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방집 할머니'에게 배운 작은 행복을 크게 느끼는 방법

내게는 어릴 적부터 ‘약방집 할머니’라고 부르며 따르는 분이 있다. 직접적인 친인척 관계는 아니지만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모두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유일하게 ‘할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시다. 얼마 전 큰 태풍이 올라 온 날, 문득 약방집 할머니 생각이 나서 전화를 드렸었다. 할머니께서 혼자 살고 계시는 데다, 살고 계신 곳이 오래된 빌라여서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안부전화를 드린 것뿐이었는데, 할머니께서는 너무나 반가워하셨다. 그리고 반가움을 넘어 내게 고마워하셨다. “고맙다이, 고맙다 여갱아, 응, 고맙다.”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거듭 말씀하셨는지 모르겠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간 자주 연락을 못 드린 게 죄송하기도 하고, 혼자 외로워하셨던 시간이 느껴져 마음이 짠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도 이렇게 누군가가 기뻐할 수 있다는 데 새삼 놀랐다.

 
그간 나는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우울한 감정에 빠져있었고, 서로 기쁨을 나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내가 편안히 책을 읽는 동안 고통 받고 있을 누군가, 내가 밥을 먹는 동안 굶어가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며 그들의 고통에 빚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죄책감에 짓눌려 지냈다.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게 불편했다. 내가 이렇게 계속 지치고 힘들어하면서 푸념만 늘어놓자 아는 언니가 책의 한 구절을 내게 읽어주었다. 레이첼 나오미 레멘의 ‘할아버지의 기도’라는 책인데,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삶을 축복하고 있다. 가장 단순하고 일상적인 행동이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한 통의 전화, 가벼운 포옹,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것, 따스한 미소나 눈인사 등이 그네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기도 한다."

이 문장을 듣는 순간, 무언가가 내 머리를 탕- 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동안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세계의 크기는 얼마만큼 일까?’, ‘한 사람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계의 범위는 또 얼마만큼 일까?’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나의 ‘쓸모없음’에만 집중했었다. 그렇게 무력감과 분노를 느끼며 스스로의 감정을 소모해왔다.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한 번도 그 반대로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항상 다른 이들에게 도움은 주지 못하고 빚지며 사는 것 같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나도 가끔은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문장을 듣고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다.

당장 필요한 도움과 큰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작은 인사와 위로의 말, 손을 꼭 잡아주는 것으로도 나는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주 작은 행동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다른 이의 일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전화가 뜻밖에도 쓸쓸해하시던 약방집 할머니께 따뜻함을 전해드렸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이 가져다 준 해방감은 나로 하여금 다시 매일의 순간을 감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다시 아침산책을 시작했고, 누군가가 생각이 나면 바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더 자주 전화를 걸고, 미뤘던 편지를 부치고, 행복한 시(詩)들도 다시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지내니 신기하게도 내 안에서 행복이 다시 피어올랐다. 마음은 환해지고 지나가며 만나는 이들에게 밝게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지난주에는 계속 미루고만 있다가 1학년 때 지도교수님이셨던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가을을 맞아 노란 국화를 들고서 찾아가 내가 그린 그림과 편지를 전해 드렸다. 1년 정도 못 뵙고 지냈기에 나의 얼굴을 잘 기억 못하시는 것 같기도 했지만, 국화만큼이나 활짝 웃으며 맞이해주셨다. 교수님 연구실의 문을 닫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가을 하늘도 파랗고 바람도 선선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며칠 전만 해도 “날씨는 왜 이렇게 좋은 거야!”하며 억울해하거나 원망스러워했는데,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놀라웠다.

▲ "교수님 연구실의 문을 닫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가을 하늘도 파랗고 바람도 선선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여경

행복이란 이처럼 아주 작은 순간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뜻밖에 걸려온 전화, 여행지에서 보내온 엽서, 등굣길에 피어있는 노란 꽃,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좋아하는 노래, 친구와 사먹는 아이스크림 같이 사소한 것이 우리를 행복으로 물들이는 것이 아닐까. 비록 세상을 환히 다 밝히진 못하더라도, 때론 밝은 햇빛보다 작은 별빛이 더 따뜻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듯이, 우리는 모두 각자 옆에 있는 사람에게 아주 소중하고 빛나는 축복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고 축복이 된다면, 이곳에서의 삶도 꽤 살아 갈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넉넉한 계절, 가을을 맞아 이제는 먼 곳만 바라보며 욕심 부렸던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내가 아낄 수 있는 만큼 마음을 다해 내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는 힘껏 내 삶을 사랑해야겠다. 그리고 이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축복들을 한껏 느끼면서, 함께, 작은 행복들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여경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삶, 사람, 꽃, 벗, 별, 꿈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울림이 예쁜 말들에 이끌려 국어국문학과에 가게 되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고 이를 위해 문학과 예술의 힘을 빌리려 한다. 시와 음악과 그림, 나무, 물이 흐르는 공간,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고향 바다를 닮아 평온하고도 깊고 강인한 사람이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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