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0일 한가위 미사: 루카 12,15-21

우리 조상들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이 풍요의 계절에, 달 밝은 날을 택하여 그들이 수확한 곡식과 과일로 차례 상을 차려 놓고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분들의 노고와 베푸심이 있었기에 후손인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감사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수확한 풍요로움이 은혜롭다는 사실도 마음에 새겼습니다.

우리나라의 설과 추석, 두 큰 명절을 보면, 베풀어진 것에 대한 감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두 명절에 행해지는 큰 의례가 둘 다 조상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랍비들의 문서,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곳곳에 다 계실 수 없어 어머니를 주셨다.” 어머니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읽으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연장하면, 조상들에 대한 우리의 감사는 하느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이기도 합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교통대란을 겪으면서도 추석명절을 위해 귀성길에 오르는 것은 살아 있는 가족이 함께 모여 돌아가신 어른들의 은혜로움을 기억하겠다는 것입니다. 떠나가신 집안 어른들로 말미암아 맺어진 가족과 친척의 인연들입니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과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을 기억하는 마음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가위에는 형제자매와 친인척들이 함께 모여, 우리 곁을 떠나가신 집안 어른들을 기억하면서, 조상들이 행하신 베풂이 있어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함께 기뻐합니다.

인류역사가 있으면서 베풂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면서 베풂의 역사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였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심이 된 문화권에서 발생한 언어입니다. 아시아의 문화권은 하느님이라는 단어 대신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하늘이 주신 조상입니다. 그래서 중국문화권은 효(孝)를 삼강오륜의 으뜸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는 단어도 씁니다. 하늘이 만들어주신 인연이라는 말입니다.

효는 그 인연을 은혜로운 것으로 알고 감사드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천생연분을 소중히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인간의 도리를 다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집안 어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그분들로 말미암아 발생한 형제자매를 소중히 생각하며 사랑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효자는 없습니다. 우리의 문화권이 말하는 효라는 덕목(德目)에는 하늘이 맺어주신 인연들을 소중히 생각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었습니다. 그는 큰 창고를 지어서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날 밤 그를 불러 가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바로 이러하다.’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좁은 시야에 갇혀서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곡식과 재산이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우리 삶의 보람일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의 주인공이 지닌 시야(視野)에는 자기밖에 없습니다. 자기 한 사람이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이 자기 생명의 최대 과제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주인공은 은혜롭게 베풀어진 생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가 수확한 것도 베풀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에게는 그가 가진 모든 인연들도 소중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주인공은 베푸심의 흐름에서 스스로 이탈하여 유아독존(唯我獨尊)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은혜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 한 사람의 안일(安逸)과 그것을 보장해주는 재물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소위 무원고립(無援孤立)의 경지를 택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만을 보고,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단편적이라, 우리는 많은 순간에 그렇게 살기도 합니다. 이기심과 욕심이 자신을 눈멀게 한 순간들이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에 따라 또 환경에 따라,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하늘이 베푸신 집안의 어른들과 형제자매들이 은혜롭다는 사실을 생각하던 이 계절에 우리도 우리의 시야를 넓혀서 우리 주변을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셔서 주어진 우리의 생명이고, 또한 우리 주변의 생명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확대해 보면서 베풂의 흐름에서 이탈(離脫)하는 우리의 시선을 잠시 멈추고,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인연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근본으로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고 가신 분들도 하느님과 함께 사셨고, 지금은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옛날 모세는 이 사실을 이렇게 포현하였습니다. “선조들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탈출 3,15). 돌아가신 어른들을 위한 우리의 마음은 이제 기도로 표현됩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며 바치는 우리의 기도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우리도 그 은혜로우신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먹고 마셔서 기쁘기만 한, 한가위는 아닙니다. 하느님이 보이고, 돌아가신 집안의 어른들이 보이며,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소중히 생각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즐겁고 행복한 명절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 안에 살아계신 어른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베푸신 인연들이 있습니다. 이 계절이 주는 풍요로움을 은혜롭게 보는 그만큼,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시야는 넓어질 것입니다.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신 집안의 어른들과 더불어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립시다. 하느님은 오늘도 축복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 축복과 그 사랑을 연장하여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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