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성염 요한 보스코 전 주 교황청 대사]

태풍이 남해안에 상륙했다는 뉴스를 듣고 길을 나섰다. 고르고 고른 날에 하필 태풍이람. 뛰어난 번역 실력으로 해외의 앞선 신학사상을 소개하며 국내 신학계에 돌풍을 일으킨 분을 만나기에는 안성맞춤인 날씨라고 위로하며 함양으로 향했다. 성염 요한 보스코 선생은 부인 전순란 마르가리타 여사와 함께 함양읍까지 나와 우리를 맞았다. 선생은 자택에서 식사대접을 하기로 했는데 며칠 전 부인이 밭일을 하다가 손을 크게 다쳐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해야겠다며 미안해했다. 마을 근처 식당들이 태풍으로 문을 닫아서 선생 부부가 부득이 함양읍까지 나온 것이다.

▲ 차 안에서 인터뷰 중인 성염 선생. 사진제공 <분도> 편집실
일이 꼬이려면 이렇게 꼬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선생의 자택이 있는 휴천면 문정리로 가는 길도 위험천만이었다. 강이 범람하여 도로 일부가 물에 잠기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에 나무가 쓰러져 길이 막혀 버렸다. 인부들이 길이 언제 뚫릴지 모르니 돌아가라고 했지만 코앞에 있는 마을을 어떻게 돌아간단 말인가. 선생이 묘안을 내었다. 길이 뚫리는 동안이라도 일단 차안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시간을 아끼자고 했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내다가 노무현 대통령 시절 주 교황청 대사로 발탁되어 로마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던 성염 선생은 은퇴하여 지리산 자락 ‘휴천재’에 머물고 있다. 시골생활이 불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선생은 동네 자랑부터 꺼냈다.

“갑갑한 산골짜기에 어찌 사느냐고 걱정들을 많이 하지만 막상 저는 그런 불편을 느끼지 않아요. 함양읍내에서 마을까지 군내버스가 30분에 한 대씩 다닙니다. 동네에 공소도 있어요. 공소에 머무시는 수녀님께서 공소예절을 이끌고 영성체까지 해주기 때문에 주일미사 걱정도 안 합니다. 제 집사람이 날마다 일어난 일을 사진과 함께 ‘지리산 휴천재 일기’라는 제목으로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요. 그게 바깥사람들과 소통의 창구가 되어줍니다. 손님들도 시시때때로 찾아와 무료할 틈도 없고요. 이렇게 편한 시골 생활이 어디 있겠어요?

저희 집 일층에 살고 있는 정용우 형제와 인연이 닿아 이 동네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15년 전부터 방학 때마다 내려와 번역작업을 했죠. 그러다가 은퇴를 하고 아예 정주하기로 결심하고 내려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들을 번역하는 일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는데 시간이 허락될 때 하나라도 더 번역하고 싶었어요. 2005년에 은퇴하고 나서 외부 강연 말고는 일체 강단에도 서지 않습니다. 서울에 있으면 신경 쓸 일이 많아 시간이 분산되는데 여기는 주위 환경이 너무 좋아서 집중도 잘 되고 하루 종일 번역작업을 해도 지치지 않아요.”

▲ 성염 선생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는 근래 들어 교회가 강조하는 사회교리의 바탕이 담겨 있다며, 사사로운 사랑이 사회적 사랑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제공 <분도> 편집실

한국 교회 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탁월한 번역솜씨를 가진 성염 선생은 교황청립 살레시오 대학교가 배출한 첫 동양인 라틴문학 박사이다. 라틴문학을 전공한 후 그의 번역작업은 그리스도교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들에 집중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번역해서 지금 분도출판사가 제판 중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들 중에 가장 어려운 작품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니까 인간을 살펴보면 하느님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지 않을까하고 삼위일체 신비의 실마리를 풀어가요. 그분의 작품 중에 <고백론>, <신국론>, <삼위일체론>이 삼부작으로 꼽혀요.

<신국론>은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교부문헌 총서 시리즈로 번역을 했고, <고백록>은 교회 안에 돌아가신 최민순 신부님 번역본이 있어서 바깥 출판사에서 나옵니다. 그밖에 교부총서 시리즈로 번역되어 출간된 아우구스티누스 작품이 <자유의지론>, <참된 종교>, <그리스도교 교양>이 있어요. 교부들의 사상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로마 문화를 장악했을 당시 그분들은 참신하고 앞을 내다보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도 담겨 있어요.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는 근래 들어 교회가 강조하는 사회교리의 바탕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 나라와 지상의 나라에 속해있습니다. 지상의 나라는 ‘사사로운 사랑’이 지배하고 하느님 나라는 ‘사회적인 사랑’이 지배한다는 착상이 그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사사로운 사랑은 팔이 안으로 굽게 만들고 사회적인 사랑은 팔이 밖으로 굽게 만들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팔을 보면 쉽게 이해하실 겁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도 사회회칙 <진리안의 사랑>을 통해 ‘정치가 곧 사회적인 사랑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니까 사회교리가 시대상황에 따라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게 아니고 교부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번역되어 출간된 암브로시우스의 <나봇의 포도밭>을 보세요. 국왕이 제멋대로 하던 시절에 그 얼마나 도전적인 메시지입니까? 교황님께서도 사회교리가 성전의 한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계시는 성경과 성전으로 이루어지는데, 교부들의 말씀이 성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제가 교부들에게 천착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신학사상들도 오래 가지 못해 사라져요. 반면에 교부들의 말씀은 영원히 남아있을 가르침인 것이죠.”

교회의 현실참여를 강조하는 성염 선생은 1970년대 해방신학을 국내에 소개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가 번역한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당시 현실로 뛰어든 그리스도인들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

“분도출판사 사장인 임 세바스티안 신부님께서 <해방신학>이라는 책을 들고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제가 스페인어를 모르니 영어본을 가지고 오셨더라고요. 번역을 마치고 출판을 하려는데 워낙 검열이 심한 때라 편집장 김윤주 선생이 어느 부분을 빼자고 했는데, 문제를 삼으려면 무슨 꼬투리를 못 잡겠느냐며 제가 그대로 내자고 했습니다. 호응이 매우 좋았고 신학계통 책으로는 상당히 많이 팔려 나갔다고 해요.

이 책을 번역하니까 사람들이 저를 보고 ‘해방신학자’라고 했는데, 노래 한 자리 잘 불러서 음악가가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저는 번역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제가 소개한 해방신학이 한국사회 민주화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 시대 민주화 운동을 했던 그리스도인들이 갈피를 못 잡고 있었는데 이 책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었어요. 실제로 현실에 참여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르크스주의로 돌아섰고 다시는 교회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해방신학을 근거로 투신했던 분들은 교회에 남아 있어요. 제가 번역한 책이 그리스도교 사회 활동가들에게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것을 큰 공적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임 신부님에게 돌아갈 몫입니다.”

▲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내다가 노무현 대통령 시절 주 교황청 대사로 발탁되어 로마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던 성염 선생은 은퇴하여 지리산 자락 ‘휴천재’에 머물고 있다. 사진제공 <분도> 편집실

성염 선생은 임인덕 세바스챤 신부와 개인적인 인연을 이야기하며 아울러 우리나라 지성계에 큰 기여를 한 성 베네딕도회와 분도출판사의 역할에 대하여 강조했다.

“1979년 추석에 제 동생 성찬성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제가 번역한 <해방신학>이 문제가 아니고 동생이 번역한 <페다고지>(민중교육론)라는 해방신학 계열의 책이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제가 그 책의 편집과 출간을 맡았거든요. 그 와중에 ‘남민전 사건’이 터졌는데,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집을 수색하기만 하면 <페다고지>와 <해방신학> 책이 나왔기 때문에 일이 커졌어요.

한 달 동안 취조를 당하다가 10월 26일 새벽에 풀려났습니다. 그 후에 임 신부님이 저를 위로하러 다녀가셨고,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려고 보니 여비할 돈이 떨어져 난감했어요. 더구나 명색이 박사인데 국내에 들어와서 연구할 책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임 신부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군소리 없이 자금을 변통해 주셔서 연구서들을 사갖고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이쪽 길을 걷던 많은 분들이 임 신부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지성계는 베네딕도 수도원에 감사해야 합니다. 베네딕도 수도원 회원들이 1910년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대학을 세웠으면 우리나라 지성계를 깊이 장악할 수 있었을 겁니다. 북한에 가면서 선교를 하는 바람에 세력이 분산되어 버렸어요, 한반도가 분할되고 나니까 북한에서 이룩한 업적 역시 빛을 못 봤죠. 그런데 왜관에 자리 잡은 다음에 출판사를 세우면서 다시 한국 사회에 기여를 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특히 암울했던 70-80년대 해방신학, 노동신학, 환경신학에서 10년 이상 앞질러서 길을 열어주었어요. 그 가운데는 임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해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시회에서 가서 유럽 지성계의 흐름에 비추어 한국문제를 예리하게 판단하고 시대상황에 맞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70-80년대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고 헌신했던 분들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마저도 아직까지 분도출판사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고 있고 아울러 임 신부님께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 성염 선생은 황청 대사로 있는 동안 교회 최고 목자의 입에서 남북의 용서와 화해와 통일에 대한 말씀이 계속 나오게 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사진제공 <분도> 편집실

교회의 현실참여를 강조하는 성염 선생은 자신의 주장을 주 교황청 대사직을 수행하면서 적극적으로 실천하기도 했다. 대북지원 사업을 두고 여야 간에 신경전이 벌여졌던 상황에서 그는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대사라는 직책은 국가를 대리하기보다는 국가원수를 대리합니다. 다시 말해 대통령이 펴는 정책이 국제사회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활동하는 직책이 대사입니다. 역대 정권과는 달리 노무현 정부는 대북포용정책을 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원리로 보면 이 정책은 합당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굶주리는 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게 예수님의 가르침이니까요. 당시 핵실험을 강행하고만 북한에게 인도적 식량지원이 타당한가에 대한 논쟁이 많았습니다. 이에 대한 부정적인 분위기를 바꾸고자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정부에서 이에 대해 발표하면 국제적으로 별 반향이 없겠지만, 예를 들어 성탄절 다음날 교황님께서 전 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를 선포하시면서 이 문제를 거론한다면 국제적으로 파장이 크겠지요. 임기 동안에 교회 최고 목자의 입에서 남북의 용서와 화해와 통일에 대한 말씀이 계속 나오게 하도록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남북 분단 상황을 복음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한 노고가 어느 정도 인정받은 것 같아요. 3년 임기가 연장되어 대사직을 1년 6개월 정도 더 수행했으니까요.”

성염 선생은 2004년 유럽연합이 탄생할 당시 교황청이 연합헌법 초안에 “유럽이 그리스도교 문명에 뿌리내렸다”는 문구를 넣으려고 노력했지만 유럽 국가들로부터 거부당한 사실을 상기했다.

“유럽 국가들도 자유, 박애, 평등에 바탕을 둔 정신문명이 그리스도교 복음에서 왔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도교회는 근대와 현대 유럽의 등장에 공헌한 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현대는 평신도들의 세계입니다. 교회가 책임졌던 교육과 복지가 국가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프랑스 혁명이래로 세상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성과 속이 완전히 분리된 사회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교회는 일주일 168시간 중에 단 한 시간만 신자들을 책임집니다. 그리고 167시간은 신자들 마음대로 하는 거죠. 내가 알아서 투표하고 피임하고 낙태하고 이혼합니다. 교회나 복음의 가르침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요. 결과적으로 윤리·도덕적 그리고 현실 참여적 음성이 전혀 들려오지 않는 신앙생활을 만들어 내고 말았습니다. 성속이원론이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우리나라 역시 국회의 75%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채워졌지만 정치가 전혀 복음적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이제 평신도를 그리스도교 이념으로 무장시켜야 합니다.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신앙, 실천과 결부된 신앙을 가르치고 배워야합니다.”

▲ 최근 성염 · 전순란 씨 부부는 지리산댐 건설 반대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제공 <분도> 편집실

대사직을 수행하면서 외교활동을 펼쳤던 로마나 학문에 전념하기 위하여 물러난 지리산 자락이나 성염 선생에게는 복음을 실천하고 선포하는 현장이다. 오히려 이제는 삶의 자리가 된 지방이 그를 더 필요로 하는 지도 모른다.

“중앙집권이 이루어진 국가에서는 모든 것이 수도로만 집중됩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중앙 집중화 현상은 근대 산업화를 거치며 걷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교도 서울로 집중되면서 대형화되고 특별히 개신교가 그렇습니다. 반면에 소공동체 형태는 깨지고 대형교회는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회의 도시집중, 중앙집중은 많은 폐해를 가지고 옵니다. 가톨릭교회도 도시와 서울로 몰리면서 중산층화 되고 가난한 사람이 차지할 자리가 없다는 소리가 갈수록 커집니다. 요즘 신앙인들이 신경 써야 할 문제는 오히려 지방에서 많이 생깁니다.

저도 최근에 지리산댐 건설 반대 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마을 앞 계곡을 막아 댐을 만든답니다. 댐의 높이가 50층짜리 빌딩과 비슷하고 여기서부터 실상사까지 수몰됩니다. 부산 사람들이 마실 수돗물을 대려고 댐을 만든답니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먼 곳에 댐을 만들어 물을 끌어 오기보다는 낙동강 물을 정화해서 취수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랍니다. 4대강 사업이 끝나자마자 하는 부랴부랴 서두르는 모양새가 너무 수상해요. 일단은 불교, 원불교, 개신교, 천주교까지 아우른 지리산종교연대와 지리산생명연대 그리고 경남환경운동연합이 힘을 모아 댐 건설 결정을 금년 말에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 이후로 미루어 놓았습니다. 저도 지리산생명연대 공동대표로 국회 간담회에 가서 반대발언을 했습니다.

구례군, 남원시, 산청·함양군이 신청한 지리산 케이블카 공사도 문제였어요. 유럽에는 보통 3-4천 미터 정도 되는 산에나 케이블카가 있잖아요. 지리산은 그에 비하면 낮을뿐더러 케이블카를 설치하려면 환경파괴가 엄청나요. 더구나 전국에 놓인 케이블카 대부분이 적자를 면치 못하고 통영시에서 운영하는 미륵산 케이블카만 유일하게 흑자를 내는 상황에서 너무 무모한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이 사업은 지난 6월에 환경부에서 부결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여간 조용히 앉아서 번역 일만 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저런 세상일에 말려듭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에 길이 다행히 뚫렸다. 지리산 자락의 높은 산들 사이를 비집고 흘러가는 계곡물이 내려다보이는 동네에 자리한 휴천재. 냇물이 쉬워가는 곳이라는 뜻이 쉽게 이해되었다. 태풍이 지나가는 동안 우리는 성염 선생 부부와 한가로운 담소로 웃음꽃을 피웠다. 우리와 동행한 정한길 베네딕도(대구대교구 정평위 농업분과장) 선생 부부도 휴천재 주인들과 각별한 인연이었다.

정한길 선생이 가톨릭 농민회 사무총장을 역임하면서 성염 선생의 부인 전순란 여사와 함께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벌였던 때의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지면에 싣지 못해 아쉽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변방에 살면서도 세상의 중심을 지키는 성염 선생의 처사다운 면모를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리산이 품은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이 앞으로 어떻게 이 땅에서 꽃필지 자못 궁금하다.

대담정리 <분도> 편집실
사진제공 성염 요한 보스코 전순란 마르가리타 부부, 박현동 블라시오 신부
지리산 휴천재 일기를 읽고 싶은 분은 http://donbosco.pe.kr 를 방문해보세요.

*이 기사는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발행하는 <분도>지 2012년 가을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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