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비평-김홍락 신부]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작년 10월 11일, 자의교서 「믿음의 문」(Porta Fidei)을 통해 ‘신앙의 해’를 선포했다. 그리고 그 막이 올랐다. 때맞춰 교회 각 언론들은 ‘신앙의 해’ 기획특집들을 앞 다퉈 내놓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9월 30일자 <가톨릭신문>은 ‘신앙의 해’ 선포 취지와 역사적 배경에 대한 기획기사를 내보냈고, 그 제목으로 “벼랑 끝에 선 교회...‘신앙 쇄신’만이 답이다”를 뽑았다. 교회는 “벼랑 끝에 서” 있고, 이를 타개할 ‘유일한’ 해답은 바로 “신앙 쇄신”이라는 것이다. 옳다. 필자도 100% 공감하는 바다.

‘신앙 쇄신’은 어느 종교든, 어느 교단이든 반드시 요청되는 시대의 화두다. 그리고 ‘쇄신’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는 ‘누가’ 그 주체가 되어 ‘누구의’ 신앙을 ‘어떻게’ 쇄신하느냐다. 다시 말해서 쇄신의 ‘주체’와 ‘대상’과 더불어 ‘내용’과 ‘방법’의 문제다. 오늘은 쇄신의 ‘주체’와 ‘대상’에 대해 묻고자 한다.

▲ ‘신앙의 해’와 관련한 문헌들은 ‘교회의 신앙’을 말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 종착점은 결국 ‘평신도들의 신앙’을 향한다. ⓒ 한상봉 기자

‘신앙 쇄신’의 주체, 하나의 교회인가? 교도권인가?

‘신앙의 해’를 맞아 발표한 각종 교회 문헌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세상에 선보인 수많은 교회 문헌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문헌 ‘선포의 주체’인 동시에 ‘적용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이는 ‘교회’는 계층에 따라 분리될 수 없는 “그리스도와 한 몸”(1코린 12,12; 12,27)이라는 그리스도교 전통 신학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한 결과이기도 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 전체로, 그리고 공의회 정신을 이어받아 1983년에 개정된 현행 교회법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법전>에서도 ‘하느님 백성’ 전체를 일컫는 개념으로 정의했다.

그런데 우리는 나뉠 수 없는 존재인 ‘교회’가 선포한 문헌들의 ‘선포 주체’를 또 다른 이름으로 이해하고 있다. 바로 ‘교도권’(敎導權, Magisterium)이다. 교회 문헌을 발표하는 당사자가 ‘교회’를 대표하는 교도권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교도권은 “교황과 주교의 가르치는 권리”를 말한다. 즉 교도권은 ‘교황’과 ‘주교’에게만 주어진 권리다. 교회 문헌들의 법적 당위성과 위상은 이 교도권에 근거한다. 즉 ‘교회’가 선포의 주체라고는 하지만 결국 교도권이 문헌 선포의 실제적 ‘주체’인 셈이다.

그렇다면 선포의 대상은 누굴까? 앞서 ‘교회’가 선포의 주체이자 대상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현실 안에서도 ‘교회’ 자신이 선포의 대상일까? 교회의 바람과는 달리 주체와 대상의 단일성은 현실 안에서 곧 깨져버린다. 특히 ‘쇄신’과 관련하여 선포의 주체는 항상 ‘하나의 교회’가 아닌 ‘교도권’이었다. 그리고 쇄신의 내용이 어찌 되었든지 간에 그 대상은 ‘교도권 밖의 무엇’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평신도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앙 쇄신’에 있어서 쇄신의 대상은 ‘평신도의 신앙’인 것이다. 물론 ‘신앙의 해’와 관련한 문헌들은 ‘교회의 신앙’을 말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 종착점은 결국 ‘평신도들의 신앙’을 향한다.

분명 주체와 대상은 ‘교회’ 자신인데, 현실에서는 주체와 대상, ‘두 교회’가 존재하는 듯한 모양새다. 선포의 주체는 ‘교도권 교회’, 그리고 적용대상은 ‘평신도 교회’다. 여전히 성직자로 대표되는 교도권과 그들의 관리 대상인인 평신도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통합적 주체와 대상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주체’로서의 교회와 ‘대상’으로서의 교회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위기에 흔들리는 평신도들의 신앙, 교도권은 책임이 없는가?  

‘신앙 쇄신’과 관련해서 이 이분법적 도식은 어떻게 적용되고 있을까? 우선 ‘신앙의 해’ 대표 문헌인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자의교서 「믿음의 문」은 ‘교회’라는 용어를 빌어 설명하고는 있지만, 어느 한 구절 빠짐없이 쇄신의 당위성과 초점을 직/간접적으로 평신도들의 ‘신앙 정체성’에 맞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신앙 쇄신’을 화두로 던진 이 교서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을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내 놓았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종종 공공연하게 부인되고” 또한 “사회 대부분의 영역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믿음의 문」 제2항)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신앙에 대해 “깊이 성찰”할 것을 촉구하면서(「믿음의 문」 제8항), “고백”하고, “경축”하며, “실천”하고, “기도”함으로써 신앙의 내용을 “재발견”하는 것(「믿음의 문」 제9항)이 그 해결책이라 강조한다. 그리고 이 신앙의 재발견이 신앙 쇄신이며 또한 “신자들의 책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자의교서 「믿음의 문」 이후의 모든 문서와 발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올 1월 6일에는 교황청 신앙교리성을 통해 「‘신앙의 해’를 위한 사목 권고를 담은 공지」’(Note with pastoral recommendations for the Year of Faith)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지난 6월 21일 오전 바티칸 공보실에서 열린 ‘신앙의 해’ 소개 기자회견에서 새복음화촉진평의회 의장인 리노 피시켈라(Rino Fisichella) 대주교는 “‘신앙의 해’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신자들의 신앙’을 북돋우려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신앙의 위기’ ‘현대인들의 영적 빈곤’에 대해 우려했다. 결국 교도권의 입장에서 오늘날 교회 위기의 원인을 ‘세속주의’, ‘상대주의’와 함께, 그에 휩쓸리는 평신도들의 ‘신앙의 정체성’ 부재를 꼽고 있다. 결국 문제는 신자들의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도권이 말하는 대로 ‘신앙의 정체성’ 부재의 원인이 평신도들의 부실한 신앙생활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평신도들이 ‘세속주의’와 ‘상대주의’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것이 그들의 신앙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의 위기 상황이 평신도들의 무분별함에만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현실적으로 어느 누구로부터도 통제를 받지 않은 채 본당에서 교도권을 대표하고 최고 결정자로 군림하는 성직자들의 철저한 자기 개혁과 쇄신이 전제되지 않는 한 교회가 그토록 원하는 ‘신앙 쇄신’이 결국 공염불로 그치고 말 것은 뻔하다. ⓒ 한상봉 기자

교회 위기의 일차적 책임은 교도권에 있다

이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문헌 선포의 ‘주체’ 문제로 돌아가 보자. 앞서 언급한 대로, 선포의 주체는 ‘교도권’이다. 그런데 평신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교도권은 그 일반적인 의미와는 달리, 사제들을 포함한 성직자 집단을 의미한다. 현실적으로 평신도들은 사제들을 통해 교도권 교회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사제들은 교도권의 권리를 위임받아 그 가르침을 사목현장에서 직접 적용하는 시행자라는 점에서 그렇다.

교도권에서 지적하듯, 평신도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가르치는 직무’를 소홀히 한 교도권의 책임이다. 그리고 더욱 가깝게는 사목현장에서 그 직무를 집행하는 사제들의 책임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책임을 오롯이 평신도들의 몫으로 치부하며, 그들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쇄신’의 일차적 ‘대상’은 교도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도권의 쇄신’ 특히 넓은 의미에서 성직자들의 ‘신앙 쇄신’에 대한 언급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단언컨대 교회 역사상 단 한 번도 성직자 집단의 ‘신앙 쇄신’을 현실의 기준에 맞춰,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단행한 적이 없다. 백번 양보해 그러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문서로만 남았지 사목현장에서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단적인 예로 멀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 「사제품」(Presbyterorum Ordinis)>을 비롯하여, 가깝게는 교도권에서 매년 ‘사제 성화의 날’ 담화를 발표하고는 있지만, 오늘날 평신도들을 사목하는 사목현장의 위기를 고려해 볼 때, 과연 이러한 노력들이 효과를 맺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결국 쇄신의 ‘주체’가 쇄신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삶이 변하지 않는 사제들, 말뿐인 신앙쇄신은 공염불

사제들의 이런 현실에 대한 분명한 예가 바로 그 본당의 성직자들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이다. 과연 우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느끼는가? 사목자에 대한 감탄스런 존경심이 우러나오는가? 마냥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일선 사목현장에서 벌어지는 성직자들의 비 영성적, 비 그리스도교적 사목 행태들에 대해서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쉽지 않다. 현실적으로 어느 누구로부터도 통제를 받지 않은 채 본당에서 교도권을 대표하고 최고 결정자로 군림하는 성직자들의 철저한 자기 개혁과 쇄신이 따르지 않는 한 교회가 그토록 원하는 ‘신앙 쇄신’이 결국 공염불로 그치고 말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물론 교회 내 성직자 조직 가운데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교회 내 쇄신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제는 함세웅 신부를 비롯하여 극소수에 불과하다. 나머지 사제들은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쇄신과 정의의 목소리를 드높이지만, 정작 교회 내적인 쇄신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닫는다. 사회 쇄신을 위한 목소리만큼, 교회 쇄신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 그것이 어렵다면, 그들 역시 쇄신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자인(自認)하는 꼴이다.

“백성의 목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임을 기억하라  

798년, 영국 요크(York)의 복자 알퀴누스(Flaccus A. Alcuinus, 735-804)는 황제 샤를대제(Charlemagne)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여기에서 “백성의 목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Vox Populi, Vox Dei)라고 간언했다. 교회는 이 말을 기억해야 한다. 설령 ‘신앙의 쇄신’의 대상이 여전히 평신도들이라 할지라도, 교회는 그들의 목소리를 귀 담아 들어야 한다.

“교회의 쇄신은 신자들의 삶의 증언을 통해”(「믿음의 문」 제6항) 이루어진다고 말하지만, 아쉽게도 교회는 “신자들의 삶의 증언”에 대해 귀 닫은 지 이미 오래다. 교회 쇄신의 지표인 신자들의 삶을 통한 그들의 신앙 감각은 늘 홀대 받고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교도권’ 밖의 존재, 즉 쇄신의 대상인 평신도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평신도들은 끊임없이 교회의 쇄신, 신앙의 쇄신을 촉구해야 한다. 그리고 평신도 역시 자신들이 스스로 ‘신앙 쇄신’의 주체임을 자각해야 한다. 또한 교도권은 평신도를 ‘쇄신’의 ‘대상’만이 아니라 동반자로 인정해야 한다. 지난 역사에서 교회를 바꾼 것은 교도권 주도의 쇄신이 아닌 신자들의 열망이었다. 영성과 신앙의 흐름을 주도한 것도 신자들이었다. 더 이상 성직자들의 손에만 맡겨 놓아서 될 일이 아니다. 전혀 새롭지 않은 방법으로 ‘새로운 복음화’를 시도하는 교회, 삶의 변화가 없는 성직자들에게 맡겨둔 ‘신앙 쇄신’...모두 위태롭다.

불현 듯 시인 최승호의 시(詩) <때밀이 수건>의 한 자락이 떠오른다.

“제 몸 씻을 새 없는 성자(聖者)들이 불쌍하다. 그들의 때 묻은 성의(聖衣)는 누가 빠는지...”

이제 잠시라도 평신도들의 때 묻은 몸을 내려놓고, 성직자들도 자신의 때 묻은 신앙을 한번 돌아볼 생각은 없는지 묻고 싶다.

 

 
 

김홍락 신부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
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Navotas)시 빈민촌에서 도시빈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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