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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영성
이제민 신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믿음마산교구 사제연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믿음' 강의 전문
이제민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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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9.24  1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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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http://www.sspx.org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년을 바라보는 최근에 제3차 공의회를 요구하는 신학자가 많아졌다. 이 요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기 무섭게 한스 큉 등에 의해서도 제창되었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세상을 향하여 문을 여는데 충분하지 못하다고 본 때문이다. 50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제3차 바티칸 공의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그 때 그 요구의 연장선상에서이기도 하지만(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뛰어넘는 공의회에 대한 열망) 시대가 많이 변했으니 그에 걸맞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충분히 반영하고 발전시킨 공의회가 필요하다는 뜻에서이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제3차 공의회의 필요성에 대한 논란보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교회의 쇄신을 위해 우리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성찰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우선적으로 권하고 싶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변화한 시대에 복음의 의미를 깨우치고 믿음을 올바로 찾아 주고자 하였다. 공의회는 교회가 복음을 잘 소화하지 못한 지난 역사를 뒤돌아보며 세상에 또 다른 문화와 종교에 대해 죄를 많이 지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교회의 쇄신을 강조하였다.

교회의 쇄신은 복음으로 돌아가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기 쇄신 없이 사회를 향하여 외치는 소리는 공허하여 힘을 잃을 수 있다. 공의회의 이런 입장에서 우리는 종전의 공의회와는 달리 세상을 사목적으로 대하고자 하는 모습을 본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 공의회를 사목 공의회라 불렀다.(제3차 공의회를 요구하는 신학자 역시 복음으로 돌아가 올바른 믿음을 심어주는 것을 시대의 사명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얼마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소화하고 있는가, 얼마나 예수님의 복음을 깨치고 있는가, 사목적인지 자문하고 반성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012년 10월 11일부터 2013년 11월 24일까지를 ‘믿음의 해(신앙의 해)’로 선포한 것도 “공의회의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돕고 ... 교회의 쇄신에 더욱 큰 힘”(바오로 6세, 신앙의 문 5)이 되어 우리를 복음의 정신으로 안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교황이 2013년을 ‘믿음의 해’로 선포한 것에 유념하게 된다. ‘믿음’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가, 믿음에 위기를 느낀 것인가? 지금까지의 믿음과는 ‘다른’ 믿음을 선포하기 위함인가?

교황은 믿음과 함께 새 복음화를 강조했다.(신앙의 문 7) 새 복음화로 교황은 예수님께서 전개한 복음화와는 다른 복음화 운동을 펼치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달라진 시대가 새 복음화를 요구한다는 말인가?

같은 믿음, 같은 복음인데도 ‘새’ 복음화를 외친다면 복음을 외치는 우리들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말로써, 믿음의 위기는 복음만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복음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셨는데 우리는 이 요구를 충실히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새 복음화는 예수님의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호소로 알아들을 수 있다.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등을 돌릴 뿐 아니라 종교의 종말을 논하는 현상까지 생기게 된 원인은 복음화와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맹신과 광신의 늪에 빠져 자신을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상황을 직시하고 교회의 쇄신을 외치면서 교회가 예수님의 복음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과 믿음을 살펴보고 새 복음화에 대해 이야기하게 한 시대의 상황과 이에 대한 교회의 대응과 우리의 신앙과 사목 현실을 성찰해 본다.

1. 복음에 대한 믿음

사실 ‘새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복음화는 예수님의 복음을 모르고서는 펼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아는가? 미사를 마치면서 사제가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면 신자들은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한다. 무엇을 전하겠다는 것이며 무엇에 감사하다는 것인가?

그분은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다. 복음을 믿으라는 것인데, 이는 복음이 믿음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천지의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여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여도, 우리가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여도, 그 고백이 복음에 근거하지 못하다면 우리의 신앙은 맹신과 광신이 될 수 있고 우상 숭배와 다를 바 없을 수도 있다.

교황이 강조하는 새 복음화란 새로운 복음을 선포하거나 새로운 전술을 동원한 새로운 방식의 복음 선포가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에 근거하여 복음 운동을 전개하지 못한 우리(교회)의 복음 이해와 믿음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가. 복음

1.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뜻이 ‘기쁜 소식’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 내용은 막연하게만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믿음도 추상적이다. 복음은 기쁜 소식, ‘인생을 기쁘게 사는 비결’이다. 예수님에 의하면 복음의 핵심은 신의 현존이다.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하느님의 현존(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을 믿고 거기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인류에게 알리고자 하셨다.

신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당신의 생명, 당신의 전부)을 인간에게 전달하셨다. 하느님은 인류의 시초부터 구원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면서 인간을 당신 자신의 신적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르셨다. 따라서 인간(세상)은 하느님(의 전부, 생명)이 전달된 존재이며,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존재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자녀이다.

2.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분의 다스림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살아야 한다. 세상의 평화는 (나의 힘이 아니라) 그분의 다스림에 자신을 맡기는데서 주어진다. 기쁘게 세상을 살고 싶은가? 그 비결은 간단하다. 하느님의 현존을 믿고 그분께 자기 자신(너의 전부)을 온전히 맡겨라.

3. 복음은 사랑으로 표현된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생로병사가 펼쳐지는 이 세상에 전달하셨다는 것은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말한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은 하느님의 자기희생이며, 하느님의 자기희생은 곧 하느님의 자비(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이다. 자기희생 없이는 (보잘 것 없는) 세상에 당신 자신을 전달하실 수 없다. (십자가의 희생은 하느님의 자기희생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의 전부가 전달된 인간의 마음속에 깊숙이 새겨져 있다.

나. 복음과 회개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신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이아’는 기존의 사고(노이아)를 뛰어넘는(메타) 것이다. 예수님이 회개를 요구하신다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은 너무도 엄청난 계시 진리여서 우리의 사고를 바꾸지 않고서는, 즉 기존의 사고를 뛰어넘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런 사고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 수 없다고 본 때문이리라.

사고를 바꾸지 않고서는 복음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은 그분이 복음을 선포하면서 사용하신 술어에 잘 나타난다.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천국을 ‘가는’ 나라, 이 세상을 떠나야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천국을 ‘오는 나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가는 나라’라는 기존 사고를 뛰어넘어야 한다.

기존 사고의 틀을 깨지 못하는 한, 우리가 받아들인(선포하는) 복음은 예수님의 복음이 아닐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천국은 예수님의 천국이 아니고, 우리가 말하는 하느님은 예수님의 하느님이 아니며, 우리가 말하는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과 다르고,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예수님이신 그리스도와 다를 수 있다. 우리의 상투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과는 동떨어진 것일 수 있다. 일찍이 K. 라너는 이를 직시하여 말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느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복음은 사고를 깨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 없지만 또 인간의 사고를 깨기 위하여 있다. 그런 면에서 복음화는 사고를 변화시키고 깨는 운동이다. 사고의 틀을 깨야 사람들(세상)을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집,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날 수 있고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는 삶을 살 수 있다. 기쁨의 비결, 인생을 기쁘게 사는 비결의 첫 단추는 사고를 깨는 데서 시작한다. 그런데 사고를 깨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에 예수님은 믿음을 요구하신다. “복음을 믿어라.” 사고를 바꾸기 위하여 우리는 복음에 대한 믿음을 몸에 익혀야 한다. 믿음이 기쁨(복음)에 이르는 근본이다.

다. 복음과 믿음

1.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요구하신데 이어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 안에 이미 와 있음을, 생로병사 희로애락이 펼쳐지는 이 세상이 그대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알린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 바깥 어딘가에 하느님 나라가 따로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 안에 와 있음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복음을 믿으라고 하신 것은 도저히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세상 안에서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시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이 인생을 기쁘게 살게 해준다.

모든 존재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도, 가난하고 무지하고 무능한 자들도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해주는, 우리를 기쁘게 하는, 우리 인생의 의미를 찾아주는 존재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이념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민족과 종교와 문화가 다른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때, 그들을 하느님 대하듯 대하며 살 때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맛보고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임이 없이는 인생을 기쁘게(의미 있게) 살 수 없다. 그들은(우리는) 하느님은 아니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이다.

행복하기 위해 우리는 현존하는 하느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멸하고 죽을 이 인생이 불사불멸의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죽은 다음 저 세상에 다시 살아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0.58)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앙을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이라고 표현한다. 계시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며, 계시를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 당신 생명, 당신의 전부를 세상에 전달(계시)하신 것을 믿는 것이다. 복음을 믿는 사람은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응답하며 그분께 자기 자신을 맡긴다. 하느님의 희생적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신앙이다. 믿음은 자기를 전달하시는 하느님을 사랑으로 체험하게 하고 또 하느님이 전달된 피조물을 사랑으로 체험하게 한다. 믿음은 사랑의 행위이고 믿는 자는 사랑한다.

라. 복음과 복음화

1. 복음화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하느님의 전부가 전달된 세상을 하느님 나라이듯 대하고,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을 하느님이듯 대하는 운동이다. 죄인 성인, 유대인 이방인, 여자 남자, 부자 빈자 따지지 않고, - 현대의 개념으로 - 종교와 문화와 피부색을 따지지 않고 모두를 하느님의 자녀로, 하느님의 모상으로 대하는 운동이다. 온 세상(인간)만물에서 하느님을 보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끼는 운동이다. 복음화는 세상을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로 보지 못하는 우리의 눈을 치유하며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게 하는 운동이고, 드디어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세상을 사랑하는 운동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아픈 사람, 건강한 사람, 세리, 죄인, 유다인, 이방인 가리지 않고 만나셨다. 예수님에게 이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는 ‘복음’ 자체였다. 복음이신 그분이 세상(인간)을 복음으로 만나셨다. 이로써 그분은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복음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당신의 몸으로 보여주셨다. 복음화의 목적은 자신을 복음으로 만나면서 세상을 복음으로 만나는 것이다.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고린9,16)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을 기억하면서 인간을 “그리스도와 결합시켜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에 이르기까지 자라나게” 하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라고 말한다. 교회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 또는 민족들의 고유 의례와 문화에 심어져 있는 좋은 것은 무엇이든 없어지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과 악마의 패배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치유되고 승화되며 완성하게 한다. ... 온 세상이 모두 하느님의 백성, 주님의 몸, 성령의 궁전으로 만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주의 창조주이신 성부께 온갖 영예와 영광을 드린다.”(교회 헌장, 17항)

3. 교회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가 복음에 근거하여 올바로 신앙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복음에 기인하여 신앙하지 못할 때 교회는 맹신과 광신의 집단이 될 수 있다. 바른 믿음을 일깨우고 인간과 세상을 복음화 하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다.

마. 새 복음화

1. 교회가 새 복음화를 이야기한다면 예수님의 복음으로 돌아가 거기서 새로 시작하자는 말도 된다. 사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복음의 내용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저 상투적으로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복음화 운동도 세력 확장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당장 눈앞에 나타난 주일미사 참례자가 줄고 신앙의 물음(신, 천국, 창조, 부활 등)에 무관심한 자가 늘어나는 현상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이렇게 가다가는 얼마 되지 않아 교회는 텅 빌 것이 아닌가?” 하고 우려하면서 냉담자를 다시 교회로 불러들이고, 예비신자를 새로 모아들이고, 개종을 권면하는 일을 복음화로 여긴다. 빈 교회를 메우는 것을 복음화의 주요 관건으로 여기는 가운데 자기 복음화는 잊고 다른 사고, 다른 문화, 다른 종교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외면하게 된다. 새 복음화가 단순히 숫자 놀음에 기인하여 펼쳐질 때, 예수님께서 주창하신 복음화 운동은 외로운 길을 걷고, 교회의 위기는 지속될 것이다. 교회가 맹신자로 가득 채워진 것이 텅 빈 교회보다 더 위기다.

교회를 떠나는 이들을 믿음이 없다, 냉담자다 하며 애처로운 눈초리로 바라보기 전에 나는 올바로 믿고 있는가, 먼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나는 무엇을 생각을 하는지,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그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믿음이 복음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예수님은 이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왜 믿음과 회개를 요구하셨는지, 물어야 한다. 이 물음을 일반 신자들에게 강요할 수 없다 하더라도 교회와 성직자들은 이들을 대신하여 마리아처럼 곰곰이 생각하며 성찰하고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를 멀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답을 얻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올바로 신앙을 찾았다면 그들은 신앙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신앙(교회) 거부가 아니라 우리의 맹신이 사실은 교회를 더한 위기로 몰아간다. 그들에게 답변을 주지 못하면서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맹신이나 광신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어떤 면에서 그들이 신앙에 더 정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신앙거부는 바로 맹신의 거부를 의미하며 그러기에 신앙의 근원을 찾는데서 나온 것이다.

시몬느 베이유는 미사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는 그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지 못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 하여 그는 세례 받기를 거부하였다.

새 복음화는 사람들을 다시 교회 안으로 불러들이기 위하여 새로운 전술이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정도로 펼쳐져서는 안 된다. 세속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다시 하느님 사랑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 새 복음화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놀랐듯이 우리는 현대인이 예수님의 복음에 놀라움을 가지게 해야 한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하며 서로 물어보게 하는 것이 새 복음화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도 정작 우리는 그분의 복음에 놀라지 않는다. 우리의 사고가 그만큼 굳은 것이다.

2.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복음 이해

가. 교회의 위기와 쇄신

1. 교회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는 현대에 와서 비로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이는 교회의 처음부터 있어온 현상이다. 복음과 믿음에 대한 오해(광신, 맹신)는 인간의 이성이 깨기 시작한 19세기에 극에 달했다. 합리주의(계시에 대한 오해와 인간 이성 강조)와 신앙주의(계시에 대한 오해와 인간 이성 불신)의 두 경향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전통주의와 근대주의가 생겨났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년 12월-1870년 9월)는 이런 오류들에 대응하여 신앙과 이성의 상호 관계를 밝히고자 했다. 하지만 신앙과 이성, 신앙과 과학 사이에 그 어떤 모순도 갈등도 있을 수 없다고 천명하면서도 교의의 틀 속에서 근본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교회의 문턱은 여전히 높았고 그 안에서 자기중심적인 믿음에 갇히기도 했다. 시대에 길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2. 교황 요한 23세는 이런 시대적 상황을 직시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공의회는 근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사고로는 복음의 원천에 도달할 수 없으며, 복음의 원천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복음화 하는 사명을 완수할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하였다.

공의회는 계시헌장에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이해를 받아들여 계시를 하느님의 자기 전달로(계시 헌장, 2), 신앙을 인간이 자신의 전 인격을 걸고 하느님의 자기 전달에 응답하는 자유로운 행위(계시 헌장, 5)로 진술하였다.

공의회는 교회가 회개하고 교회가 쇄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근거를 계시와 계시에 대한 믿음에서 찾았다. “거룩한 교회의 신비는 그 창립에서 드러난다. 주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하시며 ... 당신 교회를 시작하셨다.”(교회 헌장, 5) 공의회는 계시와 계시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상의 복음화를 외치면서 세상만을 변화시키려고 한 교회의 태도를 반성하면서 교회가 먼저, 아니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고 강조하였다. 세상을 사목적으로 대하게 된 것이다.

나. 무신론 문제(맹신과 광신으로 빚어진)

1. 무신론자는 신을 부정하는 자, 또는 신을 믿지 않는 자이다. 그러나 현상학적으로 볼 때 무신론은 ‘없는 신’, ‘광신자와 맹신자의 신’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나타났고, 그 과정에서 진짜 신까지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알았다면, 교회가 예수님의 복음에 근거하여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신앙하고, 회개의 삶을 살았다면 이런 현상은 피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들이 이런 오류에 빠진 데에는 광신과 맹신을 부추기거나 방관한 교회의 책임도 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무신론자뿐만 아니라 교회까지를 이 오류에서 구하고자 했다.

공의회는 사목헌장 19항에서 “인간은 날 때부터 하느님과 더불어 대화하도록 초대 받는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지탱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하느님의 이 사랑을 자유로이 인정하며 자신을 창조주께 맡겨드리지 않고서는 인간이 진리를 따라 산다고는 할 수 없다.”며 무신론을 근원적으로 부정한다. “교회는 신 긍정이 인간 존엄성에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인간의 존엄성은 하느님 안에 기초를 두었고 그분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 하느님께 기초를 두지 않고 영생에 대한 희망이 없게 되면 오늘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존엄성은 심한 상처를 받을 것이며 생명과 죽음, 죄와 고통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아 절망에 빠지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21항)

2. 공의회는 무신론자가 나타나는 이유로 “하느님과의 깊은 생명의 결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 만사를 과학적 이론만으로 설명하거나 인간을 지나치게 예찬하는 것 등을 든다. 그 밖에 “제멋대로 상상해서 신을 그려놓고 그 신을 부정"하는 경우, 신에 관한 문제를 전혀 취급하지 않는 경우, 세상 죄악에 대한 격심한 반발, 인간적 가치의 신격화, 지상 사물에 대한 열중, 종교적 불안을 체험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경우도 있다.

공의회는 무신론이 발생한 원인을 무신론자들에게서만 찾지 않고, 하느님의 믿음에 불신을 일으키게 한 교회에도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다.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거나 교리를 잘못 제시하거나 종교, 윤리, 사회생활에서 결점을 드러내어 하느님과 종교의 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 버리는” 신앙인들에게도 무신론 발생의 책임이 있다. (19항)

3. 공의회는 무신론을 사목적으로 대한다. “교회는 신 부정의 숨은 이유를 무신론자들의 마음속에서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또 교회는 무신론이 일으키는 문제들의 중요성을 의식하며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에 이끌려 이런 문제들을 진지하게 또 깊이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21항)

공의회는 무신론은 복음의 실천을 통해 극복될 수 있음을 천명한다.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 주기 위하여 가장 요긴한 것은 신자들의 형제적 사랑이다. 즉 복음의 신앙을 펴기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협력하며 자신들을 일치의 상징으로 드러내는 형제적 사랑이다.” “교회는 비록 무신론을 절대적으로 배격하지만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바로 건설하는 데에 함께 노력해야 함을 진심으로 선언하는 바이다. 이 일은 물론 성실하고 현명한 대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21항)

3. 현 교회 진단과 방향제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지 거의 반세기가 되도록 공의회의 정신이 아직 우리 교회의 마음속으로 깊이 스며들지 못하고 있다. 그 현상을 몇 가지 열거하면서 제2차 공의회에 따라 교회의 방향을 제시해본다.

가. 배타적 신앙 - 다름의 존중

1. 공의회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계시(복음)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는데 충실하지 못했음을 반성한다. 우리는 이에 충실한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인간의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는 서로에 대한 존경을 찾아주셨다.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다름을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실 뿐만 아니라 타자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아야 함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보여주셨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리스도인 이방인 따지지 않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열지 않을 수 없다. 사목 헌장은 이에 근거하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존경하고(사목 헌장, 27) 그렇게 반대자도 존경하라고 가르친다(사목 헌장, 28항).

2. 공의회는 인류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이런 믿음, 이런 평화를 바로잡고자 했다. 종교가 말하는 인류에 대한 사랑이 진실이라면 자기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이들까지, 문화와 경전이 다른 사람들까지 형제자매로 대하며 그들의 마음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복음을 깨닫기 위해서는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하고 이를 위해 자기와 달리 생각하는 낯선 이들도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집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언어와 다른 문화, 다른 종교에서도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문화는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며, 공동선의 한계 내에서 개인의 권리와 개별 단체나 일반 사회의 권리를 보장하는 한, 일종의 불가침의 권리를 향유하게 된다.”(사목 헌장, 59. 참조 58)

3. 복음화는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가운데 펼쳐져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다른 문화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본다. 세상의 복음화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문화와 가르침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며 그 하느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유일하게 하느님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하느님은 이스라엘만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고가 얼마나 해로운 지를 당신의 복음을 통하여 일깨워 주셨다. 하느님은 한 개인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하느님이시다. 아담의 이야기는 유대인만의 조상이 아니라 온 인류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창조물이고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백성이며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나. 종교간 대화 - 개종

1.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이며 하느님의 자녀다. 자기에게 상처를 준 이를 위해 기도하라.”고 설교하면서도 정작 자기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끼리만 형제자매라 부르고 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이방인 또는 외인으로, 그리하여 개종시킬 대상으로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자기 종교에 속해야만 인류애를 실천할 수 있는 것처럼 외치는데 익숙했다. 천주교 신자는 천주교 신자가 되어야만 인류를 사랑할 수 있고 개신교 신자는 개신교 신자가 되어야만 인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그룹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인류애에 대한 이야기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들은 인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대하기도 한다. 자기만이 인류애를 실천할 수 있다거나 우리에게는 구원이 보장되었지만 너희에게는 구원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는 말이다.

자기 공동체 안에서 설교한 인류애가 진심이라면 마땅히 다른 문화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도 하느님의 모상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불교도도 무슬림도 무당도 무신론자도. 그런데 우리는 자기와 달리 생각하는 사람을 자기처럼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사랑하려 하는 것은 아닌가?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것을 자기 종교를 상대화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2. 공의회는 ‘비 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A)에서 다른 종교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밝힌다. “인간과 인간, 민족과 민족 사이의 일치와 사랑을 도모해야 할 사명감을 느끼며” 공의회는 여러 민족들은 단 하나의 기원을 이루고 있다고 선언한다.(NA 1) 나아가 모든 종교가 각자 나름대로 진리를 추구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의 생활에 배어 있는 종교적 심성을 이해하고자 한다. 힌두교, 불교, 이슬람 등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종교들도 교리와 생활규범과 성스러운 예식 등을 가르치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마음이 느끼는 불안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그 길을 제시한다.”(NA 2)고 말한다.

그리고 선언한다. “가톨릭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더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내지 윤리적 선과 사회적 내지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시키기를 모든 자녀들에게 권하는 바이다.”(NA 2)

그리고 이 선언을 끝맺으며 보편적 사랑을 외친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형제로 대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감히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 교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온갖 차별과, 혈통이나 피부색이나 사회적 조건이나 종교적 차별의 이유로써 생겨난 모든 박해를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알아 배격하는 바이다.”(NA 5)

3. 지난 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종은 구원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굴복시키고 개종시키려고 하였다. 다른 문화를 존중한다면 남의 개종을 요구할 수 없다. 인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하는 것은 꽃을 이야기하면서 모든 꽃이 장미가 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나도 다른 종교로 개종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라야 개종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개종은 폭력이요 사기다. 불행히도 개종 권면이라는 말을 우리는 당연한 듯 사용하는 실정이다. 복음화도 양적으로만 이야기되고 있는 한 다른 문화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

다. 개인의 구원 - 세상 역사의 구원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계시에 대한 믿음에 충실하였다. 인간 개인의 소망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의지에 대한 믿음이다. 인간은 자기의 소망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를 넘어 하느님의 다스림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자기 존재를 맡긴다면 모든 사람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이로써 공의회는 사회의 관심사를 교회의 관심사로 받아들이게 해 주었다. 사목을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함께 인류 구원에 봉사하는 것으로 폭넓게 이해하게 해주었다. 자기 종교 영역 밖의 낯선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행복과 그들의 구원, 그렇게 사회 전체의 평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했으며, 그것이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신앙임을 고백하게 했다. 교회는 자기 구원과 자기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개인들이 모인 이기적인 집단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2. 그리스도교는 그 처음부터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구원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개인의 구원을 넘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투신하도록 하고 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같은 위대한 성경의 신앙인들은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였다.

예수님은 인류의 행복,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소금처럼 녹이셨고, 빵처럼 소화되어 사라지게 하셨다.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인류의 구원 행복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양으로 바치셨다.(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그분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당신의 행복)을 십자가의 제물로 내놓으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인류의 부활을 위한 것이다. 그분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도 그분처럼 우리의 삶(우리의 행복)을 온 인류의 부활을 위해 희생 제물로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3.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온 인류를 창조하시고 온 인류를 사랑하시는 보편적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자기만의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의 집단이라는 인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배타적인 종교라는 혐의를 받기에 충분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바친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그분처럼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희생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기 개인의 행복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열중했다. 십자가에 죽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가 진 십자가를 내려놓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렇게 그분이 자기의 행복(구원)을 위하여 존재해주기를 바랐다. 자기만의 행복을 위하여 바치는 이기적인 기도를 ‘열심’과 ‘신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였다. 교회를 이기적인 믿음을 발하는 이들의 집단으로 의심받게 하면서 그분의 십자가에 심취할수록 교회는 사회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교회는 창설자의 가르침에 따라 남을 위하여 자기를 버린 그리스도, 사랑을 위하여 자기를 비우신 하느님의 신비로 인류를 안내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공의회는 그 사명에 충실하지 못했던 과거를 반성하며 복음이 교회의 원천이며 뿌리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리스도교는 개인의 구원을 넘어 온 인류의 구원을 바라고, 개인의 행복을 넘어 전체 인류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리스도교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집단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강조하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4. 이기적인 믿음과 함께 시대풍조를 따라 교회 안에도 돈과 권력과 명예와 인기 그리고 인간의 기술이 행복을 보장한다는 그릇된 믿음도 팽배해졌다. 부자 되게 해 달라,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해 달라는 등의 기도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바치는 데 익숙해졌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재물과 힘을 약속하고 보장하는 분이었다. 복음을 믿는다면서 기쁨을 하느님의 현존에서 찾지 않고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소유하는데서 찾고자 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면서 천국을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채우며 부와 권력의 노예가 되었다.

세상의 행복과 평화는 돈과 힘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종교인의 외침은 재물과 권력으로 무장한 정치인이 국민에게 약속하는 행복과 평화와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돈과 힘을 포기하라.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는 말을 마음으로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인류는 지금 이 말의 뜻을 깨닫고 싶어 한다. 인류는 위대한 영성을 그리워한다. 우리가 종교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종교는 인간의 존엄함을 가르친다. 인간은 자기의 노력으로 차지한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위보다 귀하며, 이것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가르친다.

라. 나누는 사회

1. 부와 권력의 노예가 되지 말고 나눔을 실천하라는 종교의 가르침은 힘을 지향하고 부와 명예와 권력을 쫓는 현대인에게 뜬구름 잡는 망상처럼 들릴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공의회는 복음에 대해 용기를 가지고 이야기하도록 했다. 사회가 수천 년을 두고 이어져 오는 것은 소위 힘 있는 자들의 능력이나, 고도로 발전한 과학 기술 때문이 아니라 복음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서로 나누고 배려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눔이 없는 종교적 신심은 공허한 것이다. 4세기의 탈무드 교사 라바에 따르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다음 세상에 이르면 ‘너는 장사를 하면서 정직하게 거래하였느냐?’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삶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도 질문을 받는다.(조너선 색스, <차이의 존중>, 2007, 156쪽)

교회는 약한 자와 빈곤한 자의 편에 서 있는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축복을 나누어 주는가? 높은 자리에 오르고 부자가 된 것을 자기의 능력 때문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은 그만큼 자기 본성이 파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일등과 최고의 자리를 추구하는 사회의 비극은 인간의 능력을 자랑하는 데서 시작한다. 일등, 일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쪼개어 나누고 희생하는 삶이 존경받는 사회, 다른 이들의 희생을 딛고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다른 이들을 가난하게 만들며 부자가 된 자가 아니라 나를 희생시켜 남을 살게 하는 사람이 존중 받는 사회, 그런 사회의 건설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내용이다.

마. 과학과 기술

1. 나는 금년 초 원불교로부터 “종교의 종말이 오는가?” 하는 주제로 강의를 부탁 받은 적이 있다. 종교가 종말을 고하면 그 다음에는 무슨 시대가 올까? 과학의 시대가 올까? 이 질문에 나는 “우리가 언제 한번 종교시대를 산 적이 있는가?” 라고 되물었다. 종교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의 이성과 과학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원천에 충실한 믿음을 보이지 못하는 종교에 대한 실망에서 나온 것이다. 종교 종말은 오지 않는다. 하느님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결코 과거의 유물이 될 수 없다. 종교의 종말은 곧 인간성의 상실이고 희망과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과 경제가 신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

2. 인간은 자기의 힘과 기술을 믿게 되면서 하느님마저 지배하려 들지만 그 결과는 인간의 분열이다. 바벨탑의 이야기(창세 11,1-9)가 이 상황을 잘 설명해준다. 바벨탑 이야기는 인류가 다양한 언어와 문화, 국가, 문명으로 나뉘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이는 우리의 존재(우리의 행복과 세상의 평화)를 물질과 힘, 기술과 과학에 맡겼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에 대해 조너선 색스가 적절히 설명한다. “신아르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을 익혔다. 그들은 진흙을 말려 벽돌을 굽는 법을 배웠다. 하나둘씩 기술을 익혀가면서 그들은 자기들이 그들과 맞먹는 힘을 가졌다고 결론 내렸다. 그들은 더 이상 자연에 굴복하지 않았고 자연의 주인이 되었다. 그들은 하늘까지 침범할 것이고 그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환경은 우주의 구조를 모사한 것이겠지만, 결국 하느님을 지배하지는 못할 것이다.”(조너선 색스, <차이의 존중>, 2007, 96쪽) 과학 기술을 촉진하여 자연을 정복하고 부를 극대화하는 경제 논리로 인간에게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는 기대는 이미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다.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과학 기술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그 문제점을 지적한다. “한때 초인간적인 힘에 의존하던 많은 혜택을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사목 헌장, 33)고 하지만 여기에는 “인간 활동의 의의와 가치는 무엇인가?”(사목 헌장, 33) 하는 물음도 던지게 한다. 공의회는 “보다 나은 정의와 보다 넓은 형제애와 보다 인간다운 사회관계의 질서를 확립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기술의 발전보다 훨씬 값진 것”(사목 헌장, 35)이라고 강조한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 향상에 물질적 바탕은 마련할 수 있지만 그 힘만으로 인간 향상을 실현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더 인간다운 세상을 이룩하도록 모든 사람과 협력하여야 할 임무의 중요성”(사목 헌장, 57)을 감소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반대로 인간의 노동이나 기술이 “시간의 한 처음에 드러난 하느님의 계획, 곧 땅의 지배와 창조의 완성이라는 계획을 실천하고 또 자기 자신을 완성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을 바쳐 형제들을 섬기라는 그리스도의 큰 계명”(사목 헌장, 57)을 어기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공의회는 과학 기술 만능에 대한 위험성도 경고하며(사목 헌장, 57) 경제와 과학 기술로 인하여 잃었던 종교의 자리를 다시 찾아 주고자 하였다. 공의회는 다시 종교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인류의 마음과 희망을 예언적으로 감지했다.(사목 헌장, 57) 동시에 지금껏 교회가 인류의 이 열망에 답을 주는데 충실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세속의 방법대로 돈과 권력으로 무장하고 있었음을 뒤돌아보며 반성하게 했다. 공의회는 정치와 경제, 인간의 기술 발전을 부정하지 않지만 이것들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으며, 신앙의 목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일깨우며 올바른 신앙을 찾게 해주었다.

맺는 말

베네딕트 교황 16세가 내년을 신앙의 해로 선포한다면 그리스도인을 신앙의 원천인 예수님의 복음으로 이끌기 위한 사목적 배려에서이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도, 공의회의 쇄신 운동에도 우리는 여전히 계시에 응답을 하지 못하고,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전보다 더 보수적이고 더 근본적인 경향을 보이며 신앙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복음에 대해서 또 복음에 대한 믿음과 회개에 대해서 이야기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시대사조에 따라 흘러갈 것이 아니라 세상의 속됨을 거슬러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어야 한다.”(발터 니그, <회심자들>, 1986, 143-144쪽) 교회가 시대풍조에 편승하여 이리 저리 흔들릴 때, 교회가 세속화의 물결에 휩쓸릴 때, 교회가 세상이 구하는 것을 구하려 할 때, 교회가 복음화 되지 못할 때, 복음화에 대한 소리가 아무리 크다 해도 세상이 복음화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교회가 먼저 복음화되어야 한다.

2. 교회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하는 물으며 우리 교구의 동료 성직자들과 함께 우리들 자신의 복음화를 위하여 고민을 나누고 싶다. 믿음의 위기는 성직자들이 신자들을 교육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성직자들이 먼저 복음화 되는 것을 통해 극복될 것이다.

- 공의회는 교회가 사목의 교회로 거듭날 것을 촉구하였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성직자들에게 요구된다. 성직자는 사목적이어야 한다. 사목은 본당 안에서 신자들을 관리하도록 사제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성직자와 평신도가 함께(공동으로) 본당 안팎의 모든 인류에게 봉사하는 일이다.

성직자는 사목자로서 사회의 관심사(정치, 경제, 농어촌, 여성, 청소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이 일은 성직자 혼자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공의회는 이 문제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지 않고 이런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사회로 교회가 향하도록 했다.(ecclesia ad extra) 성직자는 평신도와 사회를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이 일을 하는 것이 사목이다.

사목의 특성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새벽녘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 잘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묻고는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15-19) 이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하시는 바람에 베드로는 몹시 당황하였지만 그 때문에 베드로의 기도 완전히 꺾이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그야말로 늙은이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지고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을 때 인간은 부활의 기쁨을 살 수 있고 또 나눌 수 있다. 힘과 그에 바탕을 둔 통솔이 아니라 겸손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목자가 갖추어야 할 덕이다. 힘이 아니라 사랑이 세상을 구원한다.

- 지역 사목협의회나 본당 사목회의에서 성직자들은 본당회장이나 평신도 대표들의 견해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본당 사목회가 본당 신부의 ‘사목방침’을 실천하는 기구 정도가 되고 본당 회장이 본당신부의 비위를 맞추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본당 신부가 바뀔 때마다 신자들이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 성직자가 사목자가 되기 위해 성직자는 ‘성직자 중심’과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직자 중심주의는 성직자만이 탈피할 수 있다. 사제단이 평신도보다 한 단계 높은 그룹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사제단이 어느 평신도도 끼어 들 수 없는 자기네들끼리 똘똘 뭉친 단체로 보여서는 안 된다. 끼리끼리의 공동체는 우리 사제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업적을 자랑하지 않으며 묵묵히 자기를 희생하는 사제들이 있기에 교회가 지탱되고 빛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사제에게 접근하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신자들이 많다. 사제의 권위와 위치가 너무 높아서다. 권위주의를 탈피하는 것은 성직자의 과제이다. 우리는 신자들을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집으로, 하느님께 이르게 하는 문으로 대하고 있는가? 혹시나 우리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을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교회에 충실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버릇을 버려야 한다. 복음은 타자에게로의 개방을 요구하며 개방은 자기희생을 통해 나타난다. 사제들은 평신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권위주의 자세에서 벗어날 때 가능할 것이다.

- 때때로 나는 자신의 영명축일이나 은경축일에 ‘교회를 위하여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의 온 일생을 다 바쳤다고 말하는 것을 동료 사제들부터 듣는다. 나는 그들의 말을 믿는다. 하지만 평생 교회를 위하여 희생한 대가가 돈과 고급 승용차로 채워질 때는 슬픔을 느낀다.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대가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러 갈 때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 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하셨다.

나는 때때로 사제는 순명과 정결의 서약을 하였을 뿐 가난의 서약은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 말이 사제가 화려하게 살아도 좋다는 말로 확대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셨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그분은 가난하셨다. 사제가 가난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 존엄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랍비들은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소박한 장례식을 치러주어야 한다는 규칙을 두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축제일에도 부잣집 소녀들은 좋은 옷이 ‘없는 소녀들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도록’ 빌린 옷을 입어야 했다”(조너선 색스, <차이의 존중>, 2007, 203쪽)고 한다. 사제의 영명 축일은 본당의 수녀들의 영명축일 수준으로 하면 안 될까?

- 사제가 부임할 때 본당 회장이 모시러 가는 번거로움을 없애고 제 발로 부임지에 임한다면 신자들로부터 더욱 존경과 신뢰를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 세상의 복음화와 교회의 쇄신을 원한다면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외치는 성직자들의 의식이 먼저 깨어나야 한다. 한국의 경우 일반 신자들은 신학을 공부할 기회가 적고 성직자들처럼 교회 안에 머무는 시간도 적다. 그래서 성직자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높다. 교회와 성직자들은 이들을 대신하여 신앙하고 이들을 대신하여 성경을 읽고 이들을 대신하여 공부하며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대신’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다는 뜻에서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희생하셨으니 이제 우리는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분의 ‘대신 죽음’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내 생명을 ‘대신’ 살아 줄 수 없다. 그분의 ‘대신 죽음’ 앞에서 우리는 그분의 희생과 사랑을 느낀다. 그렇게 성직자는 평신도를 위해 대신 죽고 대신 신앙할 수 있어야 한다. 평신도들은 자기들을 대신하여 신앙하고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성직자들을 통해 믿음을 얻고 힘을 얻는다. 교회에 대한 불신은 어떤 면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위하여 대신 죽지 못하는 교회와 성직자들이 빚은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권위주의와 성직자 중심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 교회의 쇄신은 조그만 일부터 시작한다. 자기 쇄신을 위하여 키에르케고르가 한 말을 마음에 새겨 본다. “이 시대의 고약함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개혁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경망한 환상을 가진 그릇된 욕망이며 아무 희생과 헌신도 없이 개혁의 탈을 쓴 희롱이다. 진정한 개혁에는 비상한 정신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선적인 자기상실의 그릇된 인식은 교회를 혁신해야 한다는 분심으로 언제나 가득 차 있다. 정작 교회가 진정한 쇄신을 필요로 하는 이 시기이건만, 쇄신되기에는 너무도 부당한 실력을 지녔기에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발터 니그, <회심자들>, 1986, 143-144쪽)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령의 기도로 시작했다. 자기 할 말만 하느라고 세상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교회의 태도를 반성하면서 공의회를 시작한 것이다. 공의회는 복음화를 외치면서 세상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의 신조만을 강조한 교회의 자세를 반성하고자 하였다. 공의회 폐막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세상의 복음화를 외치면서도 여전히 자기 구원, 자기 행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

이제민 신부(마산교구 명레성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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