교 평준화 정책과 과열된 입시 체제 속에서 가톨릭 교육 이념의 구현보다는 주어진 교육 여건에 단지 순응하는 쪽으로만 움직여 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대부분의 가톨릭계 중등학교들은 가톨릭계 학교로서의 차별화와 특성화에 실패하였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교육 공동체를 구현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톨릭 학교로서의 차별화와 특성화의 실패는 가톨릭 중등학교의 ‘정체성의 상실’이라는 위기감을 낳고 있다. 가톨릭 학교로서의 ‘정체성 상실’이라는 위기감은 가톨릭 학교의 교육 이념과 실천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요구한다.”

위의 인용문이 분명하게 지적하는 바와 같이, 가톨릭 학교가 “왜곡된 한국교육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데 치중했고, 이런 왜곡에 대한 근원적인 대항 또는 대안적 교육의 제시노력이 미흡했음”5)은 결국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 상실의 위기’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물론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 문제와 관련하여 그동안 가톨릭계의 진지한 고민이나 대안모색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례를 언급할 수 있겠다.

우선 1986년 12월 6일 가톨릭 교육의 발전을 위한 ‘가톨릭교육재단협의회’가 설립되었다. 이 협의회는 가톨릭 학생 및 교원 연수, 종교교과서 등의 편찬, 가톨릭 교육정책의 마련, 교육정책과 관련한 대 정부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한 2000년 5월 21일에 한국 가톨릭 교육자들은 “교육자의 사명을 성찰하고, 사람을 살리시고 교육을 살리시는 예수님과 함께 교육을 살리고 복음 가치를 바탕으로 교육 사도직에 적극 참여하며, 교육공동체를 건설하고, 교육선교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결의”하면서 ‘한국가톨릭교직자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문에서 가톨릭 교육자들은 특히 가톨릭 교육이 직면하고 있는 세계현실(세계화, 문화와 가치의 다원화, 과학기술의 발전, 정보화시대)을 복음적 가치관으로 통합하는 교육을 지향하여 인류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밝혔다. 그와 더불어 가난하고 소외된 작은이들에 대한 봉사의지를 적극적으로 천명하였다.

2003년 2월 13일에는 가톨릭 교육연구자들에 의해 ‘가톨릭학교교육포럼’이 출범되기도 하였다. 이 교육포럼은 가톨릭 학교가 처한 상황인식을 전제로 하여 다음과 같이 그 출범취지를 밝히고 있다. “가톨릭 학교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구현하는 교육의 장이지만 우리나라의 제반 교육적 상황은 가톨릭 학교가 그 정체성을 확립하고 실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주고 있다. 이러한 교육적 상황 하에서 가톨릭 학교 교육을 담당하는 유·초·중등·특수학교 교원, 그리고 대학의 연구자들이 정기적인 연구 및 연수활동을 통해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그리스도적 교육을 실천하는 데 함께 하고자 한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가톨릭학교교육포럼은 가톨릭 교육연구 및 교육현안 탐구, 세미나 및 심포지엄 개최와 같은 학술활동을 꾸준하고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이외에도 ‘논산대건고등학교’(이하 대건고)의 가톨릭 학교로서의 교육혁신 사례와 가톨릭계 학교 가운데 유일하게 대안교육 특성화 학교체제로 운영되는 청주교구의 ‘양업고등학교’(이하 양업고)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1951년 고등학교로 개교한 ‘대건고’는 가톨릭 학교로서의 자율성과 특수성을 구현하기 어려운 한국의 교육현실 속에서도 1985년 이래로 괄목할만한 교육의 혁신을 이끌고 있는 학교이다. 특히 대건고가 ‘명료한 교육방향(인성교육과 학력신장의 조화)’을 설정하고 이를 ‘학교공동체의 핵심 구성원들(교장, 교사)’이 뚜렷한 가톨릭적 교육철학 및 확고한 실천의지 안에서 내재화하여 ‘구체적인 방법론과 내용’(수준별 이동수업 및 단계별 교육과정, 교수방법의 혁신 그리고 이른바 ‘PESS 프로그램’을 통해 현실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더 나아가 이 학교가 이러한 교육방향을 ‘지역사회와의 깊은 연대(학부모, 지역사회의 인적 협력)’ 속에서 성취하고 있다는 점 또한 매우 고무적이다. 대건고의 모범적 사례는 가톨릭계 학교뿐만이 아니라 비가톨릭계 학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며 ‘가톨릭 학교로서의 면모를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양업고’는 본래 청주교구 사제들과 교구민들의 뜻과 의지에 의하여 청주교구 설정 4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98년 설립되었다. 양업고는 무엇보다 ‘공교육을 거부하거나 그에 적응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하여’ 그리고 젊은이들을 위한 ‘희망의 교육’을 위하여 설립되었다는 점을 눈여겨 볼만하다. “양업고의 시작은 억압적 가정과 학교로부터 탈출하는 학생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품어야겠다는 마음이었다.”라는 양업고 교장 윤병훈 신부의 말은 한국사회 안에서 가톨릭 학교가 가야할 길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가톨릭 학교로서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일부 가톨릭계 학교와 교육관계자들의 고민과 새로운 모색은 크게 환영받을만하다. 그러나 현재 가톨릭 학교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과 과제에 비추어 볼 때 전반적으로 가톨릭 학교가 한국사회 안에서 가톨릭 학교의 독특한 고유성을 만족할만한 수준에서 실현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더 나아가 한국의 교육개혁을 위한 자극을 주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도 가톨릭 학교는 “본연의 교육목표에 충실해야 하고, 끊임없는 자기비판이 필요하며, 교회가 교육에 종사하게 된 근본원리와 동기에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가톨릭 학교가 계속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과 명분은 가톨릭 학교의 교육목적에 충실”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해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3. 정체성, 사학법 논의를 넘어선 본질의 문제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는 학교운영의 자율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제반 교육여건은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을 바람직하게 구현할 수 있는 자율성을 담보하기 매우 곤란한 실정이다. 가톨릭 학교의 자율적인 운영을 위축시키고 어렵게 하는 요인들은 다양한 차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책적 차원’(가톨릭 학교의 독자성을 제약하는 교육정책 및 법률, 학생선발방식 및 교원임용에 대한 제약 등), ‘재정적 차원’(정부 의존도가 높은 재정여건, 등록금의 획일화, 교회의 재정지원의 미흡), ‘사회적 차원’(입시위주, 학력 위주의 교육관), ‘교육적 차원’(교육 내용의 자율적 구성의 제약). 이러한 몇 가지 요인들이 서로 부정적인 쪽으로 영향을 끼침으로써 그리고 가톨릭의 정체성을 구체화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를 약화시킴으로써 가톨릭 정신에 상응한 학교운영의 어려움이 더욱 증폭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몇 년간 극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사립학교법 개정안’은 가톨릭 학교의 자율적 운영여건을 개선하기 보다는 더욱 악화시킬 수 있는 소지가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 개정된 사립학교법에 대한 가톨릭계의 입장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정리된다: 주교회의 교육위원회, 사회주교위원회, 가톨릭학교법인연합회, 가톨릭교육재단협의회는 기본적으로 ‘사학운영의 자율성’에 초점을 두고 불복종 운동의 전개와 대안마련을 계획하고 있으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사학운영의 투명성과 공공성’을 강조하면서 사학법의 개정취지(!)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학운영의 자율성’과 ‘사학운영의 투명성과 공공성’이라는 서로 다른 강조점이 가톨릭계의 입장을 양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따라서 사학법 개정과 관련한 가톨릭계의 두 가지 다른 맥락의 강조와 정부의 입장에 대해서는 큰 방향에서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우선 정부가 ‘사학의 자주성, 공공성’을 확대하는 데 사학법의 개정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사학운영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법제화를 통해 성취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사학법 개정 자체가 사학운영의 자율성과 공공성을 조화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보다는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어려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측면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서가 사학법 개정의 취지에 공감한다는 맥락에서 ‘사학운영의 투명성과 공공성’을 강조하는 것은 공감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현행 한국의 교육정책과 법률이 사학운영의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손상시키고 있는 측면은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큰 틀에서 ‘사학운영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가톨릭계의 견해가 지지되어야 할 이유도 충분히 있다. 그렇더라도 사학운영의 공공성과 개방성을 더욱 근원적이고 대조적으로 고양시켜야 하는 가톨릭 학교의 과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관점은, 개정된 사학법을 가톨릭 학교의 자율성 확보만이 아니라 그 고유한 과제를 확고하게 실현시키기 위한 가톨릭 학교의 자체적인 새로운 변화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시대의 징표로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가톨릭 학교의 정체를 명백히 파악하는 일과 이 특성에서 따라오는 모든 결과를 그대로 따를 용기”가 가톨릭 학교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보다 절실하게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의 근원과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재확인하는 것은 가톨릭 학교의 미래전망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4. 정체성 회복 - 소명의 회복, 역동적 회심의 길

가톨릭 학교의 존재명분은 그 본연의 정체성을 시대와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해 가는 과정 속에서 검증된다. 가톨릭 학교의 소명과 사명에 대한 식별과 검증의 기준은 다음의 몇 가지 차원으로 집약시켜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교회적 차원: 가톨릭 학교의 교회적 정체성은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본요소”이다. 가톨릭 학교의 존재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명에 참여하는 것에서 연유한다. 즉 가톨릭 학교의 존재 이유는 단순히 교육 사업을 펼치기 위한 동기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구원사명을 역사 안에서 지속해야 하는 복음적 요청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구원의 신비를 만인에게 선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가톨릭 학교는 단순히 교회의 복음 선포 사명을 위한 효과적인 도구이기 이전에 교회의 구체적인 존재방식 내지는 자기실현의 방식이다. 즉 학교는 교회를 구체적으로 생활하는-세상을 위한 구원의 성사로서의 학교공동체-장소이다. 때문에 학교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가톨릭 학교의 존재 이유를 이러한 교회적 차원에서 심층적으로 체질화할 수 있어야 한다.

(2) 공동체적 차원: 가톨릭 학교의 공동체적 성격은 단순히 학교의 사회적인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특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톨릭 학교의 공동체성은 무엇보다 “교육 분야에서 그리스도교 가치들을 구현코자 하는 이들이 모이는 장소”라는 점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적인 특성은 구체적으로 학교 운영진을 비롯한 교원들 그리고 학부모들의 가톨릭적인 교육원리에 대한 뚜렷한 인식과 폭넓은 공감대 형성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한 학교 구성원들의 공통된 인생관 내지는 공통된 세계관을 통해서, 교원들의 인품 안에 실현되어 있는 생활의 가치 그리고 문화와 신앙의 통합능력의 전수와 학생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학교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학교운영진, 학생, 부모, 교원, 직원 등)의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더 나아가 가정 및 본당공동체, 그리스도교 공동체 등과의 긴밀한 연대를 통해서 구체화되고 드러나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가톨릭 학교의 공동체적인 차원은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의 교육적 이상은 무엇보다 학교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존재방식과 실천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교육적 차원: 가톨릭 학교의 교육원리 내지는 교육철학은 전인(全人)적 인격 형성을 추구함과 동시에 시대의 생활가치관, 세상의 사회적・문화적 가치관과 대화하고 그리스도교적인 가치관 안에서 통합하여 인류에 봉사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가톨릭 학교의 교육적 정체성은 “인간의 궁극목적과 더불어 사회의 선익을 지향하는 인격형성을 추구”하여,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지향하는 신앙의 교회적 소명과 사명을 세상 안에서 실천함으로써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가톨릭 학교는 모든 교육계획 안에 전인적 인격형성을 위한 계획과 ‘문화와 신앙, 신앙과 생활, 이성과 신앙을 통합’하는 계획이 적절한 방식으로 실행되고 있느냐 하는 점에서 그 교육적 특수성이 검증되어야 한다.

(4) 사회봉사적 차원: 가톨릭 학교의 사회봉사는 가톨릭 학교의 본질적인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사회봉사의 차원은 우선 가톨릭 교육이 타인을 위한 봉사와 책임의 소명을 뚜렷하게 인식함으로서 인류의 행복과 공동선을 위한 실천을 지향하고 동시에 인류의 건강한 보편적인 가치를 위해 대화하고 협력하는데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은 가톨릭 학교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심층적으로 체화한 구성원들(특히 학교운영진과 교사)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학교공동체를 실질적으로 형성하고 이를 학교교육과 운영의 모든 영역에서 현실화시키는 데서 비로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을 실현해가는 과정은-고착화된 교육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탐색해 간다는 의미에서-역동성인 회심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5. 미래를 위한 오늘의 쇄신

가톨릭 학교의 미래는 복음적 근원에 대한 충실성과 시대적인 요청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견실하고 창조적으로 열릴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는 다소 도전적인 물음이 필요하다: 가톨릭 학교가 기존의 입시중심의 학교와 같은 존재방식을 계속 유지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현재의 조건에서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근본적인 개선방안 내지는 해결방안은 어디에 있는가? 현재 가톨릭 학교의 존재방식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하여 가톨릭의 교육 관계자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대안을 모색해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하였다. 또한 가톨릭 학교의 미래를 위해서 참으로 요긴하고 적절한 대안이 부족하지 않게 제시되었다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가톨릭 학교와 교육의 비전’을 모색하는 세미나에서 문용린 교수는 한국에는 학교개혁운동의 선도자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가톨릭 학교가 한국에서 교육개혁의 선도자로 나서 ‘이상적인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해서 모범을 수립하고 교육계에 충격을 주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서 가톨릭 학교의 현실 앞에 놓여 있는 걸림돌 내지는 넘어서야 할 문제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가톨릭 학교의 쇄신은 결코 미룰 수 없는 과제이며 가톨릭 학교가 왜곡된 교육현실의 물결 속에 떠밀려 갈 수 없다는 것은 더더욱 명백하다. 특히 한국사회의 교육현실에 있어서 이른바 ‘시장주의 경제 원리에 입각한 학교운영방식’은 예전에 비해 가속화되어 정착될 것이며 ‘교육의 양극화’ 문제는 해소되기 보다는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이는 형편에서 가톨릭 학교는 한국 사회의 도전적 상황을 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대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가톨릭 학교가 만인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갖가지 형태로 곤란을 겪고 있는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의 장을 여는데 주저 없이 나서야 한다. 특히 가톨릭 학교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재산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가정의 도움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또는 신앙의 은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가장 먼저 보살피도록 도우라고 강력히 권고”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소리를 주의 깊게 새겨 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가난한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결코 부차적인 것이나 특별한 경우로 취급될 수 없다는 것도 명백히 의식해야 한다. 이는 한국 상황을 고려할 때 가톨릭 학교의 쇄신을 위한 일차적인 요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가톨릭 학교가 한국 교육의 대안으로서 역할을 다해야 하는 과제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이는 무엇보다 세상 안에서 이루어야 할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 관련이 있다. ‘대조사회로서의 교회’(G. Lohfink)가 신앙 안에서 전혀 다른 형태의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처럼, 대조사회(Kontrastgesellschaft)로서의 가톨릭 학교는 한국사회 안에서 전혀 다르고 새로운 형태의 대안적 학교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나서야 한다. 가톨릭 학교의 미래는 내일의 쇄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부터 일어나는 쇄신에 터하기 때문이다.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기획위원회 200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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