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 강한]

▲ 심슨 가족(The Simpsons) 20시즌 13화 갈무리

얼마 전에 본 TV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The Simpsons) 20시즌 13화에서는 천주교를 희화화(戱畵化)하고 있었다. 아버지 호머의 어리석은 실수로 수녀원에 들어가게 된 갓난아기 매기를 되찾기 위해 딸 리사가 성소자로 위장해 잠입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육아실 담당 수녀가 아이들에게 “네가 즐겁고,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건 죄”라는 가사의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이 등장했다. 이 만화에서는 개신교회에서 판에 박힌 신앙생활을 하는 심슨 부부가 늘 가톨릭을 적대시하고 경계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번 편에서는 ‘죄’에 대한 천주교 신자들의 관념과 두려움이 유별나다는데 초점을 맞춘 것 같다.

‘죄’라는 개념은 신·구교를 막론하고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천주교 신자가 읽는 교리서들의 상당 부분이 고해성사나 십계명과 관련하여 죄의 개념, 종류, 원인, 결과에 대해 가르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내가 받은 교리교육을 돌이켜보니 성체성사에 앞서 자신의 삶을 성찰해야 하며, 큰 잘못이 있다면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를 받고 성체를 모셔야 한다고 배운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성체 전에는 늘 멈칫하는 순간이 있다. ‘내가 지금 성체를 모셔도 되는 지위에 있는가’ 하고 자신에게 묻는 시간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미처 고해성사를 보지 못한 동료 신자들이 미사 중에 성체를 모시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고, 나 역시 그랬던 적이 있다. 쌓인 죄를 용서받지 않고 성체를 모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그것은 신성모독, 모령성체(冒領聖體)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두려움을 내 친구 신자들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정결을 거스르는 죄.. '아직' 결혼 '못한' 청년 신자들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죄와의 씨름에서 나에게 특히 어렵게 느껴지는 게 있다면 “간음하지 마라”는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이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8)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비롯한 ‘남자 신자’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따르자면 ‘시선’이나 ‘상상’도 간음의 죄가 된다. 비교적 최근에 읽었던 교리 안내서는 “간음하지 마라”는 계명에 관해 “음란한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로 자신을 어지럽히지 않았는가”를 양심 성찰 항목으로 제시하고 있다(김경식, <생활교리> 2차 개정판, 대건인쇄출판사, 274쪽). ‘언행’ 뿐만 아니라 ‘생각’마저도 진지한 양심 성찰에 포함시키자니 생활은 극히 엄격해진다.

최근 빈발하는 성범죄의 배경으로 뒤틀린 성문화와 넘쳐나는 포르노그라피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반면 혼전순결 ‘따위’를 강조하다가는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주의자로 치부되는 상황, 쾌락과 성 개방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느껴진다. 이런 와중에 금욕으로써 정결을 지키고 실천하라고 요청받는 신자들(<가톨릭교회 교리서> 2349, 2350항 참고), 특히 ‘결혼하지 않은 청년 신자’들이 이 요청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 나는 몹시 궁금하다.

교황청이 펴낸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보면 2351항부터 총 여섯 항에 걸쳐 ‘정결을 거스르는 죄’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는 방탕(성애의 쾌락을 무질서하게 원하고 그것에 문란하게 탐닉함)과 사음(邪淫; 혼인하지 않은 남녀의 육체 결합), 자위 행위, 포르노그라피의 제작과 배포, 성매매, 강간 등이 포함된다.

‘아직’ 결혼하지 ‘못한’ 우리 청년 신자들은 이러한 죄들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이러한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자신의 나약한 신앙을 탓해야 할까? 아니면 젊은이들이 정결한 결혼 생활을 기약 없이 미루거나 포기하게 하는 사회와 경제 상황을 탓해야 하는 것일까?

되도록 죄 짓지 않고 살며, 온전하게 성체성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음란’한 영상과 말, 행위로 넘쳐나는 세속에서 눈을 돌리고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쾌락을 좋아하고 익숙하기까지 한 나의 몸은 매질을 해서라도 똑바로 다스려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나 꼬장꼬장하게 보이는 교회를 향해 “성매매를 하는 것도 아닌데 ‘야동’ 좀 보는 게 어때서? ‘자위’ 좀 하면 어때서?” 하고 대들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욕망의 맨얼굴이 “더럽다”고 느끼며, 자칭 신자라면 계명을 완전히 지키지는 못해도 지키려는 마음이라도 있어야 하고, 조금이나마 노력해야 한다고 여긴다. 아직 나는 이러한 분열 속에 살고 있다.

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간음하지 마라”는 계명에 관한 어려움과 혼돈을 풀 수 있도록 명쾌한 해답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나친 기대인지도 모르겠다. 결코 단순하지 않은 세상사를 견디며 죄악을 구별하고자 노력하고, 저지른 잘못이 있다면 기꺼이 인정하고 뉘우치고 갚으며 사는 게 결국 사람의 운명이 아닐까 하는 단상도 스쳐간다.

강한 (안토니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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