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에게 올해 한국에서 나온 책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책을 고르라고 하면 <88만원 세대>라고 주저 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의 확산이 세대를 어떻게 계급으로 만들어버렸는지, 그 속에서 우리 청년세대들이 어떤 절망과 공포를 경험하며 온 국민이 위장병에 걸려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이렇게 명쾌한 언어로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대학에서 하는 수업뿐만 아니라 만나는 청소년, 청년들마다 이 책을 일독하기를 권하니 가히 ‘88만원 세대’ 전도사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청년세대들의 마음은 나와 같지 않은 모양이다. 대학의 수업에서 이 책을 읽고 쪽글을 써서 내라고 했는데 아이들의 반응이 당황스럽다. 가뜩이나 암울한데 왜 이런 책까지 읽으라고 하냐고 화를 내는 학생들도 있었다. 세상은 당신들이 망쳐놓고 수리는 왜 우리보고 하라는 것이냐면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이렇다는 설명이 아니라 대안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 수업에서는 ‘대학생 때야말로 가장 시간이 많아 실험하기 좋은 나이’라는 강사의 말에 ‘우리야말로 가장 바쁘고 고단한 나이’라고 되받아친다.

왜 아니겠는가? 친척 중에 지방대를 나온 한 아이는 만성위염에 시달리고 있다. 취직을 한다고 이것저것 해보았지만 지방대의 비인기학과를 나온 그에게 돌아갈 일자리는 없다. 서울로 올라와서 취직준비를 하는 통에 여자친구와도 헤어졌다. 지방대에서 하는 연애는 ‘시한부 연애’란다. 1-2학년때는 모두가 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편입시험을 준비하기 때문에 한쪽이 합격과 동시에 신분이 상승되어 연애는 깨진단다. 편입에 실패한 고학년들은 취업이 된다면 남극으로도 가야하기 때문에 연애가 시한부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 대해 주눅이 들대로 든 이 친구는 지금 토익 시험을 준비중이다. 토익시험을 왜 보냐고 물었더니 취직준비라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자기도 뭔가 하나쯤 잘했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란다. 대학입시에서부터 자신의 인생은 늘 패배자의 인생이었기에 이 상태로는 무엇을 하더라도 자신감이 없다고 한다. 이 동생과 함께 서울로 와서 취직 준비를 하던 같은 학교의 친구는 부모님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취직 준비를 한다고 호스트바에서 뛰고 있다고 한다. 잘 생기고 신체도 건장해서 호스트바에서 인기가 많다며 그럴 수 있지 않냐고 말하는 모습에 더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것은 말려보지 그랬냐고 말했더니 ‘그럼 어떻게 해요. 먹고 살아야죠.’라고 반문한다. 사실 호스트바에서 일한다는 친구는 속칭 ‘날라리’하고는 담을 쌓은 친구이다. 마음 착하고 순해서 오히려 모범생에 가까운 아이이다. 결국 이 아이는 돈을 벌어서 공부를 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석 달 만에 호스트바와 공부 모두 그만두고 다시 시골로 내려갔다. 호스트바에서 일하려고 서울 올라온 것은 아니라고.

올해 초에 했던 연구에서 인터뷰를 했던 한 십대 후반 여성의 말이 생각난다. 일찌감치 학교를 때려치우고 ‘조건만남’이라는 원조교제 비슷한 성매매를 하고 있는 아이이다. 도무지 학교에 있어도 삶에 대한 비전이 없었던 그녀는 언니들의 권유에 조건만남을 시작하였다. 돈도 꽤 번다고 한다.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것들이 못생긴 것들’이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못하면 못생긴 것들은 어디 가서 제대로 밥벌이도 할 수 없다고 말이다. 발이 퉁퉁 부르트도록 24시간 편의점이나 주유소에서 알바를 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냐고 그나마 자기는 예뻐서 다행이라고 했다.

성노동을 비하하거나 그것을 노동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젊은 아이들이 먹고 살길이 없어서 노동을 파는 것과 몸을 파는 것의 경계를 넘나들게 만드는 이 사회가 경악스럽다. 무슨 도깨비 방망이처럼 일자리 백만개, 오백만개를 외치고 있는 저 대선주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BBK인지 BBQ인지에 가려버린 이 정말 중요한 일자리 문제는 언제쯤 치열하고 진지하게 대선 주자들간의 토론의 대상이 되어 이 아이들의 삶을 방어할 것인지.



* 엄기호: 하자센터 글로벌학교 팀장
* 이글은 <시사인>에 게재된 글입니다. 

엄기호 2007-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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