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수도자장상연합회 제45차 정기총회 개회미사 강론-강우일 주교]

▲ 강우일 주교 ⓒ한국여자수도자 장상연합회

교황님께서 지난 10월 11일부터 내년 대림시기 전까지, 한 해 동안 “신앙의 해”를 보내도록 전 세계 모든 신자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처음 교황님의 공지를 접했을 때, 왜 교황님께서 새삼스럽게 신앙의 해를 선포하셨을까하는 의아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전에 ‘바오로 사도의 해’, ‘사제의 해’를 선포하기는 하셨지만, “신앙의 해”라고 하면 너무 광범위하고 추상적이고 막연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교회의 모든 것,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신앙과 관련된 것인데, 새삼 신앙의 해라고 한다면 어디에 초점이 있는 것인가 또 교황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지난 주간에 한국 주교회의 총회가 있었습니다. 총회를 시작하는 연수를 하면서 “신앙의 해”에 대한 박선용 신부님의 강의를 듣고 주교님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앙의 해”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 무엇을 느꼈는가. 주교님들은 솔직하게 상당히 당혹스러웠다고 답해 주셨습니다. 교황님께서 느끼시는 유럽 교회 안에서의 신앙의 위기의식을 이해는 하겠지만 그것을 전 세계의 모든 교회에 선포하실 필요까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저도 이 신앙의 해를 제주교구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한편으로 참 막막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황님께서 신앙의 해를 선포하시면서 내신 “믿음의 문” 교황문헌을 곰곰이 살펴보니 교황님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즉위하시면서 가톨릭교회의 수장으로서, 오늘의 이 시대 세상의 신앙의 여정을 재발견하도록 인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특별한 소명의식을 깊이 느끼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 마디로 오늘의 현대라는 세상은 너무나 속화되고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거리를 두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왜 지금 '신앙의 해'인가?

유럽이나 미주 대륙은 오랜 세월 그리스도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이 주도하는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있었던 18세기 후반부터 교회가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19세기 100여 년 동안에 엄청난 변화를 겪었습니다. 20세기 들어와서도 교회가 끊임없이 도전을 받으면서 신앙의 기본 개념, 신앙생활의 방법, 하느님에 대한 이해 등 모든 부분에서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현대에 와서 과학과 지식이 발달하고 기술이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도전과 2000여 년을 살아온 교회에 대한 도전이 갈수록 거세져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2000여 년 동안 그리스도교적인 문화를 바탕으로 가졌던 곳에서 살아오신 교황님께서는 이것을 더 강하게 느끼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는 정치,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적인 가치관이 원천적으로 배제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속화된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일례로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 국가의 원수로 뽑히는 일이 있고, 동성애자들의 결혼이 합법화되고 있습니다. 또 유럽의 인권재판소에서는 지난 11월 3일, 공립학교 교실에 걸려 있는 십자고상을 떼라는 발표를 냈습니다. ‘십자가는 학생들에게 보편적인 종교적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고 특정 종교의 영향 속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 수 있다. 다른 종교를 믿거나 무신론적인 학생들의 종교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공립학교는 종교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이것은 의무조항은 아니었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상상도 못하는 그런 변화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는 이런 무신론적이고 비그리스도적인 세대에게 옛날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전교를 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시작부터 새롭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이제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복음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러 차례 강조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새로운 복음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2주 전에 로마에서 시노드(세계 주교 대의원회의)가 개막되었습니다. 개막 총회에서 교황님께서는 새복음화를 추진하기 위해서, 새복음화를 정확히 알아듣기 위해서 도대체 ‘복음’이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생각을 해 보자고 초대하셨습니다.

복음, 누구에게 기쁜소식인가?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교황님께서는 항상 성서의 원전을 찾으십니다.) 성서의 원전을 찾아보면 기쁜 소식은 루카 복음 4장에 나오듯이 예수님이 나자렛 회당에 가셔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건네받아서 읽으시고 풀이하신 단어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교황님께서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시자마자 건네신 이 말씀이 사실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이었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기쁜 소식이라는 단어의 콘텍스트를 생각해 보면, 결국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론으로 유배 가서 이민족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진 말씀이 이사야서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했고 예루살렘 성전이 폐허가 된 지 수십 년이 경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여전히 남의 나라 땅, 유배지에서 이민족에게 압박 받는 삶을 살고 있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완전히 떠나셨구나, 이스라엘은 영영 회복의 가망이 없구나, 하느님 백성은 끝장났구나, 우리의 미래는 없구나.’

이렇게 좌절하고 있던 유배지의 포로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주님께서 너희를 떠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강하시고 힘이 있으신 분이시다. 너희를 유배로 끌려오게 하셨지만, 이제 긴 유배의 어두운 밤 시간이 끝나간다. 그리고 새로운 은총의 시대를 열어 주실 것이다.”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를 이사야서에서 들려 주셨습니다.

이사야서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의 내용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은총의 시대가 열릴 것인가, 이민족 치하에서 종살이 하던 사람들이 갈망하던 정의와 평화와 구원이 현실 속에서 곧 이루어진다는 콘텍스트가 있습니다. 이 이사야서를 받아서 예수님이 나자렛에서 읽으셨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당신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밝히실 때 이사야서를 인용하셨습니다. 이사야서를 굉장히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사야서의 메시지를 당신의 사명으로 수락하고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당시 로마 제국의 압제 하에 온갖 불의와 고통에 시달리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으셨는가, 예수님께는 무엇이 기쁘다는 말씀이셨을까요.

예수님 시대에도 백성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수탈과 억압이 계속 이어지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아래 백성들의 아픔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면하고, 자기들 자리 지키기에만 급급했고 끊임없이 로마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데 신경을 제일 많이 썼습니다. 이 안타까운 현실에 어떤 사람들은 분노하고 칼을 들고 싸웠습니다. 성서에도 나오는 열심 당원들, 무력 저항하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실패했습니다. 로마의 군사력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모두 진압 당했고 처형당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불의가 개선될 가망이 안 보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심하게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이 너무 침묵만 지키고 계신다, 하느님이 어디 멀리 가시고 안 계신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은 과연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시는가.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느님이 떠나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너희들 가운데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복음 선포의 외침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바로 문 앞에 하느님 나라가 왔다, 하느님의 왕국 하느님의 다스림이 바로 코앞에 다가 왔다는 의미였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 그것은 즉, 하느님께서 우리 한심한 세상에 들어오셔서 바로 우리 곁에 계신다, 우리의 고통스런 처지를 알고 계신다, 하느님은 우리 눈높이에 계시면서 우리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이 전하신 기쁜 소식의 알맹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쁜 소식을 말씀으로만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당신의 존재 자체가 당신의 삶 전체가 바로 이 기쁜 소식의 구현임을 현실적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일 먼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셔서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느님께서 손수 다스리실 때가 임박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이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과 슬픔에 젖어서 자포자기하며 사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함께 먹고 마시면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무엇을 믿는 신앙인가?

교황님께서 신앙의 해를 지내자고 하시는데 이 신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세상에서 신앙을 말하는 사람들은 우리 말고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불교신자, 힌두교신자, 이슬람신자들 많습니다. 그들도 다 신앙을 말하고 믿음을 말합니다. 사용하는 단어는 다를지라도 모두가 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는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하다못해 사방에 있는 점집의 무속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신들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의 해,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의 우리의 믿음과 그들의 믿음은 무엇이 다를까, 우리 믿음의 골자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녀님들은 ‘믿습니다.’ 할 때 무엇을 믿는다고 마음속에 금방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매 주일마다 신앙고백을 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로 시작하는 긴 기도문. 니케아 신경은 사도신경 보다 더 길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기계적으로 기도문을 매주 외우지만 그 내용을 한 구절 한 구절 새기면서 외워보면 이렇습니다. 신경의 앞부분 첫 구절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마지막에는 성령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교회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우리의 영원한 삶, 구원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중간에는 니케아 신경을 보면 팔 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그저 막연하게, 초월자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우리 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알리시기 위해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셔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아파하시고 어루만지시고 위로하시며, 그곳에서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일을 하셨습니다. 또 그 일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큰 뼈대입니다.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은 옛날 2천 년 전에 이스라엘에 이러한 훌륭한 삶을 사신 예수님이 실제로 존재하셨음을 머릿속으로 동의하고 인정하는데 그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습니다!” 하고 고백할 때는 예수님의 선택, 딱 한 번 짧은 인생에 온 몸을 내던지시면서 선택하신 그 삶,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서 완성하기 위하여 가난한 이들과 불의에 억눌려 고통 받는 이들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삶을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선택하고 그 분의 삶의 발자취, 궤적을 계승하고 확산하는데 까지 가야만 우리가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이 진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선포하는 기쁜 소식이 글자 그대로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즉위하시고 제일 처음 내보내신 회칙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입니다. 교황님은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고, 얼마나 우리를 사랑해 주셨는가를 신학적인 측면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펼쳐내신 회칙이 “진리 안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깨닫고 감사하고 기도하는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 받은 엄청난 사랑의 은총을 우리 안에서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풀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우리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내 주위의 사람들, 가족, 친지들만을 사랑하는 차원의 것으로는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이어 받아서 살려고 한다면, 개인적인 차원의 사랑만이 아니라 집단의 사랑, 공동체의 사랑, 세상을 향한 사랑의 차원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집단과 사회 속에서 소외되고 박탈당하고 불이익을 당하는 가난한 이들에게도 공평하고 정의로운 혜택이 가는 공동체적인 사랑을 실현을 해야 진실한 사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황님께서도 “진리 안의 사랑” 회칙에서 상당 부분을 경제 정의에 할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이루어져야 할 정의에 대해서, 환경에 이르기 까지도 다루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삶을 이어받는 신앙

교황님이 내신 두 가지 회칙을 상기하여 보면, 교황님은 믿음의 귀결을 사랑에 두십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유행가에 나오는 가까운 사람들끼리의 사랑에 머물러서는 예수님께서 펼치신 사랑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오늘 예수님이 오신다면 누구에게 먼저 다가갈 것인지를 예리한 감성을 가지고, 오늘 이 시대 현실을 꿰뚫어 보고 귀를 기울이고, 아픈 이들의 아픔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오늘 누가 가난한 사람들이고, 오늘 누가 잡혀간 사람들이고, 오늘 누가 억압받고 있으며, 오늘 누가 앞을 못 보고 암흑 속에 갇혀 있는지 관심이 없다면, 작은 공동체 안에서 우리끼리 사랑한다고 외쳐봐야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SKY”라고, 쌍용 해고자, 강정, 용산 유가족들 문제 해결을 위하여 연대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비록 주류 언론들은 이 시대 아픈 사람들을 잊은 지 오래고 언론에서 다루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지만, 제주에서 ‘생명평화대행진’이라고 해서 그네들과 연대하기 위해서, 그네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걷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출발할 때는 50여 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제주에서 출발하여 목포로, 광주로, 창원을 거쳐 지리산을 지나 계속 걷고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이 시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려고 온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예수님의 선택하신 복음화의 길을 어떻게 이어 받을 수 있는가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오신다면 제일 먼저 누구를 찾아가실 것인지, 누구와 함께 어울리시고, 누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누구와 식사를 하실 것인지 끊임없이 성찰하고 우리 삶의 표지판으로 삼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들의 신앙이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종교인들로서의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이어받는 신앙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12년 10월 23일
제주교구장 강우일 베드로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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