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언론 - 말이 말씀을 부렸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약자들의 아픔과 양심세력의 외침을 대변하던 한국가톨릭교회는 1997년의 정권교체를 기점으로 특별히 참여정부의 등장 이후 전혀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이래 한결같던 진보진영의 신뢰는 희미해지고 수구집단으로부터 강력한 지지 혹은 옹호를 입는 형국이 전개된 것이다. 여러 가지 원인 가운데 현실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하는 교회지도자들의 순진함 혹은 무능도 한 몫을 했다. 수구 기득권세력과 개혁집단의 각축과 갈등국면에서 뚜렷한 입장을 갖추지 못하고 그 때마다 자신의 이해를 따지며 엉거주춤하던 교회는 정부의 개혁정책에 반발하는 수구언론들의 손쉬운 도구로 활용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사회를 향한 말씀 선포의 기능을 급격히 잃고 말았다. 김수환 추기경의 사례는 교회의 ‘말씀’이 세속의 혀들에 의하여 오염되고 농간에 휘말리는 메커니즘의 전형이다.

1. 교회의 말씀 - 디딤돌에서 걸림돌로 혹은 걸림돌에서 디딤돌로

민주화 여정에서 경이로운 행보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입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의 말씀 한 마디에 군사독재정권이 휘청거렸고 사목자와 평신도들뿐 아니라 온 국민이 어둠 속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민주진영에 의한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세상에 비친 추기경의 모습은 예전과 너무 달랐다. 민주화의 고비마다 물꼬를 트는 말씀의 힘으로 국민을 통합했던 추기경이 언제부터인지 민주주의를 억압하던 세력과 돈독한 친교를 과시하는 모습이 빈번하였다. 추기경의 변화에 대하여 당황하는 소곤거림이 심상치 않더니 급기야 수면 아래서 오가던 이견이 공개적으로 제기되었다. 한 칼럼니스트가 한 때 민주주의의 디딤돌이었던 추기경이 오늘은 “현실을 호도하고 민족의 내일에 심각한 걸림돌”이 되었다고 한탄하고 나선 것이다.

손석춘,「과연 이 나라의 주된 흐름이 ‘반미-친북’인가」,오마이뉴스, 2004.1.31.: “[…]그런데 참으로 생게망게한 일이다. 추기경의 근심은 엉뚱한데서 비롯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추기경은 ‘한 리서치’를 근거로 들며 “미국이 주적(主敵)이 됐다”고 개탄했다. “군장성에게서 사병들 가운데도 반미 친북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나라의 전체적 흐름이 반미 친북 쪽으로 가는 것은 대단히 걱정스럽다”고 강조했단다. […] 하지만 가톨릭 추기경의 말에 이제 더 침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추기경의 정치적 발언이 현실을 호도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 내일에 심각한 걸림돌로 불거졌기 때문이다. 가령 조선일보 사설을 보라. “추기경의 지적들이 듣는 이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원로 종교인으로서의 통찰력이나 예지의 덕분만은 아닐 것”이라고 추어올린 뒤 다음과 같이 십분 ‘이용’한다. “여느 사람이 그런 걱정 한 가닥을 들추기만 해도 반민족이니 반개혁이니 하는 돌팔매를 받기 일쑤여서 그저 안으로만 삭이며, 입 없는 사람 흉내나 내며 사는 것이 보통사람의 세상살이였던 셈이다. 그래서 추기경의 평범한 세상 걱정이 많은 국민들에게 ‘나라에는 역시 원로가 필요하구나’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 하지만 추기경의 발언은 사실과 뒤틀려 있다. 추기경이 근거로 든 ‘리서치 조사’를 보자. […] 문제는 조선일보의 선동을 꾸짖어야 마땅할 ‘원로 종교인’이 되레 확대재생산하는 데 있다. 과연 이 나라의 주류가 ‘반미-친북’인가. 아니다. 현실은 정반대다. 여전히 이 땅의 주류는 ‘친미-반북’이다. 그래서다. 두 여중생의 원혼은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 이 땅을 배회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 총알받이로 우리 젊은이들을 내몬 바로 그 신문들이 언죽번죽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으로 젊은이들을 내몰고 있다. […] 추기경에 대한 ‘거짓 예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겨레의 생존권이다. 추기경의 근심을 ‘백성’이 걱정하는 진정한 까닭이다.”

이런 격세지감의 변화는 안타깝지만 일체의 권력과 성역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새로운 조류를 감안하면 그 정도의 비판은 다양한 목소리 가운데 하나로 듣고 넘겨도 무방한 것이었다. 추기경 자신도 이런 점에 대해서는 관대한 입장을 보였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조선·중앙·동아일보 세 가지 수구신문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추기경 편을 들며 일제히 총공세를 펼쳤던 것이다. 조선일보는 “추기경의 발언이 갖는 무게와 호소력은 단순히 그의 지위에서 나오는 권위 때문이 아니다. 격변의 연속이었던 지난 몇 십 년 동안 그가 남다른 고뇌와 용기를 통해 보여준 통찰력과 예지를 국민들이 신뢰하기 때문이다.”(조선일보 2004.2.2)라며 추기경과 진보진영 사이에 적대 전선을 만들어 놓았다. 이런 일은 추기경의 본의와 그리고 칼럼의 취지와도 전혀 무관한 결과였다. 반론과 재 반격이 이어지면서 추기경의 발언과 칼럼은 사회적 쟁점이 되었고 이 과정을 냉정하게 통제하지 못한 교회는 사회적 공신력에 상당한 손상을 입었다.

해프닝은 조선일보의 사설에서 시작되었다. 2004년 1월 29일 김수환 추기경은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 일행의 예방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추기경은 “미국이 주적이 됐는데 반미친북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요지의 걱정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조선일보는 이틀 후인 2004년 1월 31일 “추기경의 근심, 백성의 걱정”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놓았다.

「추기경의 근심, 백성의 걱정」, 사설, 조선일보 2004.1.31.: “[…] 김수환 추기경은 29일 자신을 예방한 열린우리당 지도부에 ‘우리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추기경은 이어 ‘군에도 미국을 주적(主敵)처럼 생각하는 사병이 있을 정도로 반미 친북 세력이 커져가는 게 사실’이라고 걱정하면서 ‘(북한과의) 민족 공조를 강조한 나머지 어떤 것도 좋다는 식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말했다. 추기경의 지적들이 듣는 이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원로 종교인으로서의 통찰력이나 예지의 덕분만은 아닐 것이다. 평범하고 평이한 추기경 말씀이 지금 여기서 크게 울리는 것은 그보다는 오히려 그동안 마음속으로 삭이고만 있던 백성들의 걱정이 추기경의 근심을 통해 있는 그대로 표현됐기 때문이다. […] 군사독재 시절에나 백성의 속 탄 마음을 적셔주는 줄 알았던 추기경 말씀을 지금의 이 나라에서 다시 들으며 위안을 느끼게 될 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사설은 추기경의 근심이야말로 백성들의 걱정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설의 본심은 참여정부가 주도하는 개혁정책에 대한 수구세력의 불만과 가슴앓이를 마치 추기경의 것인 양 치환하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겨레 논설위원 손석춘씨가 문제의 조선일보의 사설에 대해 제 논에 물대기 식의 행태라며 이를 꼬집는 글을 오마이뉴스 칼럼에 올렸다. 그는 추기경의 인식이 현실을 호도하고 있다며 우려했고, 추기경의 엉뚱한 근심의 이면에는 여론조사의 사실을 왜곡하는 조선일보의 감정적 선동이 선행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원로가 드문 한국사회에서 노상 원로로서” 그리고 추기경이라는 권위로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큰 역할을 맡았던 추기경의 말이 안타깝게도 오늘에 이르러서는 민족의 내일을 위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는 “걸림돌”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일보의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보도를 꾸짖어야 할 추기경이 오히려 이를 확대재생산하는 현실이 더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추기경은 무지몽매한 백성이 근심스럽다지만 정작 백성은 현실을 곡해하는 추기경이 걱정스럽다는 비판이었다.

이후 조선일보를 비롯한 소위 독과점 언론들의 가히 융단폭격이라 할 대규모 공세가 일어났다. 오마이뉴스 칼럼에 대해 2월 2일자 조선일보는 <오마이뉴스, 김수환 추기경 비판 “민족의 내일에 심각한 걸림돌”>, 중앙일보는 <오마이뉴스, 金추기경 비난 파문>, 동아일보는 <김수환 추기경 발언, 민족의 내일에 심각한 걸림돌>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비난과 성토에 나섰다. 이들 신문의 제목과 기사를 보면 손씨가 ‘김 추기경을’ 민족의 내일에 심각한 걸림돌이라고 비난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해당 칼럼은 추기경의 특정 발언을 문제 삼았을 뿐 추기경의 인격에 대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말에 대한 지적을 개인에 대한 신상공격으로 몰고 가며 칼럼의 본의를 전혀 다른 내용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은 세 언론들이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사태를 왜곡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우선 이들 신문은 손씨가 칼럼에서 추기경의 반미친북세력 관련 ‘발언’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추기경’을 비판한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또 ‘좌파적 입장’에 있는 손씨가 우리사회의 ‘중도세력’을 대변하는 ‘추기경’이라는 도덕적 권위에 무례하게 도전 한 것인 양 사태를 몰아가고 있다(2004. 2. 3일자 민언련 성명서).

조선일보는 손석춘 논설위원이 좌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추기경의 도덕적 권위를 무너뜨리려고 총대를 멘 것이라는 음모론의 시각까지 더해서 보도하였다. 좌파 논객인 손씨가 추기경의 발언을 비판한 이유가 다름 아닌 좌파의 걸림돌이 된 추기경을 “더 이상 그대로 놔둘 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즉, 좌파)을 대표하여 ‘총대’를 맨 것”이라는 것이었다. 왜곡에 과장이 보태지자 사태는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한편 중앙일보는 사설과 기자칼럼을 통해 이 문제를 거론했다. 사설 <추기경까지 흔들자는 것인가>에서 “반미 친북 운동이 흔들리기 때문인가. 우리 사회에 그나마 존재하는 마지막 권위를 철저히 부숴야 한다는 좌파 모험주의적 발상에 따른 공세인가”라며 추기경을 흠집내는 이유를 따졌다. 이어 취재일기 <추기경까지…>에서 “손씨의 글이 문제가 된 것은 인신공격에 가까운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며 (자신의)특정 정치적 신념에 어긋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도덕성까지 깎아내리는 것으로 매도했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3일 <기자의 눈/金추기경 ‘이유 없는 수난’>에서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추기경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환담을 나눈 것’을 가지고 공연히 한 인터넷 매체가 비판하고 나서는 바람에 추기경이 수난을 당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면서 그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사실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친 것은 조선일보의 사설이었다는 점은 애써 모른 체 하였다.

2월 1일부터 6일까지 여러 매체들이 추기경을 둘러싼 조선일보와 중앙·동아 등 수구언론과 오마이뉴스의 공방을 소개하면서 논쟁은 일파만파 그야말로 사회적 문제가 되어버렸다. 이해가 다른 세력과 집단들이 각축과 대결을 벌이는 데 정작 발언의 당사자인 추기경과 교회는 별다른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침묵 혹은 방관은 다시 한 번 수구언론에 대한 지지로 보이기 일쑤였다.

2. 추기경의 오해와 수구언론의 곡해

추기경은 “우리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물었던 이유는 미국을 주적으로 삼는 국민인식이 개탄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우려의 원천은 국민들 자신이 아니라 한 리서치 결과에 대한 수구언론들의 왜곡이었다. 여론조사 기관인 리서치앤리서치는 그 당시 전국 성인 800명을 대상으로 “우리나라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 어디인가”하고 물었다. 응답자의 39%가 미국을 지목했고, 북한이라는 응답은 그보다 작은 33%에 그쳤다. 이런 결과는 그 즈음 미국 부시정권의 이라크 침략전쟁과 거듭된 평양 폭격 위협 발언 때문에 생겨난 반응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1월 13일자 사설에서 여론조사의 결과를 다루며 논리의 비약하며 국민의 감정을 이상한 방향으로 선동하였다. 사설의 제목에서 조선일보는 “미국이 한국의 主敵이란 말인가”하고 물었던 것이다.

「미국이 한국의 主敵이란 말인가」, 사설, 조선일보, 2004.1.13.: “우리나라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 어디인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북한(33%)보다 미국(39%)을 꼽은 국민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본보 12일자 29면) 특히 20대에서는 58%가 미국을 꼽은 반면 북한은 20%에 그쳤다. 이 조사 결과대로라면 이제 대한민국의 주적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으로 바뀌어야 할 판이다. […] 더구나 이런 인식의 대표적 인물들이 대부분 현 정권의 우군(友軍)이나 원로로 대접받고 있어 이런 여론의 혼미가 쉽게 정리될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우방과 적대세력을 제대로 가리고 그에 따른 국민의 안보의식을 바로잡지 않고는 언젠가 이 나라는 중대 갈림길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관계 여론조사의 취지와 설문 결과를 모두 곡해한 것이다. 여론조사의 결과에는 국민들의 현실인식을 반미 친북으로 몰고 갈 아무런 근거도 없었다. 조선일보와 같은 견강부회의 억지는 “나라의 전체 흐름이 반미 친북”이라고 1면 머리로 대서특필한 중앙일보도 마찬가지였다. 추기경의 소박한 우려는 다름 아닌 수구언론이 제공하는 왜곡된 해석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3. 수구언론의 종교지도자 활용

독과점 언론들이 추기경의 발언을 비판한 문제의 칼럼을 두고 좌파의 도발이라고 규정하고 추기경의 권위를 적극 엄호한 일은 존경과 성심의 발로라기보다는 이용과 활용의 측면이 강하다. 민주언론시민운동연합은 이런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언론의 여론 몰이에 ‘존경받는 원로’가 ‘활용되고’ 있는 현실에 우리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더 우려되는 것은 ‘존경하는 원로’조차 조선일보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언론의 왜곡보도로 정작 손씨가 두 번의 칼럼에서 주요하게 지적한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언론의 왜곡보도와 안타까운 ‘지도층 인사들’의 ‘왜곡된 현실인식’ 문제는 실종되고 말았다.”

오마이뉴스의 칼럼이 추기경을 존경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다음 두 가지를 지적한 것은 오히려 고마운 일이다. 첫째 추기경이 근거로 든 리서치 조사 내용 역시 조선일보의 사설 <미국이 한국의 주적이란 말인가>를 통해 왜곡된 것임을 지적한 점. 둘째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수구 언론이 사실을 왜곡하는 자신들의 논조를 확대 재생산하기 위하여 추기경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를 과대 포장하는 악을 저질렀다는 점이다. 도둑이 제발 저리다는 식으로 이런 속내를 들키자 조선·중앙·동아는 손씨의 날카로운 비판을 무례한 좌파의 도발로 부각시키며 여론을 엉뚱한 곳으로 몰아간 것이었다. 핵심을 뭉개서 감추고 엉뚱하게 비트는 기교, 이것이 추기경과 언론 해프닝의 실체였다.

이 사태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 신문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서슴지 않고 진상을 왜곡하고 심지어 추기경과 같은 국민적 종교지도자 마저 제 멋대로 좌지우지하는 무서운 현실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이를 방관하는 교회의 무능과 성찰의 게으름이 어떤 불행을 가져오는지 알려주었다. 교회는 애당초 사물에 대한 인식과 판단능력이 쇠약해진 노령의 추기경이 첨예한 사회 갈등으로부터 거리를 두도록 배려해 드려야 마땅했다. 그런데 정치인들과 선정적인 언론들의 간계에 반복적으로 이용당하는 상황을 수수방관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 결과 한국천주교회는 최고성직자의 어이없는 추락과 함께 교회 전체가 수구화로 기우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런 현상은 국가보안법 개폐논란, 사학법 개정 등 주요 시국 사안이 첨예한 갈등을 일으킬 때마다 심해져갔다. 언론에 나타난 교회는 시나브로 수구세력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기득권 집단에 가까워졌고, 교회와 교회 지도자는 국민적 권위로부터 멀어졌다.

4. 희한한 침묵과 의외의 발언

4-1. 수구언론의 주문과 성직자들의 납품 시스템

참여정부의 등장에 힘입어 오랜 동안 미뤄두었던 국가보안법, 언론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정리법등 네 가지 개혁입법이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자 현상유지를 원하는 세력들은 극도의 불쾌감을 드러냈다. 조선일보는 4대 개혁입법에 대하여 규정하기를 한국사회의 기둥뿌리를 뽑은 다음 “지금까지의 우리 사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점령군”으로 “텅 빈 황야”가 되어버린 대한민국으로 진주하려는 의도라고 했다.(류근일,「전함 12척은 남아있다」, 조선일보, 2004.11.2) 그러고는 “아직 남아 있는 전함 12척”으로 싸울 결사항전의 태세를 선동하면서 이 싸움을 “내가 죽느냐 네가 죽느냐의 한 치 틈새도 없는 일대 결전” “21세기의 낙동강전투”로 명명하였다. 그런데 “널뛰는 (개혁)세력을 저지할 ‘낙동강 교두보’를 어떻게 확보”하는 절박한 소망을 위해 천주교회의 이름을 거명하였다.

“과연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충무공의 ‘아직 남아 있는 전함 12척’ 같은 사람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 절박한 소망을 애국 기독교계 […]에 한번 걸어보려 한다. 천주교와 개신교 지도층은 이미 북한 인권문제와 사립학교법 개악을 앞두고 ‘나라를 위한 기도회’ 등 중대결단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 이래 기독교를 함부로 건드린 세력은 거의 예외 없이 패배했다. 기독교는 순교의 신앙이며 부활의 신앙이기에, 한국의 애국 기독교 세력을 섣불리 건드린 ‘선무당 변혁가’들은 스스로 자해(自害)의 뇌관에 불을 댕긴 꼴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조선일보 위 칼럼)

4대 개혁입법을 저지하는 일이야말로 순교신앙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수구 신문의 훈계를 들을 만큼 교회의 위상은 초라해진 것이다.

한편 개혁입법의 무산을 노리는 수구언론들이 자신의 주장과 논조를 강화하고 확대재생산하기 위하여 신부들의 강연과 담화를 끌어다 쓰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이 점에서 정의채 신부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 가톨릭계의 원로 정의채 신부는 명동성당 강연에서 ‘민생이 최악인 상태에서 강행되는 4대 입법의 무리수는 지난날 독재정권과 다를 바 없고, 현재 이 사회는 이승만 독재 말기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가 나오던 시절을 연상케 한다’고 말했다. 정 신부는 ‘현 정권은 천하의 개혁은 다 자기들이 하는 것처럼 요란한데, 빈 달구지의 소리가 더 요란하다는 속담이 있다’면서 ‘최고 지성들 중에서는 그런 개혁을 ‘개혁으로 포장된 폭력’으로 표현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 386 정권과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는 무지·무경험·무능의 정치권력 지향적 386세대의 한풀이의 장이나 이상의 실천장이 아니다’라는 정 신부의 충고에 귀를 열어야 한다.[…]”(「“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옛 구호가 떠오르는 세상」, 사설, 조선일보, 2004.11.11)

이처럼 수구 언론이 자기에게 필요한 발언을 고령의 성직자에게 주문하여 납품하는 식의 사례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언급하기 곤란할 정도다. 결국 사제들의 발언은 한낱 수구언론의 주문자 생산방식으로 이뤄진 싸구려 제품이 되고 말았다.

4-2. 교회의 이상한 침묵

사립학교법 사태가 벌어졌을 때 주교회의는 이례적인 신속한 대응으로 반대와 저항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황우석의 배아줄기 세포가 문제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2004년 12월 국가보안법 개폐 논란이 벌어져 자그마치 일천여명의 활동가들이 목숨을 건 단식농성에 들어갈 정도로 사안이 심각하던 시기에 전국 각 교구의 정의평화위원장 신부들이 국보법 폐지에 관한 주교회의의 입장을 요구하였을 때 주교회의는 사회적 갈등에 휘말리는 일을 부담스럽게 여겨 끝내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교회는 의외의 발언으로 뜻있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면서 동시에 이상한 침묵으로 더 큰 실망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교회의 침묵은 그 자체로 수구 언론의 논조에 동의하는 결과가 되기 일쑤였다.

5. 말에 포박당한 말씀

한국천주교회는 87년의 민주항쟁이래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시기까지 어렵게 견지하던 예언자의 모습을 버리고 1997년 민주세력에 의한 정권교체 이후 급격히 수구진영에 함몰되는 양상을 보였다. 간혹 교회의 본의가 수구 언론에 의하여 왜곡되기도 하였으나 근본적으로는 교회지도자들의 지나치게 순진한 현실인식과 가부장적 분위기 교회 전통에 따라 지도자들의 이런 편향을 시정하지 못하고 방관한 결과라 하겠다.

한편 2007년 춘계회의의 결정에 따른 국내 유일의 사목전문지 <월간 사목>의 폐간도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무기력하고 침체에 빠져있던 사목현장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마련한 교회 쇄신과 현대화의 생기를 불어넣겠다는 취지와 창간 당시의 감격을 생각하면 주교단의 이런 결정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특히 최근 일 년 반 동안 사목의 변신이 불어 일으킨 놀라운 반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저 “주교님들께서 2007년 춘계 정기 총회를 통해 <사목>을 또 다른 정기간행물인 경향잡지와 합하라는 결정을 내려주셨습니다.”는 편집인의 송구스럽다는 인사가 폐간의 이유였다. 이런 저런 소문들이 난무하였으나 정확한 속내를 확인할 길이 없고 다만 일부 칼럼의 논조와 편집 기획진의 성향을 문제 삼았다면 더 없이 안타까운 일이다.

밖으로는 교회의 말씀이 세상의 말들에게 휘둘리는 폭행을 겪고, 안으로는 자생으로 피어나는 말씀을 싹들을 분지르는 우를 범하는 현실이 지난 민주화 20년 교회와 언론의 관계를 되돌아 본 소감이다.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기획위원회 200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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