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학교 동요집 꿈꾸던 신심 깊은 음악가
평신도 음악가로서의 활동상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워

▲ 10월 11일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백병근 연구원이 윤용하 선생의 삶과 신앙에 관해 강의하고 있다. ⓒ강한 기자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 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 가곡 ‘보리밭’ 듣기)

윤용하(尹龍河, 요셉, 1922~1965) 선생이 작곡한 ‘보리밭’의 노랫말이다. <경향잡지> 1972년 8월호에 실린 윤용하 일대기에서는 “요즈음 한창 애창되고 있는 가곡”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보리밭’은 윤용하 선생이 선종한지 6년이 지난 1971년에야 대중가요로 인기를 얻었다.

1980년대에 태어난 기자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가곡을 ‘인물로 보는 한국 교회사’ 강의에 참석한 나이 지긋한 신자는 반가운 듯 따라 부르고 있었다. 자연히 ‘세대차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만큼 윤용하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진 이름인지도 모른다.

2005년 10월, 윤용하 선생 40주기를 맞아 윤용하 기념사업회가 호암아트홀과 함께 기념 연주회를 열었다는 기사를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었다. 20주기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윤용하의 작품 연주회였다. 그로부터 7년이 흐른 지금, 윤용하 기념사업회장을 맡았던 성악가 오현명(1924~2009) 선생은 세상을 떠났고, 기념사업회 홈페이지는 접속도 되지 않는 상태다.

지난 10월 11일 서울 저동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열린 ‘인물로 보는 한국 교회사’ 공개대학에 강사로 나선 백병근 연구원(한국교회사연구소)은 ‘가톨릭 신자’로서의 윤용하가 가톨릭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활동을 펼쳤는가 살펴보고자 했다.

신동이라 칭찬 자자했던 윤용하.. ‘음악 신부’ 되는데 성공했다면?

윤용하는 1922년 3월 16일 황해도 은율군에서 윤상근(尹相根, 가롤로)과 이 마리아 사이에서 9남매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났고, 은율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요셉’이라는 세례명은 외할아버지가 지어줬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윤용하에게 예수의 아버지 요셉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윤용하가 ‘보리밭’의 작사가 박화목에게 원래 자신의 꿈이 수사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백병근 연구원은 1914년부터 1920년대 초까지 은율본당 주임신부였던 윤예원 신부가 상해임시정부를 위한 군 자금을 모금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대해 적극적이었다며, 이러한 민족주의 성향이 윤용하의 집안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했다.

윤용하는 세 살 되던 해에 외할머니 등에 업혀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면으로 이사 갔고, 이곳 비현본당에서 처음으로 오르간을 구경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해 대축일에 성가를 독창으로 불렀고, 연극에도 출연해 본당 신부와 주일학교 교사들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보통학교 5학년 때, 옹기장이 아버지를 따라 만주 봉천(奉天)으로 이주해 보통학교 과정을 마쳤다. ‘보통학교 졸업’이 윤용하의 최종 학력이다. 그 후 만주에서는 주로 외국인들이 모이던 가톨릭교회에서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음악에 더욱 심취했고, 당시 심양 관현악단의 일본인 지휘자 가네코(金子)로부터 틈틈이 작곡과 화성학을 배웠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음악 공부는 거의 독학하다시피 했다.

17세 때는 윤용하의 신앙과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프랑스인 신부가 그를 ‘음악 신부’로 키우고자 프랑스에 유학 보내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윤용하 자신도 신부가 되어 교회 음악에 공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부모가 ‘장남’이라는 이유로 반대했고 결국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백병근 연구원은 윤용하가 17세였던 1930년대 후반에 유학을 떠나 음악을 공부했다면, 1949~1955년에 로마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이문근 신부보다 활동이 앞섰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내놓았다. 만약 그랬다면 한국 가톨릭 음악계는 더 활발했을지도 모르지만, ‘보리밭’이라는 곡은 만들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와 함께.

비록 음악을 전공한 사제가 되려는 꿈은 포기해야 했지만, 천부적 재능을 지닌 윤용하는 19세에 만주 작곡가 협회 회원, 봉천 조선인 합창단 단장, 신경(新京) 가톨릭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며 신동이라고 칭송 받았다. 스무 살 때는 첫 작품 칸타타(교성곡) ‘조선의 사계’를 직접 지휘해 봉천 조선 합창단과 봉천 방송 관현악단의 협연으로 공연했다. 1년 뒤에는 신경에서 ‘백조합창단’을 조직해 자작곡 합창 발표회를 두세 번 열었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는 징병 당해 끌려가던 도중 탈출해 간도로 피신했고, 간도사범학교에서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만주 용정으로 옮겨가 용정사범학교에서 음악 강사 자리를 얻었고 결혼도 했다. 다시 함흥으로 이주해 영생여자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공산정권의 ‘예술 어용화 정책’에 염증을 느껴 1946년 아내와 함께 월남했다.

▲ 윤용하 선생의 일대기가 실린 '경향잡지' 1972년 8월호

음악적 재능은 있지만 보통학교만 나와 이렇다 할 ‘간판’이 없는 윤용하가 성공하기는 어려웠다. 1965년, 4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칸 셋방살이를 전전했고, 피아노는커녕 낡은 오르간 하나 마련하지 못했다.

그래도 월남 후 서울 생활은 윤용하의 전성기였다. 교향곡 ‘투쟁과 승리’, ‘농촌 풍경’, 칸타타 ‘조국의 영광’을 작곡하고 공연했으며, 1960년에는 자작 동요 100곡 발표회가 열렸다. 한국전쟁 중에는 종군음악가로서 군가와 ‘사병의 꿈’ 등을 작곡했다. <국방일보> 2012년 8월 17일자에 실린 이현표 씨의 글에 따르면 윤용하는 부산에서 대한 어린이 합창단을 만들어 전시동요 작곡발표회를 열고, 동요집 ‘소년 기마대’를 출판했다. 인터넷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국기게양대 옆에서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로 지휘하고 있는 윤용하의 모습은 사진가 임응식의 작품이다.

윤용하는 병자성사 사흘만인 1965년 7월 23일 밤 서울 필동의 단칸 셋방에서 선종했다. 술 때문에 얻은 간경화증이었다. 7월 26일 명동대성당에서 영결 미사를 봉헌했고, 유해는 금곡리 천주교 묘지에 안장됐다. 유족으로 부인과 자녀 윤은희 · 윤은철 씨가 있었다.

생전의 윤용하가 그토록 바랐던 작곡집은 1972년 4월 19일에 출판됐다. 2005년 ‘광복 60주년’을 계기로 윤용하가 작곡한 ‘광복절 노래’가 다시 주목받았고, 문화훈장이 추서됐다. 2009년 부산 자갈치시장에는 ‘보리밭’ 노래비가 세워졌고, 이를 앞둔 2009년 5월 22일 <부산일보>에는 “아버지의 가곡이 탄생한 부산에 노래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그래서 늘 기도했는데 드디어 응답이 온 것 같다”고 기뻐하는 딸 윤은희 씨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 ‘광복절 노래’ 듣기)

피난지 부산에서 ‘보리밭’ 작곡한 사연

백병근 연구원은 월남 직후 윤용하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찾아간 곳이 방송국이었다고 전했다. 해방 직후 한국어로 된 노래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당국이 벌인 정책 중 하나가 ‘새 가곡 보급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주로 시인들이 쓴 노랫말에 작곡가들이 곡을 붙여 새 가곡을 만드는 방식으로 이뤄졌고, 이를 통해 작곡가들도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 박화목, '윤용하 일대기', 범우사, 2005.
이렇게 방송국을 찾아가면서 윤용하는 ‘보리밭’의 작사자 박화목 시인(1924~2005)을 만났다. 1947년 여름이었다. 박화목도 은율 출신으로 윤용하와 고향이 같았고, 나이도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보리밭’은 청·장년기 윤용하의 가난한 삶 한복판인 피난지 부산에서 만들어졌다. 그가 ‘보리밭’을 작곡한 1951년은 창작곡을 잘 만들지 못하고 대한 어린이 합창단 활동도 흐지부지되는 등 특히 힘든 시절이었다. 박화목은 함께 갔던 다방에서 사라진 윤용하가 송도 바닷가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노래를 만들어야겠다’면서 글을 부탁했다고 전한다. 이삼일 뒤에 박화목이 ‘보리밭’의 가사를 써서 윤용하에게 줬는데, 원래 제목은 ‘옛 생각’이었다. 얼마 뒤 술자리에 나타난 윤용하가 ‘보리밭’으로 제목이 바뀐 곡의 악보를 내밀었다. 그 자리에서 몇 번씩 불러봤는데, 다른 이들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지만 박화목 자신은 그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보리밭’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윤용하가 세상을 떠나고 6년이 지난 1971년에야 가수 문정선이 불러 대중가요로 ‘히트’를 쳤다. 이듬해 서울에서 공연한 이탈리아 가수 밀바(Milva)가 한국어로 ‘보리밭’을 부른 일도 있었다. (* 밀바가 1972년 내한공연에서 부른 ‘보리밭’ 듣기)

동요 작곡가이기도 했던 윤용하, 가톨릭 주일학교용 동요집 출판이 꿈이었다
가톨릭 어린이 정서 함양 위해 정기 음악회 열자고 제안하기도

윤용하를 알았던 사람들이 그를 회고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신앙’과 ‘작곡’, 그리고 ‘술’이라고 한다. 경향잡지 1972년 8월호에 실린 ‘윤용하 일대기’도 그가 “아귀다툼의 생존경쟁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회의를 느끼면서 자연히 술을 찾게 된” 것으로 전한다. 윤용하가 막걸리를 마시지 않는 날이 이상한 날로 꼽힐 정도였고, 안주 없이 술을 마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윤용하는 술을 퍼마신 게 아니라 인생을 퍼마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윤용하는 신앙생활을 성실히 이어갔다. 사순 시기 40일 동안은 술을 끊었다고 증언도 있다. 한국전쟁 중에는 가톨릭 음악가 협회 부회장을 지냈고, 서울로 돌아온 뒤에는 서울 신당동본당과 인천 답동본당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했다.

어린이들이 부를 수 있는 동요를 만드는 일에 애착을 가졌던 윤용하는 주일학교에 나오는 어린이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보급하고자 했다. 윤용하는 당시 주일학교에서 부르는 ‘성인용’ 성가는 어린이가 따라 부르기 어렵고 성장기 어린이의 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다며, 어린이를 위한 성가책을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1963년 4월 <가톨릭청년>에 기고한 글 ‘주일학교 성가소고(主日學校 聖歌小考)’에 잘 나타나 있다.

1. 어린이 성가 편찬위원회를 조직하되 여기에는 성직자, 시인, 작곡가, 가톨릭 음악 지도자들로 구성해야 된다. 만일 한두 사람이 책임을 지게 된다손치더라도 이러한 모임을 거쳐야만 내용이 충실한 성가책이 엮여져 나오게 될 것이다.
2. 내용에 있어서는 현재의 성인 성가책을 중심으로 하되 가사를 어린이들이 해독하기 쉽게 수정해야 될 것으로 생각되며, 때에 따라서는 성가를 시인과 작곡가에게 위촉해서 새로운 곡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
5. 우리 가톨릭 어린이들의 정서를 함양하기 위해서 일년에 한두 번씩 정기적으로 음악회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회를 줌으로써 어린이들은 점점 성당과 더 가까워질 것이며 또한 주성모님을 더욱 공경하게 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음악회에는 꼭 성가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유명한 곡목을 택해서 음악적인 시야를 넓혀 주도록 해야 될 것이며, 이러한 기회에 음악에 국한할 것 없이 무용 연극 등도 같이 할 수 있도록 하면 더욱 좋으리라고 본다.
(尹龍河, ‘主日學校 聖歌小考’, <가톨릭청년>, 1963년 4월)
 

자신의 작곡집을 출판하는 것과 함께 ‘가톨릭 주일학교용 동요집’ 출판, 대한 어린이 합창단 재건이 윤용하가 평생 꿈꿨던 세 가지 소원이었다. 한편, 1964년 1월 <가톨릭청년>에 기고한 글에서는 청소년 신자들이 성가보다는 “저속한” 유행가에 더 친숙하다며 걱정스러운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 가톨릭 청소년들이 다른 일반 청소년과 다름없이 유행가라면 덮어놓고 모조리 부른다면 무엇 때문에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 물론 교회의 사정에 따라서 청소년들을 위한 건전한 오락 시설도 없으려니와 성가를 부르고 싶어도 성가 연습실 지도자의 결원 등으로 여의치 못한 교회도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적어도 가톨릭의 청소년이라면 주일날 성가책 한 권쯤은 들고 미사에 참례해야 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반해서 도리어 어린이와 노인들이 가지고 와서 성가대들이 부르는 것을 쫓아서 부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현실은 기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톨릭 청소년은 깨끗하고 곱고 아름답고 거룩한 노래를 부름으로써 정신을 가다듬고 하루의 생활을 남보다 더 훌륭한 생활을 보내도록 해야만 의의가 있을 것이다.” (尹龍河, ‘가톨릭 청소년과 음악’, <가톨릭청년>, 1964년 1월)

‘음악 신부’들 활동에 비해 윤용하 등 평신도 음악가 활동상 자료 찾기 어려워

백병근 연구원은 “윤용하가 가톨릭 신자로서 만든 노래가 어떤 음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가 어떤 노래를 얼마만큼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게 현재 상황”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번 강의에서도 <경향잡지> 1972년 8월호에 실린 동요 ‘가톨릭 소년의 노래’와 ‘성당 종’의 노랫말을 소개하는 정도로 그쳐야 했다. 아동문학가 이석현(세바스티아노) 씨의 작품을 노래로 만든 것들이다.

가톨릭 소년의 노래

떠오른 아침 해는 예수님 마음
그 햇빛 그 사랑을 담뿍 받아서
하늘처럼 푸르고 높이 자라는
천주님의 착한 아기 가톨릭 소년
늘 함께 돌보시는 성모님 은혜
호수천신 손목 잡고 참다이 살자

성당 종

성당 종 칩니다 뗑뗑뗑
성당 종 칩니다 뗑뗑뗑
어서 모여라 마을 아이들
신부님의 검은 수염 손을 펴들고

이문근 신부나 최명화 신부 등 ‘음악 신부’들의 업적에 대해서는 교회언론을 중심으로 많은 자료를 확인할 수 있지만, 윤용하 등 평신도 음악가의 활동상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백병근 연구원은 “교회가 윤용하 선생 같은 분들이 어떤 음악을 남겼고 어떻게 활동했는지 발굴해야 한다”면서 “가톨릭 신자로서 어떤 활동을 했고, 신앙심은 어떠했으며, 우리가 무엇을 본받아야 하는가 잘 알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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