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에 우리신학연구소에서 교회달력을 만드는 일을 거들었다. 교회달력은 보통 본당에서 대림절 기간에 신자들에게 나눠주는데, 예수님이 육화하신 시점, 즉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신자들은 새해 달력을 벽에 걸며 다음 한 해를 나름대로 예감한다. 새해에는 좋은 일이 있어야 할 텐데, 새해에는 좀 더 그분에게 가까이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가족들의 안녕과 복락을 기원하고, 한번쯤 자기 자신에게 다가올 어떤 특별한 사건에 대해 성찰한다.

달력을 만들면서,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달력은 일년 내내 두고 보는 것이어서 신자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달력은 일종의 ‘광고’와 같은 것이어서, 주목해서 달력을 보지 않더라도 달력에 등장하는 그림이나 글귀, 디자인 등이 우리가 의식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우리에게 무엇인가 막무가내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달력을 잘 활용하면 신자들의 마음을 하늘에 닿게 할 수도 있고 땅에 매어둘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 집안을 들고나면서 늘 마주치게 되는 어떤 이미지 때문이다.

프로이트나 칼 융과 같은 심층심리학자들은 우리가 경험한 기억이 무의식 속에 이미지로 저장된다고 말한다. 그만큼 이미지는 책에서 읽은 어떤 문장보다도 더 강력하게 우리 무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무의식에 바르고 선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들을 많이 저장할 수록 우리는 특별한 위기의 순간을 은총의 순간으로 뒤바꿀 힘을 가지게 된다. 깊이 따져묻고 생각하지 않아도 우리의 무의식이 특별한 순간에 자동으로 특별한 선택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무의식을 복음적 이미지를 통하여 잘 정돈할 필요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어느 신부님 방에 놀러 갔는데, 문득 벽에 걸린 달력이 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웬일인가 자세히 보니, 달력 아래 부분에 달랑 성당 이름과 몇 가지 연락처만 적혀 있었다. 달력 하단에 빽빽하고 수두룩하니 광고가 들어가는 게 보통 우리가 보았던 본당달력이었다. 본당 신자들이 얼마간 달력 기금을 내어놓으면, 본당에서는 답례로 그 신자들이 운영하는 상점이나 회사, 기타 상업 광고를 달력에 실어준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주고받는 관계가 교회에서도 그대로 관철되는 것이다. 전화번호부 책자나 벼룩시장, 교차로 등에서 볼 수 있는 생활광고를 신자들은 달력에서 그대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정상 똑같은 내용의 광고가 달력 12장을 넘길 때마다 눈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문득 미국에서 도로시 데이와 함께 가톨릭일꾼운동을 시도했던 피터모린의 말이 생각난다. 교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장사꾼들이 교회를 저당 잡았기 때문이라는 전갈이다.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교회에선 뭔가 세상과 다른 법칙이 작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달력 그림과 이 광고들이 서로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림은 대부분 성화(聖畵)를 많이 쓰는 데, 어떤 거룩함의 영역에서 주어진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처음엔 이 거룩한 예수님과 성모님과 예술작품들이 날짜를 박아놓은 달력 본문을 사이에 두고 하단광고와 대립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성별(聖別)된 영역과 ‘부자가 되고 싶다는’ 자잘한 세속적 갈망 사이에 놓인 심연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달력을 떼어내지 못한다. “난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보증해주는 표지처럼 달력을 걸어두어야 하는데, 우리 무의식은 달력이 주는 그 긴장감을 일년내내 감당하지 못하므로 어떤 타협을 시도한다. 그 타협의 내용이란 성화와 광고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명제로 말하자면 이렇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부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세속적인 욕망과 진부한 일상생활이 더 이상 내 신앙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전처럼 살면서도 여전히 충실한 신자로 남을 수 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강론들이 본당에서 사제의 입을 통하여 우리의 풍족한 삶을 보장해주고 있는가. 비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날마다 돈벌이에 마음을 쓰며 출세와 성공을 자랑한다.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마저도 ‘하느님의 은총’이며, 내가 얼마나 신앙심이 깊은지를 알려 주는 증거로 제시된다. 하느님은 내편이고, 내 사업이 번창하도록 돕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태도는 하느님을 우리 입맛에 맞추어 조종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여기에 정작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의 사업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며, 우리가 오히려 그분의 사업을 도와야 하는 게 맞다. 하느님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우리 사업의 번창이 아니라, 우리의 사업이 그분의 뜻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지 여부이다. 우리가 정직하게 생계를 돕고,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하여 세상을 돌보고 있는지 묻고 계시는 것이다.

하느님이나 교회가 자기 사업의 수단으로 떨어질 때, 우리는 그것을 ‘상업주의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상업주의 영성을 전달하는 전도사 역할을 교회달력이 하고 있다면 너무 과민한 반응일까?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이런 우스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십수년 전 일이다. 인천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한 전도사가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계속 외치며 고요한 전철 안을 소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전철에서 신문을 파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마침 100짜리 신문을 팔던 그 신문팔이 소년의 진행방향이 전도사와 같아서, 전철 안에서 이런 소리가 계속 울려퍼져야 했다. “예수 천당...” “100원이요!” ... ... “예수천당 ... 100원이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던 이들이 여기저기서 폭소를 터뜨렸다. 교회가 우스개가 되지 않으려면 교회에서 먼저 ‘상업주의적 혐의’를 받을만한 요소가 없는지 살펴야 한다.


한상봉 2007/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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