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회의가 개최한 생명수호대회가 지난 2일 명동대성당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고 한다. 여기서 채택한 ‘생명수호 결의문’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는 인간 생명에 대한 수호 의지를 재확인하였고, 이 대회가 생명 경시의 주범으로 지목한 정부에 다시 한 번 자신의 확고한 의견을 전달하였다. 이 행사 자체에 대해서는 교회 안에서 여러 다양한 평가가 이루어지겠기에, 여기서는 이 행사를 계기로 생각할 수 있는 다른 몇 가지 관점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필자는 이번 대회를 계기로 우리 교회가 현대 세계를 에워싸고 있는 이 극단적인 자본주의적 환경에 대해 다시 한 번 심도 있게 성찰했으면 한다. 이번 대회에서도 교회는 인간의 생명을 산업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정부에 경고하였지만 정작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토양 그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현대 문명 안에서 자본주의는 유기적으로 순환하면서 존속하는 생태계의 여러 매듭들을 잘라내어 특화함으로써 이득을 취하는 구조를 정착시켜 왔다. 이것은 생태계의 유기적 순환을 정지시키거나 왜곡함으로써 환경 문제를 발생시켰고, 생태계 모두가 누려야 할 순환의 이익을 특수한 인간 계급의 이익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정의의 문제를 낳고 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인간 생명도 예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생명에 대한 초월적이고 신화적인 관념과 이에 반비례하는 협소하고 근시안적인 현상 이해는 오히려 교회가 목표하는 바에 장애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한 지나치게 인간 중심주의적인 생명관은 생명의 위계를 조성하여 인간 외에 다른 동식물의 생명의 권리를 인간 생명의 종속 요인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차별적 시선이야말로 자본의 논리가 참으로 환대하는 지점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과거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을 상품화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주장하는 생명 윤리가 단지 인간 생명권의 핵심이 무엇인가에만 집중되어 있다면, 그로써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외에 나머지 문제는 방치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한편으로 교회는 내부적으로 그동안 스스로 얼마나 자본주의 환경에 노출되어 왔는지 성찰하는 것도 필요하다. 최근에 유행하는 몇몇 사목 프로그램이나 영성 훈련에 흐르는 상품화 논리, 그리고 복음적 인간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인간형을 만들고자 작심한 듯한 어느 유명 저자의 저서는 참담함마저 느끼게 한다. 이런 서적과 영성 프로그램이 교회 내외에서 ‘가톨릭’내지 ‘가톨릭 사제’란 상표를 달고 판매되는 현실이다. 이것이 아주 특수하고 돌출적인 사례이거나 세속의 유행에 따른 경우인지는 우리의 교회 생활을 돌아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전 건축을 비롯한 성당의 관리와 운영, 교회 사업장이 과연 진정으로 복음의 논리에 따라 운영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세속적인 경영 합리화 방안을 그 어떤 복음적 가치판단 없이 바로 교회 사업장에 도입하거나, 세속의 저잣거리 상식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운영자 개인의 사익 추구와 권한 남용, 지극히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근거로 직원들을 줄세우는 행태 등에 대해서 정말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일찍이 해방신학이 자신의 주요 주제로 선정한 바이지만 성서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흐름이 자유와 해방의 메시지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창세기와 출애굽을 비롯한 구약부터 네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간에 이르기까지 성서의 모든 문맥은 인간을 억압하는 각종 제약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서 지으신 참다운 목적으로 복귀할 것인지를 목표로 기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신학의 전언이 아니더라도 이 자유와 해방을 위한 투쟁이 바로 복음의 언명임을 우리는 알 수 있으며, 역사의 교회는 바로 이 투쟁을 자신의 복음적 소명으로 인식해 왔다. 이 소명에 응답하려면 먼저 우리가 어디에 구속되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를 얽어매어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는 이 거대한 실체가 현실적으로 관철되고 실현되는 지점이 어디인지 복음의 빛 안에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이를 교회 내에서 공유해야 한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들처럼 스스로 구속되어 있으면서도 구속되어 있다는 자의식을 갖지 못하도록 정교하게 조직되어 있는 이 거대한 그물의 정체, 모든 것을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으로 만들어 물신화하는 이 세대의 논리에 대한 뚜렷한 의식화가 그래서 필요하다. 그리하여 출애굽의 백성이 이집트의 안정된 노예생활을 벗어나 주리고 배고픈 광야 생활을 선택했듯이 우리 역시 필요하다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 모세의 십계명이 단지 당위적인 선언으로 백성의 윤리 생활을 통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 이외에 그 어디에도 구속되지 말라는 ‘자유의 대헌장’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분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당대의 교회는 자신에게 다가와 속삭이는 악마의 실체에 대한 민감성을 키워야 한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가 그렇게 애원했던 것처럼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할 것이다(갈라 5,1).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유인이 된 우리가 참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자본의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화’이며, 이것은 우리 안에서 자본의 힘을 제압하는 사랑의 능력을 배양함이며 지역과 본당 안에서 참된 사랑의 연대를 창출함에서 시작될 수 있다.


이진교 200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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