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4일(연중 제28주일) 마르 10,17-30.

복음서는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기억하는 것과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믿고 실천하던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 그분에 대해 회상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들입니다. 따라서 복음서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초기 신앙인들의 기억과 믿음과 실천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새로운 것들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서를 읽는 것은 그 안에서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고, 실천한 바를 알아듣고, 우리도 우리의 문화적 여건에서 올바로 믿고 실천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문화적 여건은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의 것과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과 실천의 모습도 달라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듯이”(마르 2,22), 시대가 다르면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모습도 달라야 합니다. 신앙과 관련된 것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고집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 청년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를 먼저 소개합니다. 예수님에게 접근한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 청년은 유대인으로서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켜왔다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 시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면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장래가 촉망되던 바리사이파 율사였습니다. 그가 그리스도 신앙으로 전향한 후,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고귀한 인식 때문에...나는 모든 것을 잃었으며 쓰레기로 여겼습니다.”(3,8).

오늘 복음은 그 청년이 부자였다는 사실을 들어서 재물이 신앙에 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하신 명령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다.’는 오늘 복음에 베드로가 할 고백을 도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청년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모든 것을 희생하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도 있었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복음서들 안에 재물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은 많이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말씀의 씨가 뿌려져도 “재물의 유혹과...욕심이 밀고 들어오면 말씀이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한다.”(4,19)고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6,24)고 말합니다. 재물에 대한 우리의 애착은 하느님도 이웃도 보지 못하는 경지로 우리를 쉽게 몰고 갑니다. 진지한 모든 종교는 어느 수준의 무소유(無所有)를 권장합니다. 재물이 발산하는 현란한 빛은 인간을 쉽게 무분별하게 만듭니다. 가진 것이 적으면, 사람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것으로 혹은 값비싼 명품으로 스스로를 치장하면,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훼손되기도 합니다. 자기 스스로 보잘 것 없는 인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이에게 가진 것 모두를 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 수준 이상의 부자는 ‘바늘귀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낙타와 같이 구원 받을 수 없고, 어느 수준 이하의 재물을 가진 사람은 구원 받는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재물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라고 복음은 권합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마음이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필립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궁핍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어떤 일,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을 통해 나는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4,11-13).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가 집착하는 재물이 나에게 힘을 주는지, 혹은 바울로의 말씀과 같이 하느님이 힘을 주시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택한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때때로 하느님 앞에 눈감고 앉아서 반성해 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가 되도록 삶의 궤도를 수정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를 움직이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청년은 예수님에게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그 말을 고칩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당신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의식하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선하십니다. 우리 안에도 선한 것이 보이고, 선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있다면,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놀랐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제자들이 서로 묻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이고, 당신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라,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말하는 길거리 선교사들이 알리는 하느님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선하신 하느님은 선한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우리는 선하신 하느님에 대한 말도 선하지 않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면서 재물과 명예를 얻기 위해 살기보다는, 많은 것을 버리고 잃는 아픔을 겪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고 권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그분이 보여주신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병든 이를 찾아보는 선한 실천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좋은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시오.”(마태 5,16)라는 예수님의 분부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선한 실천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