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사랑하기 전에 우리는 모두 외로웠다. 물론 사랑하고도 외로울 수 있다. 그래도 돌아보면 누군가 있다는 것, 비록 사진 한 장과 기억으로만 남게 될지라도 어떤 이와 함께 한 시절을 건너간다는 건 그야말로 ‘동화 같은 얘기’의 서막이 되기에 충분하다.

 
사랑에 처음 빠져들 때 우리가 사랑한 남자는 어쩌면 모두 ‘늑대’인지 모른다. 어딘가 무리 속에 섞이지 못하고 ‘거슬릴까’ 뒤로 숨고,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관심 갖지 않도록 조용히 숨어 살았”던 시절을 겪지 않은 청춘이 있을까. “목이 늘어진 티셔츠, 필기하느라 정신없는 뒷모습”의 그에게 자꾸만 눈길이 가는 순간부터 여자는 타인을 맞을 준비를 시작한다. 나의 세계 속에 그를 받아들인다는 것, 힘겨운 일이지만 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기쁨인가. 그렇게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본 ‘늑대’와 ‘꽃 한 송이’의 사랑 이야기가 시작된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늑대아이>는 참 예쁘게 시작해 잔잔하게 흘러가다가 마침내는 웅혼하다고 할 정도의 스케일과 감동을 선사한다. 가장 나약한 동물로 태어나 물장구 한 번에도 생명을 위협받던 사람의 아이가 어떻게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지 지켜보는 일은 세상 모든 부모를 상념에 젖게 한다.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은 늑대인간이었습니다”라는 포스터의 한 줄, 그게 이 영화의 시작이고 과정이고 끝이다. 본 모습을 감춘 채 ‘인간처럼’ 살아가기가 너무도 힘든 남자, 언제나 혼자였던 남자, 이름도 가족도 없이 먹고살기 위해 ‘문명화’의 절차를 어쩔 수 없이 밟아온 남자, 온전한 늑대도 인간도 아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괴로웠던 남자. 어째 낯설지가 않다. 겉모습은 늑대를 닮은 반인반수라지만, 이것은 또한 모든 현대인의 고뇌가 아닌가. 문명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본성 따위는 잊은 지 오래인 많은 사람들의 털어놓지 못할 여린 속내가 아닐까.

집도 절도 없는 늑대를 사랑하는 게 도시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외로운 하나(はな, 꽃)에겐 쉬웠던 걸까. 사랑은 꿈같았지만,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서로의 유일한 ‘집’이 되어준 보람은 컸지만, 이들이 도쿄라는 도시에서 살기란 고달프고 위험하다. 그리고 끝내 소중한 짝도 잃고 만다. 프로이트는 <문명과 불만>에서 로마의 극작가 플라우투스의 <아시나리아(Asinaria)> 중의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라는 문장을 인용했다. 극작가 고재귀의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에서도 파편화된 삭막한 인간관계는 서로를 적으로 돌리게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고, 옆 사람을 밟고 올라가야 너라도 산다고 가르치는 목소리는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눈 오는 날 태어난 딸 유키와 비오는 날 태어난 아들 아메를 남기고 아빠는 죽는다. 그 최후가 어찌나 비참하고 ‘도시폐기물’스러운지 잔혹할 정도다. 도시에서의 죽음이란 한 줌의 품격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인가. 엄마는 늑대도 사람도 못된 핏덩이들을 데리고 살기 위해 첩첩산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대자연과 이웃들에게 묻고 의지하며 남매를 키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된 생활이지만,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땅에서는 차츰 농작물이 자란다. 아이들이 눈치 안 보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생활이다. 숲이 이들 가족을 살게 한다. 늑대인간을 사랑하여 그의 아이들의 엄마가 되기를 선택했으니, 나머지 생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는 것쯤은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언제나 셋이 함께였던 “12년 세월이 동화같이 찰나”였던 살뜰한 모정의 이야기가 가슴 뭉클하다.

하나는 매순간 묻고 또 묻는다. 늑대는 어떻게 어른 늑대가 되는가? 사람은 어떻게 해야 사람답게 자라는가? 늑대와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이 아이들은 어떻게 커야 되는가? 자식은 언제 보살피고 언제 놓아주어야 하는가?

인간인 엄마는 감히 대자연의 품으로 아이를 보낼 용기도 없고, 세상 사람들 속으로 아이를 내보내기도 두려워 걱정뿐이다. 자신의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 몰라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산다.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하지만 길은 어디선가 끊어져 있다. 인류가 동물로서 살아온 습속도, 대자연의 일원으로 다른 생명들과 어울려왔던 방식도 깨어진 유물 같은 것이 돼버렸다. 대체 이어붙일 수는 있는 것인가. 이분법으로 나뉜 인간과 자연의 중간자로서 이 아이들의 미래는 있는 것인가. 멸종된 늑대와 원시림, 수많은 인간의 파괴행위는 어떻게 속죄해야 하는가.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근원적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람도 늑대도 아닌 채 괴물로 살지는 않기 위하여,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김원 (로사, 문화평론가)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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