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1일(연중 제29주일) 마르 10,35-45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이 원하는 바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줍니다. 제자 두 사람이 그들의 소원을 예수님에게 말씀드립니다. 복음서는 그 제자들이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청한 것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곧 메시아로 이 세상에 나타나서 통치하실 때, 한 사람은 예수님의 오른 편에, 또 다른 한 사람은 왼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영광스런 메시아의 나라에서 두 형제가 모두 높은 자리에 앉아 세도(勢道)를 부리게 해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마실 잔을 제자들도 마시고, 당신이 받을 세례를 제자들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당신의 잔을 마신다, 혹은 당신의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말씀입니다.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 청한 것은 예수님이 왕으로 군림하고, 자기들은 예수님 덕으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사람들을 다스리는 특권을 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염원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입신출세 하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하시는 일은 종과 같이 사람들을 섬기는 데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더 설명하십니다. 첫째가 되는 길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 섬김을 실천하는 것이며, 예수님 자신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면서 유언으로 성찬을 남기셨습니다. 그 성찬의 중심을 이루는 말씀은 “너희를 위해 내어주는 몸”, “너희를 위해 쏟는 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사람들을 섬긴 삶이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하느님을 믿어서 그분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나 한 사람 혹은 내 가족이 잘되도록 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옛날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소원성취를 빌던 그 마음을 연장하여 그리스도 신앙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제자가 예수님에게 청한 것도 그런 맥락 안에서 된 일입니다.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 신앙이라면, 하느님은 우리의 민원(民願)을 해결해 주는 해결사(解決士)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비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어서 하는 처세(處世)법입니다. 거기에는 얄팍한 이해타산(利害打算)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아부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사오니,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시지 말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그 분을 기분 좋게 해드려 자기의 소원을 이루려는 수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순간에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내어주고, 피를 쏟아서 죽기까지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셨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을 대단히 소중히 생각하며 삽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현명하게 사는 길입니다. 내가 입신양명해야 하고, 내가 부귀영화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목적에 손상을 주는 일은 피하고, 우리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 하며 삽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하는 것도 대부분 어떤 보상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기초로 교회 안에 봉사직무(奉仕職務)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봉사직무는 교계제도(敎階制度)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교계제도라는 신분계급으로 포장된 것은 교회가 로마제국과 중세 봉건사회를 거치면서 그 사회에서 얻어온 포장입니다. 로마제국과 봉건 사회는 철저한 신분 사회였습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들보다 더 큰 실효성과 더 큰 영향력을 지녔습니다. 신분 따라 그 사회를 위해 하는 기여가 다른 시대였습니다. 교회는 그런 사회에서 섬김을 위한 봉사직무들을 조직하면서, 그 시대 사회가 당연시하던 신분서열을 포함시킨 교계제도라는 것으로 봉사직무를 조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신분 서열이 없습니다. 인간의 실효성도 신분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오늘과 같이 평등한 사회에서는 인간 각자가 하는 실천의 실효성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신분을 묻지 않고, 사람의 실천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그런 현대 세계에서 신분 서열과 동일시된 교회의 봉사직무는 섬김을 은폐합니다. 서품(敍品)이라는 말과 더불어 인간 품위(品位)의 차이가 있는 듯, 사람들을 착각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 군림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신분서열로 군림하겠다는 착각을 합니다. 오늘의 사회에서 신분을 강조하는 인간집단의 실효성은 저하됩니다. 오늘은 인간의 효율성이 신분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사람을 존중하고 겸손하게 남의 말을 듣고 솔직히 토의하는 사람이 실효성을 지닙니다. 로마제국도 사라지고, 중세봉건사회도 없어졌습니다. 섬김을 위한 봉사직무라면, 섬김이 돋보이게 교회 직무는 재편(再編)되어야 합니다. 섬김이라는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베풂과 섬김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도 우연한 것이 아니라, 섬김이 있어 피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 많은 베풂과 섬김의 손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 안에 하느님의 일하심을 보고 자기도 그 섬김에 합류하는 사람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