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회의와 서울대교구가 또(!) 대규모 행사를 준비하나보다. 내달 초 명동성당에서 거행되는 ‘천주교 생명수호대회’는 주교단과 사제단, 7대 종단 대표, 신자 국회의원, 정부 관계자, 일반 신자 등 6천여 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가 될 것이라고 한다. 요즘 같은 시절에도 이런 동원용 행사, 과시형 행사가 필요할까? 그보다는 차라리 본당이나 소공동체를 중심으로 생명의 문제에 집중하는 교육 사업이 차라리 효율적일 것이다. 실제로 일선 본당에서 이런 주제를 갖고 교육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바닥 공동체 차원에서는 전혀 교육이나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교회 상층부 차원의 대정부, 또는 대사회적 차원의 메아리 없는 일회적 선언이 그야말로 공염불이나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최근 종교사회학자들의 평가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한국교회 주류의 움직임에 일종의 단절적 변화가 뚜렷하다고 한다. 곧 교회의 주된 관심이 정치·사회적인 이슈에서 생명․환경 쪽으로 이동한 상태이며, 이를 일반적으로는 한국천주교회의 보수화 현상 혹은 보수 회귀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분석은 다소 피상적이다. 지난 1970-80년대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는 엄밀히 말해서 일단의 진보적인 사제들과 평신도들에 의한 것이었고, 주교회의를 비롯한 교회 상층부는 아주 특별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낙태 반대와 같은 사안에 관심을 보였을 세상의 고통에는 오불관언으로 일관하였다. 최근 민주화 20년간 진보성향의 사제들과 평신도들의 사회 참여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반면 교회 상층부의 보수적 목소리가 이전보다 더 많이 표출되는 양상이 세상의 눈에는 아마 보수회귀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생명윤리와 관련한 교회의 관심을 그저 보수적 입장이라고 일축할 수는 없다. 그것은 모든 종교들이 반드시 감당해야 첫째 역할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생명 사안을 제기하는 교회의 어법은 독단적이고 생명에 접근하는 관점이 너무나 협소하다는 것이다. 첫째 작은 것이지만 생명을 말하는 교회의 어법에 문제가 많다. 예를 들어 배아복제문제를 갖고 공중파 토론에 참가한 교회 측 토론자들은 자기 논리의 근거를 성경과 교회문헌에서만 들던데 한참 미숙해보였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공론의 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성경과 교회 문헌이 이러하니 우리 사회도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말투는 공허한 설교가 되고 만다. 교회의 가르침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서 충분한 고뇌와 성찰 끝에 혼란과 두려움에 빠진 현대인을 위로하고 그들이 알아듣고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변환되어야 하는데 이 점에서 교회는 아주 서툴고 또 일방통행식이다.

둘째 어법의 독단성은 관점의 편협과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 교회가 바라보는 세상은 참 순진하고 단순하다. 교회는 사물과 인생사를 하나씩 떼어놓고 생각하지 그것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사연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통합의 관점이 빈약하다. 교회는 줄기차게 낙태를 반대하였다. 최근에는 배아복제가 생명과 인간존중에 불러일으키는 심각한 문제들을 지적하였다. 다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낙태와 같은 생명경시의 문제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깊은 사회적 맥락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낙태의 문제가 사실은 산부인과 수술실 그 이상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악이라는 점은 애써 간과하기에 배아의 인권에는 그토록 큰 목소리를 내면서도 국가보안법과 같은 악법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다행히 교회의 바람대로 우리 사회에 낙태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치자. 배아줄기세포 대신 교회가 지원하는 성체줄기세포 연구가 큰 성과를 거둬서 의료계의 혁신적 진보가 일어났다고 치자. 그러나 새만금과 같은 대자연의 파괴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미군기지 건설을 위해 평택 대추리 농민들을 마구 쫓아버려도 상관없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함부로 잘라버려도 그게 적법한 사회절차로 인정되는 사회라면 그게 과연 복음화된 세상일까? 교회는 도대체 어떤 새 하늘 새 땅을 꿈꾸는가? 물론 이런 모습은 억지 가정이겠지만 우리 교회는 세상을 그렇게 단선적으로 파악하는 순진함을 보인다.

이를테면 배아줄기세포 복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체줄기세포가 마치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말하고 이를 위해 어마어마한 교회의 자산을 투입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이 성체줄기세포 역시 최선의 대안은 아니며 어떤 경우에는 배아줄기세포 못지않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불교는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위해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성체줄기세포를 위해 파격적인 연구비 지원을 공약하였는데 종교계가 이런저런 논쟁에 휘말리기보다 천문학적인 규모의 헌금을 차라리 현재의 의학 수준으로도 충분히 치유 가능한 수많은 가난한 환자들에게 베풀겠다고 했으면 이 세상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끔찍하게 즐거운 상상이다.

생명을 수호하는 대회라고 했다. 그렇다면 한 생명이 처한 환경의 문제와 노동과 가난의 문제, 그리고 그 인간이 처한 반인권의 현실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기도해야 한다. 기왕에 치루는 행사라면 반드시 어법의 독단성과 생명을 이해하는 통합적 사회적 관점을 튼튼하게 세우는 뜻 깊은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진교 / 2007-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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