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김미경]

"딩동, 딩동!" 토요일 아침 6시 30분. 누군가 현관 벨을 수 차례 눌렀다. 깜짝 놀랐다. 도대체 누구지? 경비실인가? 주차를 잘못했나? 아들 군대에서 뭔 급한 소식이 왔나? 순간적으로 멍한 머리를 회전시키며 인터폰을 보았다.

어떤 할아버지가 현관 앞에 서 계셨다. "누구세요?" "여기 402호 아니에요?" "여기 405호인데요." "아, 그래요?" "402호는 요 옆줄이에요."

할아버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 사라졌다. 나는 나가볼까 하다가 자다 일어난 부스스한 외모로 나가기 싫어 그냥 들어와 버렸다. 남편이 물었다. "누구?" "응, 402호 할아버지. 402호 할머니는 자주 우리집에 오셔서 문 열라고 하시는데, 할아버지는 처음이네. 할아버지도 치매 왔나?"

ⓒ황동환

402호 할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우리집에 오셔서 문을 두드리신다. 주로 토요일에 오시는데, 내가 집에 없는 다른 날도 오시는지 그건 모르겠다. 어떤 날은 옆 라인으로 가시라고 알려드려도 집을 찾지 못하고 조금 이따 다시 와서 문을 두드리신다. 할 수 없이 모시고 나가 할머니 집까지 바래다 드려야 한다.

그럴 때 마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왜 이러지? 이러는 것 처음이야." 할머니가 민망하실 것 같아 "저도 깜박하고 다른 데로 들어갈 때 있는데요, 뭐." 하고 말씀드린다. 몇 번을 그렇게 우리집에 오시곤 해서 데려다 드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눠 보았는데 할머니의 연세는 팔십이 넘으셨고, 할아버지와 두 분이 사신다. 할머니는 전직 한국은행원이었다고 한다. 젊어서는 참 똑똑하고 예뻤을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2주 전, 할머니께서 또 오셨는데, 그때 본 할머니는 많이 엉클어져 있었다. 머리 모양새도 엉망이고 무엇보다도 역겨운 지린내가 심하게 났다. 입고 있는 바지에서 나는 냄새였다. 밤색의 몸뻬 바지였는데 두툼해서 더울 것 같은 바지였다. 언제 빨았는지, 겉에서 보기에도 몹시 더러워 보였다. 본격적으로 치매가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집까지 모셔다 드렸는데 할아버지가 나오셔서 할머니를 데려가셨다. 할아버지는 깨끗한 흰 러닝셔츠에 여름용 잠옷 바지를 입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눈도 안 마주치고, 아무 말씀도 안 하셔서 나도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왔는데, 저러다 할머니 정말 집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할아버지까지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자제 분들은 이를 알고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치매.. 그 무서운 단어

가까이 지내는 사람 중 부모님이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이 꽤 된다. 한 친구는 친정 엄마가 혈관성 치매 환자다. 한겨울 아침에 나가셨다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뇌혈관에 이상이 왔다. 바로 제대로 된 병원 진료를 받았어야 했는데, 이상하게 이 병원 저 병원 돌아다니시다가 그만 저녁에야 손을 쓸 수 있었다. 깨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실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다행히 회복을 하셨지만 뇌 손상이 심해 자식들을 못 알아보셨다. 친구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미국에 나가 있다가 임시 귀국해서 막 회복된 친정 엄마를 봤는데 자신을 못 알아본다고 몹시 울었다.

지금까지 1년 9개월 요양병원에 계시는데 요새는 많이 좋아지셔서 자식들은 알아본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7세 정도의 지능 수준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예전에 자식들이라면 뭐든지 다 해주시던 엄마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본인은 그것이 속상하고 서럽지만 7세 엄마는 맛있는 것에 즐겁고, 노래에 즐겁고, 칭찬에 즐겁다. 그동안 엄마가 고생만 하셨기에 그렇게 즐겁게 지내시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고 한다.

다른 한 친구는 시어머니가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다. 고향에 홀로 사시다가 치매가 와서 서울로 모시고 왔는데 3개월 계시다가 결국 고향 요양원에 내려가셨다. 이 친구는 직장 생활을 한다. 다행히 오후 1시에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하기 때문에, 오전에는 친구가 간병을 하고 오후에는 간병인을 두며 저녁에는 남편이 간병하는 식으로 분담해서 어머니를 돌보았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한밤이고 새벽이고 계속 손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밤잠을 못 자는 날들이 계속되자 가정 생활뿐 아니라 직장 생활도 지키기 힘들게 되었고, 결국 남편과 시동생이 적극적으로 요양원을 수소문해서 지방 요양원에서 지내고 계신다.

또 다른 친구는 친정 엄마가 약한 혈관성 치매 환자다. 이 친구는 기력이 약해 수족을 거의 못 쓰시는 시어머니를 10년 동안 돌보면서 살았다. 말이 10년이지, 얼마나 긴 세월인가? 이 친구는 "내가 죽어야 끝날 일인가 보다"라고 나라는 존재 없이, 희망과 기쁨도 없이, 자포자기하고 살았다고 했다. 시어머니 돌아가시기 2개월 전, 대소변까지 못 가리게 되자 이 친구의 고생을 보다 못한 시고모님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돌봐주셨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모진 고생이 끝났는가 싶었는데, 5년 전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살게 되었다. 그런데 작년 2월, 친정 엄마가 갑자기 중풍이 왔다. 회복 후 다행히 치매의 정도는 약했지만 24시간 돌보는 사람 없이는 혼자 생활하기 어려웠다. 그런 엄마를 친정 아버님과 함께 돌보며 살았는데, 그만 친정 아버님께서 고생이 심하셨는지, 올 봄에 갑자기 돌아가시고 말았다. 꼼짝 않고 24시간 엄마를 돌봐야 했던 친구가 불쌍했던지 여동생이 친정 엄마를 모시고 갔다. 그분은 여동생 집에서 살면서 10시간 데이케어센터에 다니고 있다. 다행히 장애 등급을 받아서 실비만 내고 다니시는데, 어머님은 매일 학교에 간다고 하시면서 아침 8시 전에 벌써 준비 완료하고 버스를 기다리신다고 했다. 처음에는 안 간다고 울곤 하셨다는데, 지금은 내가 안 가면 안 된다고 하실 정도로 좋아하셔서 식구들 마음이 얼마나 가뿐한지 모른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치매 환자인 친구가 또 있다. 이 친구의 시어머니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있는 치매 환자다. TV도 안 보고, 움직이지도 않고, 밥도 떠 먹여 주지 않으면 안 먹고, 화장실도 때때로 귀찮아서 안 가는 환자라고 했다. 가만히 앉아만 있거나 누워만 있는데, 가서 보면 정말 속이 터진다고…….

다행히 시아버지가 건강하셔서 시골집에서 두 분이 살고 있는데, 꼼짝 못하고 24시간 병구완하시는 시아버지가 불쌍하고 고맙다고 한다. 그런데 이 친구의 아흔이 다 되어 가는 할머니도 치매 환자인데, 이분은 막 나가 돌아다니는 식이다. 그래서 식구들이 매일 동네방네 여기저기 찾으러 다닌다고 법석이라는데, 다행히 시골에 살기 때문에 금방 찾는 편이지만, 여러 날 못 찾은 적도 있다고 한다. 지난 봄에는 이틀 동안 찾지 못하고 먼 곳 다리 밑에서 찾았는데, 이른 봄이라 날씨가 무척 쌀쌀했는데도 추위도 별로 느끼지 못하시는지 감기도 안 걸리셨다.

도시 핵가족의 치매 환자 돌보기.. '헉' 소리 나온다

이렇게 주변에 치매환자가 많으니 나에게 가장 무서운 단어 중 하나는 '치매'다. 우선은 홀로 남은 친정 엄마에게 그런 불행이 오면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물론 지금의 엄마는 통장 계좌번호도 줄줄 외울 정도로 똑똑하고, 노인복지관에서 노래교실 다니면서 즐겁게 사시고, 영어, 일어, 카메라, 최근에는 하모니카까지 배우면서 늘 머리를 쓰며 산다. 또한, 각종 시국 미사에 참가하면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셔서 그런 병에 걸리기 쉽지는 않겠지만,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엄마도 이런 장담이 교만인 것을 아시는지, 묵주기도하실 때 "제 정신 잃지 않고 예쁘게 죽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꼭 하신다.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치매요양원에 후원금도 보내시면서 "이런 착한 일을 하면 나는 비켜가지 않을까?" 하시며 나름대로 예방 차원의 후원을 하시지만, 혈관성 치매는 당뇨가 주요 발병원인 중 하나라고 하니, 20년 당뇨를 앓고 계신 엄마도 이를 알고 불안하시기에 그런 기도를 하실 것이라 생각한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일은 내 시간을 송두리째 바쳐야 하는 일이다. 바쁘게 시간을 쪼개어 사는 세상에 가정에서 치매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요양병원에서, 어떤 분은 요양원에서, 데이케어센터에서 모시게 된다. 사회가 핵가족으로 쪼개진 지금, 예전의 대가족 제도처럼 시간과 일손을 나누어 두루두루 돌아가면서 돌보는 일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아직도 울타리를 열고 사는 시골에서는 이웃에서 도움을 받으며 돌보는 것이 가능하지만, 담장 높고 복잡한 도시에서는 더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그렇게 되면 과연 나는 어떻게 할까? 집에서 정성껏 엄마를 모실 수 있을까? 지금의 마음은 당연히 그래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장담할 수 있을까? 나 혼자 사는 거면 몰라도.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가끔 일본에 사는 동생은 고맙게도 이렇게 말해 준다. "언니, 엄마 아프면 언니 혼자 다 떠맡으라고 안 할 거야. 걱정하지 마."

그런데 엄마 걱정도 걱정이지만, 지난 5월에 본 기사는 나도 치매라는 불행에서 아주 상관없는 것은 아님을 알려 준다. 2005~2010년 5년간 치매 환자가 급속히 늘고 있는데, 특히 50대 치매 환자는 2배 넘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치매 외에도 파킨슨병, 뇌혈관 질환 등 노인성 질환을 앓는 40~50대 환자도 최근 5년 동안 1.3배나 증가해 전체 환자 중 이들 연령의 비율이 20%라니, 헉…….

그래. 딸에게 이런 말도 했다. "딸아, 만약에 엄마가 '나'를 잃고 살게 된다면, 네가 돌볼 생각하지 말고 요양원에 보내 줘. 그리고 의료기술로 생명 연장하는 그런 것 절대로 하지 말아 줘. 그냥 자연사로 죽게 해 줘." 이렇게 말하는 나에게 딸은 "왜 그런 소리를 해? 엄마도 할머니에게 그렇게 할 거야?" 하며 질색하지만 우리 나이가 바로 부모님은 모셔야 하고, 자식에게는 짐이 되지 않으려 하는 마지막 세대라고 하니…….

이 나이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이른 것 같지만, 엄마나 나나 죽을 때까지 정신줄 놓지 않고 '나'로 살다가 평화롭게 갔으면, 하고 진정 바란다.

김미경 (베로니카,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어떤 아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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