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각 교구장들의 사목교서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 가운데 ‘복음화율’이라는 말이 있다. 서울대교구의 ‘복음화 2020운동’이 대표적인 것으로서 교구 내 전체 인구 대비 신자 인구 비율을 높이자는 문맥에서 사용되는데, 과연 이것을 복음화율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궁금하다. 신자 수 증가라는 양적 개념을 어떻게 복음화라는 질적 개념으로 호명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신자 수가 10%를 넘으면 정말로 그 지역의 복음화가 10%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가? 이 두 단어가 정말로 동일한 사태를 지칭하는 동의어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일종의 언어 속화 현상이다.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듯이 교회의 근본 사명은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세상과 인류의 복음화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신자 수 증가 현상을 복음화로 해석하는 순간 우리의 사명과 목표는 초점을 잃고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마치 복음화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작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2005년 인구센서스]의 종교인구 조사 결과를 놓고 가톨릭은 내심 표정 관리에 바쁘고, 개신교는 그 원인을 찾는 데 골몰하고 있지만 막상 이 조사 결과의 행간을 읽는 각 교단의 관점은 여기서 한 치도 변하지 않고 있다. 

 

[현대의 복음 선교]를 비롯한 교황 문서들도 강조하고 있는 바이지만, 오늘날 선교와 복음화는 그보다 더 멀리 더 깊이 나아간다. 복음화는 단지 사람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만들어 가톨릭 문화와 습속을 전수하는 데 있지 않고 복음과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상반되는 인간의 가치관, 생활양식 등을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의 빛으로 바꾸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개신교와 가톨릭을 망라하는 한국의 그리스도교계는 아직도 신자 수 증가를 복음화라고 생각하며 이것을 이룰 수 있다면 그 어떤 세속적 방법론도 차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는 복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를 바꾸는 역전 현상도 보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처음에 제기했던 질문이 단순한 언어적 착각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근본적 몰이해와 왜곡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복음의 위기는 어디서 오는가? 왜 사람들은 더 이상 복음을 믿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은 애초부터 잘못 제기된 질문이다. 복음이 위기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교회의 위기를 복음 자체의 위기로 전가해서는 안 된다. 또, 스스로 복음을 실천할 능력이나 포부가 없음을 애꿎은 세속화의 탓으로 돌려서도 안 된다. 오늘날 교회가 위기인 것은 동어 반복적으로 말해서 교회가 교회다움을 상실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각종 성명서에서는 세상이 온통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있다고 한탄하면서도 성전건축이나 기타 교회 사업에서는 스스로 그보다 더한 물질중심의 가치관과 행태를 거침없이 보여주고, 복음은 오직 강론대에서만 외쳐질 뿐 대다수 교회의 삶 안에서는 그 어떤 유효성도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오늘 교회의 모습은 참으로 비탄스럽다.

 

가톨릭 교회만이 유일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만방에 공언한 최근의 신앙교리성 문서는 새삼스럽게 우리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사도로부터 이어왔다고, 교황과 일치해 있다고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인가? 한 개인의 정체성이 출생지, 집안 등의 ‘원천’(originality)만이 아니라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의해서 결정되듯이 교회의 정체성 역시 복음에 대한 충실과 확신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되리라 본다. 스스로 물려받은 보화를 탕진한 죄 어찌 갚으려고 하는가!

 

이진교/  2007-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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