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순정이 이런 것이라면, 그만 보고 싶다. 눈앞에 벌어진 일을 현실로 여기지 않고, 이미 지나간 일을 과거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만을 곱씹으며 사는 게 ‘순정’이라면 이미 그 감정은 재앙이다.

한 사람만 그런 식이라면 그나마 캐릭터로 여기겠는데, 나오는 이들은 하나같이 오래된 감정만을 붙들고 있다. 그래야 사랑이고 순정이고 의리라고 믿는 사람들 같다. 어떤 한 순간 한 장소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붙박이 인생들이다. 그게 2012년의 ‘착한’ 사람이 되는 길인 것인가?

 
송중기 주연의 KBS 수목극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 얘기다. 시청자는 강마루라는 저 남자의 착함에 대한 동의조차 못 하겠는데, 제목은 심지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하디착한 사람이라는 상찬까지 바치고 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상황설명조차 없는 살인사건의 살인죄를 대신 덮어 써야 ‘사랑’이고 ‘착한’ 것인가? 멜로니까 닥치고 보라고?

죽은 그 남자는 극 속에서 마네킹만도 못한 소품이 돼버렸다. 강마루가 사랑하는 한재희(박시연 분)의 출세와 성공에 방해가 될 잠재 요소로만 등장했고, 마루의 사랑을 입증하는 시험대로만 쓰였다. 두 남녀는 왜 모텔방에 단둘이 있었으며 왜 죽어야 했는지 이유조차 모르기는 마루나 시청자나 마찬가지다. 5년 복역도 접지 못한 미련에도 ‘왜’가 빠져 있다. 마루는 재희에게 질문조차 못한다. “저 남자랑 누나랑 무슨 사이예요? 왜 여기 있어요?”

그걸 물으면 ‘감정’이 깨진다는 게 제작의도 같다.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깨지는 정도의 ‘감정’이 운명적 사랑의 조건이라니 기가 막힌다. 이러니 강마루와 한재희가 “13년 동안 시궁창의 등불”말고는 무슨 사이인지도 애매하다. 남자가 착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그래서 강마루가 누명도 아닌 심지어 ‘연극’처럼 대신 짊어진 전과의 멍에가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이해불가인데 무슨 사랑이며 진정성이 있을까 싶다. 선함이야말로 현실인식과 의지의 결과라는 상식을 말하기도 민망하다.

백 번 양보해 제작진의 주장처럼 “사랑하니까” 대신 죄를 뒤집어쓸 수 있다고 치자. 이유와 자초지종을 알아야 범인 행세라도 그럴 듯하게 할 게 아닌가. 길거리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도 아니고, 몹시 사적이고 은밀한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과연 마루는 어떻게 형사들과 수사기관을 속였을까? 죽은 남자와 동성 커플이라는 거짓말이라도 둘러댔을까? 그래서 5년 복역 후 ‘제비’가 되어 뭇 여성을 쥐락펴락 농락하며 살게 된 걸까? 애초에 사건의 주춧돌이 무엇 하나 제대로 놓이지 않은 채 시청자에게 비련의 사랑만 강요한 꼴이다. 이런 전개가 드라마 내내 이어진다.

등장인물들은 왜 또 하나같이 입이 걸어서 ‘자식’ ‘새끼’ ‘병신’ 이런 단어들을 달고 사는지도 이해불가다. 심지어 남녀노소가 쓰는 욕설도 어쩐지 비슷비슷하게 닮았다. 비속어 사용에 있어서는 생활 공동체처럼 보인다. 험한 말들로 밖에는 자신의 사랑과 진심과 분노를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그들은 미숙하고 유치한 사람들로 보인다. 요즘 학교 폭력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배타적 집단’을 방불케 한다. 제목도 원래 <차칸 남자>로 시작했다가 논란 끝에 최근 <착한 남자>로 한글 맞춤법 표기를 수용한 바 있다.

하나같이 선악 구별이 모호하고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지 못하는 점도 닮아 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살인죄를 대리한 강마루와, 자기네보다 더 큰 재벌가 아들인 옛 애인을 위해 마약소지죄를 대리한 서은기(문채원 분)는 한창 새로운 로맨스에 빠져 있다. 둘은 ‘착한’ 것인가? 해묵은 집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 ‘교통사고로 인한 기억상실’과 ‘은둔생활’이 필히 동반된 덕택이다. 그래도 안 되면 불치병과 요절까지 등장할 태세다.

빈민가에서 자란 ‘개천의 용’들이 이 사회의 주류가 되어 맨 꼭대기에서 만나는 방식, 만나고 보니 상대방은 재벌가의 남녀와 얽혀있더라는 공식, 원하는 대로 다 이루는 천재 남자 주인공, 거짓말과 음모의 생활화, 재벌회장과 재벌의 딸이 ‘알고 보면 불쌍한’ 연민의 대상인 설정, 모두 익히 봐온 멜로드라마의 뻔한 구도다. 무엇 하나 ‘착한’ 구석은 없다. 심한 극단적 설정과 뮤직비디오 같은 배우들의 아름다운 얼굴이 두드러질 뿐이다.

제목에서 ‘나쁜’ 남자임을 강조한 작품일수록 ‘의외의’ 착한모습이나 숨겨진 진정한 사랑 따위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인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위악(僞惡)’의 캐릭터라고나 할까. 거짓으로 악한 체 가장하는 모습 너머의 진심을 알아달라는 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목부터 ‘착한 남자’라고 한다. 불안하다. 제목의 반전을 염두에 둔다면, 보여줄 것이라곤 ‘위선(僞善)’ 뿐인가. 착한 얼굴의 대명사였던 송중기와 문채원이 ‘악역’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이미 제목의 할 일은 끝났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땅에서 선의(善意)는 얼마나 더 비웃음과 모욕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남은 방영분을 보기가 겁난다.

 
 
김원 (로사, 문화평론가)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