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앞 못 보는 장님이었다. 나이는 족히 일흔은 돼 보였다. 그는 내가 김포성당에 살던 1990년 당시 고촌면의 한 외딴 곳, 다 쓰러져가는 양철집 단칸방에 꼭 그만큼 늙고 꾀죄죄한 할멈과 단둘이 살고 있었다. 그가 거기 산지는 몇 년 되었지만 아무도 그가 영세한 신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중에 어찌어찌 그가 천주교신자이고 영성체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야 나는 봉성체하는 날, 환갑이 넘은 수녀님과 함께 그 집을 방문했던 것이다. 눈은 왜 못 보게 되었는지, 자녀는 있는지, 왜 두 내외만 이렇게 사는지 등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갈 때마다 조금씩 듣긴 했지만 지금은 거의 다 잊어버렸다.

그가 어쩌다 한번씩 소문 듣고 찾아오는 손님의 점을 봐주며 근근이 연명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봉성체를 서너 번 하고 난 다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십년이 넘게 성당에 못 갔다는 얘기만 했지 점 이야기는 입도 벙긋 안했을 뿐 아니라 나 역시 집 안팎에서 색다른 물건이나 부적 같은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농사도 없는데 뭘 먹고 사느냐고 자꾸 안쓰러워하니까 나중에야 마지못해 입을 연 것이다.

눈 못 뜨는 얼굴엔 죄송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는데 방 한 구석에서 건성으로 마른걸레질만 하고 있던 할멈은 이야기를 듣는지 마는지 꼭 돌부처 같았다.

“이런 짓하면 하느님한테 죄 받겠지요? 그래도 어떡합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뭐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할 수는 없고요.”

나는 흠칫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어떻게 배웠느냐는 내 물음에 그가 뭐라고 했는지는 생각이 안 난다.

“하루에 몇 명이나 옵니까? 한번 보는 데는 얼마씩이나 받으시고요?”
“한 명도 오고 두 명도 오고 그래요. 돈은 주는 대로 이천 원도 받고 삼천 원도 받고.”
“잘 맞는다고 하던가요?”
“내가 소경이라 성한 사람보다 더 용한 줄 알고 오는 사람이 있어요. 난 나쁜 얘긴 안하고 그저 좋은 얘기만 해요. 앞으로 잘 될 거라고.”

이럴 때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 즉각적인 결단이 요구되는 순간이었다.

“영감님, 제 말 잘 들으세요. 조금도 걱정 마시고 앞으로도 찾아오는 사람들 잘 봐주세요. 영감님은 죄 짓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도 다 이해하실 거예요. 돈 벌어서 방이라도 따뜻하게 하고 사셔야지요. 그리고 오늘은 저도 좀 봐주세요.”

내가 이래도 되나? 명색이 천주교 사제인데....

“에이, 무슨 말씀을요. 그래도 나는 하느님은 한번도 안 버렸어요.”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하느님도 영감님을 안 버리세요.”

이젠 아예 지당한 말씀이다. 내가 생각해도 참 멋진(?) 말을 했다.

집을 나왔는데 수녀님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 방에서는 영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꼭 다문 채 지켜만 보더니 따로 긴히 해야 할 이야기라도 있었나? 길가에서 한 10분은 기다렸을 게다. 그제야 사립문을 나서는 수녀님께 왜 이렇게 늦었냐고 물으니 정색을 하고 톤을 높여 내게 쏘아붙였다.

“도저히 그냥 나올 수가 없어서 제가 다시 자세히 가르쳐 드리고 왔어요. 신부님이 농담하신 거라고요. 그거 대죄 중의 대죄라고요. 그러니 신부님 말씀을 그대로 믿지 말고 다시는 점보지 말라고요. 그래야 영성체할 수 있다고 했어요. 신부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돼요. 그 영감 진짜 자기가 옳은 줄 알아요.”

순식간에 그와 나는 십계명 중 첫째계명을 거스른 대죄인이 되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다음 달에 다시 성체를 모시고 그 댁에 갔을 때 주인 내외는 어디론가 이사 가고 집은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은 그를 교적에서 아주 지워버리셨을까?

호인수 2008.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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