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6일(연중 제32주일) 마르 12,38-44

오늘 복음은 율사와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을 대조해 보입니다. 율사는 거짓 신앙인의 표본이고 과부는 참 신앙인의 귀감으로 꾸며졌습니다. 율사는 남과 다른 복장을 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사 받기를 좋아하며, 모임에서는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들은 과부, 곧 약자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길게 기도합니다. 율사는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로부터 대우받으며, 자기의 재물을 늘리는 그 시대의 기득권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주목하신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 곧 그 시대 통용되던 화폐의 최소 단위 동전 두 닢을 헌금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저 가난한 과부가...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시대 과부는 노동력을 지닌 남편이 없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입니다. 그런 과부가 하느님을 생각하며 가진 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그가 믿는 하느님은 관대하시기에 자기도 관대하게 행동하였습니다.

율사는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대우를 받아야 하고, 자기가 많이 가져야 합니다. 율사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 위해 처신합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말하지만, 그 마음은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오늘의 과부에게는 받을 존경도, 가진 재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경지를 넘어섰습니다.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은혜롭고 관대하신 분이라, 자기도 은혜롭게 또 관대하게 처신하려 합니다.

하느님은 계시고, 우리의 생애가 끝나면, 그분 앞에서 우리의 삶을 정산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아는 전부라면, 하느님은 현재 우리의 삶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가 죽어, 저승에 가서나 만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재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현재 보이지 않는 분을 보고 있는 듯이”(11,27) 사는 그리스도 신앙인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의 원천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하시는 일을 배워 실천하며 그분의 자녀 되어 삽니다. 그분은 자비롭고 사랑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자비와 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때, 그분은 우리 생명의 원천, 우리 생존의 원리로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가진 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은 오늘 과부의 이야기를 교회에 헌금 많이 바치라는 뜻으로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회당의 헌금수입에 관심을 전혀 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유대교 당국이 성전이나 회당에서 헌금을 강요하는 것을 비판하셨습니다. 사람은 재물을 모아서 자기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며 삽니다. 현대인은 그것을 위해 저축도 하고 보험에도 가입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칭찬하신 것은 자기가 가진 돈으로 자기 미래를 보장하려 들지 않고, 하느님을 생각하며 자기 손안에 있는 것마저 선뜻 내어놓는 관대한 그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관대한 마음에 하느님의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기고, 자기의 생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로 사도는 서간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제 할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제 손으로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시오.”(1데살 4,10-11). “누구든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시오.”(2데살 3,10)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기할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에 대한 경고입니다. 신앙인은 생활인으로 자기가 할 일을 당연히 다 합니다. 신앙인은 자기가 처한 여건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또 자기와 이웃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만 생각하고 자기가 할 일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더 나은 세상과 더 나은 생활 여건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다”(1,27)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창의력을 살려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의 그런 노력은 인류와 이웃을 위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망에만 집착하면,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소인(小人)이 됩니다. 대의(大義)를 살려 일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게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비난하시는 율사는 자기만 생각하는 소인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인류를 보지 못하고 자기가 누리는 것에만 골몰합니다.

돈과 명예가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것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런 집착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유를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서 8장에는 간음하다 잡힌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그 여인을 돌로 치려하는 유대인들의 무자비한 손아귀에서 그 여인을 구출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 이웃을 살리고 돕는 마음에 진리가 있고, 그런 마음이 참다운 자유를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자기 삶의 원천으로 삼고 그분의 진리를 배우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롭고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비와 사랑을 사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서,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 실천 때문에 그분은 그 시대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죄인으로 판단되어,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그 여인의 작은 실천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읽으셨습니다. 그 여인은 베푸시는 하느님을 따라 그분의 관대하심을 실천하였습니다. 하느님이 관대하셔서 예수님도 관대하게 행동하셨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고 치부(致富)하며 사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가르친다면서 인간이 행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소인배들이 꿈꾸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을 찾고 배우는 사람은 그런 소인배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자유로운 마음 안에 그 자유의 원천으로 살아 계십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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