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8일(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예리고에서 소경 한 사람을 눈뜨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들이 기적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도 기적을 찾아 나서라는 뜻이 아닙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기적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복음서에 기록으로 남긴 것은 예수님 안에 놀라운 은혜로움을 그들이 체험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 회상을 이야기로 만들어 기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예리고에서 소경 한 사람을 고친 이야기였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어떤 분이고, 그들이 어떤 실천으로 그분의 뒤를 따르는 지를 그 이야기 안에 담았습니다. 부모를 비롯하여 우리가 존경하던 분이 세상을 떠나면, 우리는 그분이 살았을 때 하신 말씀과 일을 회상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억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생각하면서, 그분이 남긴 말씀과 하신 일에 감동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의 정신을 이어서 살아야 하겠다고 마음다짐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는 것은 부모나 선생님에 대해 우리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제자들은 그분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행위들이 하느님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으로 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초기 신앙인들이 믿던 바와 그들이 하던 실천을 기록하면서 그것을 읽는 독자도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고 권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바르티메오라는 눈먼 걸인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부르던 호칭입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말은 초기 신앙인들이 바치던 기도이기도 합니다. 루가복음서는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한”(18,9-14) 이야기를 하면서 바리사이는 기도에서 자기가 지키고 바친 일들을 나열하였지만, 세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빌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는 세리의 기도가 참된 것이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비를 비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준수가 하느님 앞에 인간이 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흘러들어 우리의 삶 안에 나타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비가 자기 안에 흘러들도록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모르고, 자비를 비는 그리스도인들을 꾸짖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큰 소리로 외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소경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 너의 간청이 간절하기에 고쳐 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는 말은 예수님이 자주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고치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데에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잘 바쳐서, 하느님의 축복을 얻어 잘 사는 데에 신앙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비롭고, 고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이 자기 안에 일하시게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이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장애가 생겼을 때, 그것을 치워주는 하느님을 기대합니다. 운동 경기에서 이기게 해 주고, 수험생을 입학시켜 주는 하느님을 기대합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어주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초능력을 주는 하느님을 기대합니다. 인간이면 모두가 당연히 겪는 한계를 넘어서게 해주는 하느님을 기대합니다. 우리는 내세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하느님을 기대합니다. 결국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아쉬움을 달래 주고, 미래를 위한 불안을 해소해 주는 하느님입니다. 인류역사가 끊임없이 상상한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신앙은 하느님에게 빌어서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그분의 뜻이 우리의 실천 안에 이루어지게 하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내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한 사람만이 소중한 나머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열리는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소경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열리는 넓은 세상을 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실천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알아듣고 배워서, 하느님으로 열리는 넓은 세상에서 그 자비를 실천하며 살겠다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경은 예수님에게 자비를 간청하였더니, 시력을 회복하였습니다. 그 자비를 바탕으로 넓은 새로운 삶의 지평이 그 사람 앞에 열렸다는 말입니다.

자비의 눈으로 주변을 보고,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자비롭지 못합니다. 오늘의 소경은 사람들이 제지하는데도 불구하고, 큰 소리로 자비를 외쳤습니다. 자비를 제지하는 소리는 우리의 삶에도 많이 들립니다. 우리 안에서, 혹은 우리 밖에서 그 소리는 들립니다. ‘자비는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따끔한 맛을 보여 주어야 한다’, ‘자비를 실천하면 손해만 본다’, 우리를 자비롭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소리들입니다. 신앙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는 데에 있습니다. 그 자비가 우리 안에 흘러들어서 우리도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며 사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든 이에게 또 언제나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이면,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지평(地平)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우리에게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소경과 같이, 많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불러야 합니다. 그 자비를 부르고 실천하면,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도 듣게 될 것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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