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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영성
사제들의 복음화 없이 ‘새로운’ 복음화 없다“고급 승용차 핸들 잡고, 골프채 쥐라고 예수께서 사제 손에 성사권 맡긴 것 아니다.”
김홍락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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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10.08  10: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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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70년부터 10월을 ‘전교의 달’로 기념하고 있다. 특히 올 10월은 ‘신앙의 해’가 시작되는 달이기도 하다. 지난 2011년 10월 1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자의 교서 <믿음의 문>(Porta fidei)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인 2012년 10월 11일부터 2013년 연중 마지막 주일인 11월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까지를 ‘신앙의 해’로 선포하였다. ‘신앙의 해’를 시작하는 올 10월 11일은 <가톨릭교회 교리서> 반포 20주년이기도 하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일련의 교황청 문헌과 발표에 따르면, ‘신앙의 해’의 핵심은 ‘새로운 복음화’다. 교황청 소식 전문 통신사인 ZENIT (www.zenit.org)의 보도에 따르면, 2012년 6월 21일 ‘교황청 새복음화 촉진평의회’ 의장 리노 피시켈라(Rino Fisichella) 대주교는 교황청 공보실에서 열린 ‘신앙의 해’ 소개 기자회견에서 “신앙의 해는 새로운 복음화의 여정”이라고 소개했다. 이에 한국 천주교회도 각 교구마다 ‘신앙의 해’를 맞아 여러 행사들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모습들이다.

‘새로운 복음화’라는 용어는 1979년 6월 9일 폴란드 모길라(Mogila)의 ‘거룩한 십자가 순례지’ 미사 강론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처음으로 사용했고, 1983년 라틴 아메리카 선교 5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제19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를 통해 교회의 공식적인 개념으로 등장했다.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용어를 <평신도 그리스도인> (1988년), <교회의 선교사명> (1990년), <제삼천년기> (1994년) 등 여러 문헌과 회칙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새로운 복음화’: 시대의 변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복음화’의 개념은 <제19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자리에서 ‘새로운 복음화’는 “재복음화가 아니라” “그 열정과 방식, 표현에서 새로운 것”이라고 밝혔다. 즉 ‘새로운 복음화’는 이미 복음화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또 다시 복음화를 시도하는 ‘재복음화’와는 다르게,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새로운 복음화’ 개념은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로 고스란히 상속됐다. 교황은 자신의 교서 <믿음의 문>(Porta fidei)에 이어, 올 10월 7일-28일까지 열릴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주교시노드) ‘의안개요’는 ‘새로운 복음화’를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 시대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사고방식”이며 “그리스도교가 인간역사 안에서 새로운 상황들을 읽고 해석하는 법을 아는 능력”이라 정의했다. 즉 ‘새로운 상황과 환경 변화에 직면해’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는 뜻이다.

‘복음화' : 예수 자신의 사명

이쯤에서 우리시대 ‘새로운 복음화’의 현실을 살펴보기에 앞서, ‘복음화’의 원래 의미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복음화’는 ‘복음화’와 연결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복음화’를 의미하는 영어 명사는 ‘evangelization’ 그리고 동사는 ‘evangelize’다. 명사 ‘evangelization’은 ‘복음화’라는 개념적 명칭을, 동사인 ‘evangelize’는 ‘복음화’의 개념적 행동양식을 표현한다. ‘복음화’의 개념적 행동양식은 ‘복음화’의 개념적 명칭이 담고 있는 ‘복음화’의 의미는 물론, ‘복음화’ 양태, 즉 ‘실천적인 내용’을 담보하고 있다는 뜻이다.

‘evangelize’는 라틴어 ‘evangelizare’에서 왔는데, 이 역시 그리스어 εὐαγγελίσασθαι (에우안겔리사스타이)를 라틴어로 번역한 말이다. 그리스어 εὐαγγελίσασθαι는 εὐ (에우, 좋은)와 αγγέλω (안겔로, 알리다)의 합성어다. 즉 ‘좋은 것을 알리다’는 뜻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천사’(angel) 역시 αγγέλω의 명사형인 ἄγγελος(안겔로스, 알리는 사람)에서 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천사’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예수의 양친인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나타난 가브리엘 천사처럼 말이다. 다른 한 편으로, 그리스어 ἄγγελος는 히브리어 מלאך (말라키)와 같은 뜻으로, 이 역시 ‘angel’처럼 누군가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使者)를 뜻한다. 구약성경의 ‘말리키서’의 주인공인 ‘말라키’예언자의 이름 역시 그러하다.

   
▲ 불가타 성경
그렇다면 성경에서 ‘복음화’에 대해 어떻게 언급하고 있을까? 우리는 이에 대한 해답을 1970년에 출판된 <미국판 가톨릭 성경> (The New American Bible, 이하 NAB)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개정판이 나왔지만, 1970년판 NAB는 원본에 근거한 충실한 성경번역을 촉구한 교황 비오 12세의 교서 <성령의 영감>(Divino Afflante Spiritu, 1943년 9월 30일)의 원칙에 따라, 405년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347-420) 교부에 의해 라틴어로 쓰인 불가타(Vulgata)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우리말 신약 성경 가운데 <복음서> 전반에 걸쳐 ‘복음’ (福音)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기쁜 소식’이라는 용어는 유독 <루카복음>에만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라틴어 불가타 성서를 충실히 번역한 NAB에서 ‘기쁜 소식’을 ‘복음화’의 개념적 행동양식인 ‘evangelize’라는 용어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NAB의 <루카복음서>에서 ‘기쁜 소식’을 ‘evangelize’로 번역한 대목이 모두 5차례 등장한다. 그리고 이를 모두 ‘복음화’로 번역해 놓았다. 대표적으로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한 말씀 가운데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루카 4,18)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고”를 “가난한 사람들을 ‘복음화’하고...”(the Spirit of the Lord anointed me to evangelize the poor)로 번역하였다. 이에 대한 불가타 성서 원문은 이러하다. “Spiritus Domini super me propter quod unxit me ‘evangelizare’ pauperibus misit me.” 즉 이 대목에서 사용한 ‘복음화’를 뜻하는 영어 동사 ‘evangelize’는 불가타 성경의 라틴어 ‘evangelizare’를 충실히 번역한 결과다. 나머지 네 차례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기 위해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나타난 가브리엘 천사의 말(루카 1,19)에서 “evangelizare”, 천사가 목동들에게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루카 2,10)에서 “evangelizo”, 세례자 요한이 군중에게 세례를 베풀며 행한 설교(루카 3,18)에서 “evangelizabat”,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전도 여행을 떠나시며 군중에게 하신 말씀 (루카 4,43)에서 “evangelizare”가 사용되었다. 이 모두 라틴어 “evangelizare”의 시제변화 형태들이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루카복음에서 등장한 ‘복음화’는 무엇보다도 예수 자신의 사명을 의미하는 용어였다. 또한 하느님의 뜻을 알리는 장소에서 ‘복음화’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불가타 성경 이후 교회에서 ‘복음화’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전까지, 1,500여 년이라는 세월동안 ‘복음화’는 교회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은 용어였다. 그리고 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직접 선교를 뜻하는 전통적 ‘선교’의 개념을 대치하는 새로운 용어인 ‘복음화’를 발견한 듯, 아주 새로운 것인 양 세상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리고 ‘복음화’는 1980년대 이후 시대적 흐름 안에서 ‘새로운 복음화’의 의미로 변화되었다.

30여 년간 외친 ‘새로운 복음화’에도...
신자들은 하느님과 그 말씀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다 결국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질문 하나. 그렇다면 전통적인 ‘선교’의 개념을 뛰어넘는 ‘복음화’를 표방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이, 그리고 그 기억이 아직 생생히 살아있을 1970년대 후반에 어찌하여 ‘새로운 복음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을까? 그 동안 강조해 온 ‘복음화’를 ‘옛 것’으로 돌리면서까지 ‘재복음화’가 아닌 ‘새로운 복음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긴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복음화’가 ‘선교’를 대체하는 개념상으로만 존재했을 뿐, 현실은 과거의 ‘선교’에 갇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대가 요구하는 ‘복음화’에는 눈을 감은 결과이기도 하다. 민중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데 비해 교회 당국은 여전히 과거의 영광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재복음화’가 아닌 ‘새로운 복음화’를 선언했지만, 결국 ‘재복음화’는 고사하고 ‘복음화’마저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복음화’는 어떨까? 이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1979년부터 2012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33년, 이 용어가 교회에 공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1983년부터 치더라도 29년간 교회는 ‘새로운 복음화’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해 왔다. 하지만 이 용어가 여전히 낯선 이유는 그 기나긴 세월동안 ‘새로운 복음화’는커녕 ‘옛 것’인 ‘복음화’도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교회의 위기로 나타났다. 이에 대한 한 예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복음화 위원회> 위원장 이병호 주교는 올해 전교의 달을 맞아 발표한 담화에서 ‘새로운 복음화’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남미 브라질 대표 주교가 2008년에 있었던 제12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참석했을 당시 그가 전했던 말을 소개했다. 현재 교회가 대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설명이다.

   
▲ 이병호 주교(전주교구장)
“신자들이 타 교파를 찾아가는 이유는 교회가 주장하는 교의나 어떤 사목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자신들의 체험 때문입니다. 어떤 신학적 이유가 아니라, 교회 안의 어떤 방법론 때문에 떠나는 것입니다.”

브라질 주교의 증언대로라면 가톨릭 신자들이 가톨릭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다른 종교 집단을 향해 떠나는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등지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느님을 찾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찾고 싶어 하는 하느님을 다른 교파 안에서 찾았을까? 브라질 주교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들이 다른 교파로 들어가면, 짧은 시간 안에 그 삶의 태도가 확 달라집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격에 맞지 않는 생활 태도를 버리고 칭찬할 만한 행동 양식을 지니게 됩니다. 그들이 듣는 말씀은 그 삶 속에서 구체적인 효력을 내고, 그 내면 생활을 길러 주며, 마음속 깊이에 받아들여 소화시킨 종교적 가치들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증언하게 합니다.”

가톨릭교회 신자로 있을 때는 찾지 못했던 하느님을 다른 교파에서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가톨릭교회의 하느님이나 다른 교파의 하나님은 같은 분이실텐데 말이다. 브라질 주교는 그 이유와 더불어 우리들의 문제에 대해 고백한다.

“자, 그러면 그들이 가톨릭 신자였을 때에는 똑같은 하느님 말씀이 별 효력을 내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우리 공동체 안에 머물던 때에는 찾지 못하다가 다른 교파로 건너가서는 마침내 찾아낸 것이 있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과 그 말씀에 굶주리고 목말라한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엄중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 줄 능력이 있는 복음의 사도가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것이겠습니까?”

앞서 언급했듯이, 1983년 <제19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한 ‘새로운 복음화’의 형태를 “그 열정과 방식, 표현에서 새로운 것”이어야만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30여 년간 외친 ‘새로운 복음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자들은 하느님과 그 말씀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다 결국 교회를 떠나고 있다. 브라질 주교의 고백처럼 교회를 떠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줄 ‘복음의 사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새로운 현실에 맞춰 신자들은 “열정”으로 가득 찬 신앙생활을 영위하는데, 정작 신자들의 영성적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에서 사용했던 “방식”과 “표현”이 새롭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복음화’ 개념을 도입한지 50년, 그리고 ‘새로운 복음화’ 개념을 언급한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교회는 여전히 그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복음화’든, ‘재복음화’든, ‘새로운 복음화’든 이를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결과는 미주 대륙과 유럽의 가톨릭교회의 붕괴로 이어졌다. 가톨릭국가가 대부분인 남미에서 조차 하루에 7,000여 명씩 교회를 떠나고 있는 실정이다.

영적 쇄신 없는 한국교회의 ‘복음화’ 구호... 여전히 양적 성장만 요구해

한국 천주교회의 실정은 어떠할까?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이 용어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여 받아들인 듯하다. 아마 ‘새로운’이라는 단어 때문에, ‘비’신자에 대한 선교와 ‘새’신자의 입교의 뜻으로만 축소, 전달되었을 것이다. 단적인 예로, ‘새로운 복음화’라는 용어가 한국 천주교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2011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목교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에서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교회와 신자들의 ‘자기복음화’(自己福音化)”라고 밝히고 있지만 대부분의 내용을 여전히 ‘비’신자들에 대한 선교에 할애하고 있다.

또 다른 예로 <서울대교구>의 장기 사목 목표는 「2020프로젝트」다. 2020년까지 인구비율 신자수를 20%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다. 그래서 표어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성경 구절도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코 16,15)로 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모습은 2012년 <사목교서>에서도 여전하다. 「2020프로젝트」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명동성당종합계획” 1단계 수행과 ‘인구통계에 따른 신자비율’을 첫 머리에 언급하고 있다. 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강조한 ‘새로운 복음화’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새로운 복음화’의 시대에 한국 교회는 여전히 거리 곳곳을 누비며 ‘가두선교’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요란한 ‘새로운 복음화’ 논의에서 정작 본질적인 요소가 빠져있다.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 보편교회와 지역교회가 내놓은 그 많은 문헌과 발표문들, 특히 사목교서 안에서 교회 내/외적 쇄신과 사목적 차원에서 교회의 역할, 그리고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하지만, 정작 ‘새로운 복음화’의 핵심이 되어야 할 교회 전체적인 ‘영성적 쇄신’에는 침묵하고 있다. ‘새로운 복음화’ ‘신앙의 해’의 일환으로 교회에서 내놓은 신자들의 쇄신 방편으로, 또는 신자들의 영성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은 결국 ‘지금까지 여러분이 믿는 바를 교회에서 말하는 신앙에 비추어 반성하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국교회는 신자들이 왜 교회에 등을 돌리는지, 특히 젊은 신자들이 왜 교회와 신앙에 관심이 없는지에 대한 시대적 질문에 정직한 대답을 내놓지 않은 채, 여전히 ‘신앙의 해’를 시작하는 <2012년 전교의 달> 담화에서 조차 ‘우리가 믿는 바’를 찾아 가톨릭교회 교리서와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信經)을 외울 듯 읽으라고 권장하는 형편이다. 결국 신자들의 문제는 신자들 자신들이 만든 문제라는 입장과 다를 바 없다. 삶과 실천이 빠져있는 ‘외울 듯 읽는’ 신앙이 과연 영성적 쇄신의 길잡이일까?

   
 ⓒ 한상봉 기자

한국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성직자의 복음화 결여’

더욱 큰 문제는 사목일선의 책임자인 성직자들의 내적 쇄신에 대한 주문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점이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위기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은 바로 성직자의 ‘복음화’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제 영성의 결여’로 이어진다. 예수가 ‘가난한 이들의 희년’을 선포(루카 4,18)하며 자신 스스로 ‘복음화’를 사명으로 삼았듯, 사제 역시 예수의 삶을 본받아 ‘복음화’를 자신의 삶의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복음화’를 살아내야 한다. 고급 승용차 핸들을 잡고, 골프채를 쥐라고 예수께서 사제의 손에 성사권을 맡긴 것이 아니다.

‘사제 영성’이 바로 선다면, 사제 ‘복음화’가 제대로 된다면, 사제는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소외된 이들의 손을 잡아주며, 그 스스로가 ‘가난한 이’가 될 것이다. 글 첫머리에서 보았듯, 어원상 ‘복음화’가 ‘좋은 것을 알린다’는 뜻이라면, 이는 그저 ‘예수의 삶’을 입으로 전달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예수의 삶’이라도 충실히 전달했으면 한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위기가 사제들의 ‘복음화’ 결여가 가장 큰 원인임을 사제들 스스로가 자각하여야 한다.

제대로 된 ‘복음화’의 노력도 없이 매번 ‘새로운 복음화’를 외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교리서 한권에 이 시대 신자들의 고민, 교회의 고민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다. ‘재복음화’ 즉 재탕, 삼탕의 ‘복음화’를 해서라도 우선 ‘복음화’를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따라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이 순서다. 이 ‘새로운 길’은 교회 자신부터 ‘복음화의 길’을 걷는데서 출발한다. 곧 교회 전체가 스스로의 문제를 고백하고 쇄신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복음화’의 시작이다.

   
 
김홍락 신부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
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Navotas)시 빈민촌에서 도시빈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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