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 루카 9,23-26

오늘은 1984년 성인품에 오른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103위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우리가 그분들을 성인품에 올리고,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위한 일입니다. 순교하신 본인들에게 성인품이라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순교자들 중에도 제대로 조사가 되지 않아 성인으로 불리지 못하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감옥에서 옥사하신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신앙인이 되었기 때문에 생활 근거지에서 쫓겨나 일생 동안 타향을 전전하며, 갖은 고생을 다 하다 일생을 마친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신앙을 위해 고생하다 돌아가신 분들도 오늘 우리는 103위 성인들과 더불어 기억해야 합니다. 박해는 약 10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순교하신 분들만 1만 명을 넘습니다. 생활 근거지를 잃고, 죄인이라는 불명예를 감수하면서도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며 살다 일생을 마친 분들은 수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됩니다. 그분들 각자가 겪은 비극을 우리는 오늘 다 헤아릴 수 없지만, 그분들이 그런 고생을 하면서도 신앙을 지켰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당시 이씨조선 정부가 신앙인들에게 내린 공식 죄명은 조상제사를 거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무군무부(無君無父), 곧 임금도 모르고 아비도 모르는 패륜의 무리로 단정되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이 중국에서 행해지던 조상 제사를 미신(迷信)이라고 공포한 것이 한국의 초기 신앙인들이 조상제사를 거부하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중국에 진출하였던 유럽 수도회 소속 선교사들이 로마로 보낸 보고서가 교황청으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정에 대한 시비(是非)를 오늘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신앙 교육을 철저히 받지도 못하였지만, 그 시대 교회의 결정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들은 순교의 은총을 받아서 순교하신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고통당하고 죽어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느님이라는 결론에 이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자녀를 보살피고 키우는 아버지를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하고 사랑하시는 분이라서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조선 말기에 그리스도 신앙을 이 땅에 싹트게 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중국어로 된 <천주실의(天主實義)> 라는 책 한 권이었습니다. 유학자들 몇 사람이 그 책을 연구하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 신앙을 영입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 신앙은, 양반, 중인, 상인 등 그 시대 사회적 신분을 불문하고 전파되었습니다. 그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받아들이고 지켜 낸 이 신앙은 그들에게 과연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시대 조선은 유교를 국시(國是)로 한 국가였습니다. 충(忠)과 효(孝)를 절대적 실천원리로 삼은 왕국이었습니다. 신분계급이 중요하고, 상위 계급의 사람들이 실세로 행세하는 사회질서였습니다. 그 체제와 질서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임금을 정점으로 만들어진, 그 수직적 인간관계 질서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신앙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롭고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을 중심으로 한 질서보다, 하느님, 곧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질서를 더 소중히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그 시대 기득권자들의 말에 따르지 않고, 새로운 시선으로 사회를 보며, 새로운 말을 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 시대 기득권자들, 곧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질서를 가르쳤습니다. 자비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질서 안에 살아야 한다고 예수님은 믿으셨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에게 지키고 바쳐서 자기 소원을 이루는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예수님은 믿으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이 지키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날, 곧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분의 이런 믿음은 그 시대 이스라엘의 기득권층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그분은 십자가의 비극으로 생애를 마쳐야 했습니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만 하며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길들여져서 주인과 함께 사는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인간은 창조적 노력을 하며 자기 말을 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불편과 불행을 감수하면서도, 자기 말을 하며 삽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그에게 사물들의 이름을 지어 주는 권한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아담이 동물 하나하나에게 붙여 준 것이 그대로 그 동물의 이름이 되었다."(2,19). 사람이 말하는 대로 그 사물의 이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소신대로 말하면서 살도록 창조된 인간입니다. 그 반면에 바벨탑의 이야기(창세 11,1-9)는 사람들이 모두 한 가지 말을 하며 뭉쳐서 살겠다는 것을 하느님이 서로의 말을 통하지 않게 하여 흩으셨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강자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하며 강자에게 묻어서 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소신껏 자기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재물이나 지위를 얻어 잘 살기 위해 그 사회가 강요하는 바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서 소신껏 말하고 실천하면서, 인간은 인간다워지고 자유로워집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람이 재물과 지위와 권력을 얻어도,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으면,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순교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분들은 사회의 강요에도, 십자가에도, 굽히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배우고 실천하신 분들입니다. 재물도, 지위도, 생활 터전도, 자기 생명도 잃으면서까지 그분들은 하느님을 택하였습니다. 그들 안에 하느님은 살아 계셨고, 하느님은 예수님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듯이, 그들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신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들이 하느님에 대한 그분들의 신뢰와 말을 죽음의 경계를 넘으면서도 지켰기 때문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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