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 정현진]

나는 가톨릭학생회 출신이다. “어버이 날 낳으시고, 가톨릭 학생회 날 기르시니...”라고 고백할 만큼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가톨릭학생회다. 예수라는 존재를 새롭게 알게 된 것도 가톨릭학생회를 통해서였고, 신앙인으로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 것도 가톨릭학생회였다. 누구보다 모자란 나를 많은 이들이 봐준 덕에 부족함을 깨치면서 지금껏 신앙인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내 인생에 가장 신났던 시간인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돌아볼 때 아직도 후회되는 것이 있으니, 다름과 다양함을 옳고 그름으로 받아들인 나의 태도다. 한참 치기어린 나이, 가톨릭학생운동을 흡수하고 배우는데 푹 빠져있던 나는 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는 친구들에게 왜 다 같이 나서지 않느냐며 화를 냈다. 그들에게 신앙이 왜 그리 편협하냐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내가 옳다”고 여겼던 나에게 돌아와야 했던 말이었다. 졸업 후 ‘간사’라는 직책으로 다시 가톨릭학생회에 돌아갔을 때, 나이 어린 학생들을 만나면서 가장 아프게 깨우쳤던 것도 ‘네 기준으로 함부로 남을 재단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상봉 기자

<지금여기> 기자가 되어 취재를 나갔던 어느 날, 하느님은 내 오만함의 증거를 들이댔다. 두물머리에 취재를 갔을 때의 일이다. 두물머리 지킴이 한 명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혹시 서가대연 간사 아니셨어요? 저 00대학 회원이었어요.” 말을 듣고 보니 낯이 익었다. 나는 주로 사무실에 앉아 학생들을 만났었는데, 그들은 주로 각 학교나 연합회 집행부들이었다. 내가 회원 일부를 앞에 두고 ‘현실 참여’ 운운하며 닦달하고, “요즘 애들은 왜 이것밖에 안되느냐, 가톨릭 학생회가 어쩌다...”라고 한탄하는 동안 어떤 이들은 조용히 자신의 길을 찾아 살고 있었다. 몹시도 부끄러웠다. 내 눈앞에서 내 방식대로 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던 거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선배들이 있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은 한 마디 때문에 나는 그 선배들과 나홀로 절연했다. 어수선한 시국 이야기를 하다가 벌어진 일이다. 그들이 여전히 나와 생각이 같아야 한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본 것뿐이었다. 얼마 전 그들을 다시 만났고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내 탓임을 알게 됐다. 그 뒤로 단절됐던 그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라 만날 때마다 속죄의 기도를 날리고 있는데 그분들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자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가진 연줄이 그 뿐이라 주로 가톨릭학생회 선후배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 중심은 한 달에 한번 갖는 ‘동문 미사’자리다. 복되게도 70년대 학번부터 2000년대 학번까지 두루 만나면서 실로 천차만별의 삶과 생각을 만난다. 꿈꾸던 공동체가 이런 것인가 싶다. 느슨하지만 공동의 지향을 갖고 저마다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내는 공동체 말이다. 사회 각계각층, 교회 안팎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를 증거 하는 그들은 끊임없이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성찰하게 한다. 그리고 그 때마다 기도한다. 모쪼록 그전과 같은 어리석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게 해 달라고.

최근 언론인으로서 부적절한 행보를 보여 안타까움을 사고 있는 이진숙 MBC 홍보기획본부장에 대한 동료 기자들의 평가를 듣던 중, 한 사람의 평가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 평가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진숙 본부장은 독종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 병폐를 고발하고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기자의 미덕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신념을 수호하는 부분에서 독종이었던 것”이라며, 이진숙 본부장을 “옆을 전혀 보지 못하는 눈을 가리고 뛰는 경주마”라고 표현했다.

기자가 되면서 결심했던 것은 교회 안팎의 다양한 이야기와 들어주는 이 없는 목소리를 전해주자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내 안에 있는 벽부터 없애야 했다. 알고 있는 것과 깨우치는 것은 다르다는데, 그간의 교훈에도 여전히 나는 익숙한 것에 먼저 다가가게 되고,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한발 짝 물러나게 된다.

지금 내 눈과 기준에 맞춰 판단하고 일부만으로 나머지를 규정하는 것. 아마도 만인이 경계해야 할 일일 텐데, 하물며 불편부당해야 할 기자이며 신앙인임에야 말해 무엇 하랴.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오 24, 42)

정말로 깨어있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전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싹을 틔우고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에 귀를 닫는 불행을 자초하지 않기를 빌고 또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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