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얼마 전 나주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은 우리를 절망과 분노에 빠지게 만들었다. 피해 학생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긴 가해자 고 모 씨에 대한 언론보도를 접하면서 자칭타칭 인권활동가인 필자도 쉽게 울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토록 잔혹한 범죄들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이러한 범죄로부터 피해자들을 지켜 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죄스러운 마음도 든다.

참혹한 범죄를 저지른 이에게 엄격하고 합당한 법의 심판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에 다른 입장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최근 일부 유력 정치인들이 지난 15년간 사형 집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범죄들이 발생한 것인 양 근거 없는 주장들을 늘어놓으며 사형 집행의 재개를 요구하고 사형제도가 필요하다고 입장을 밝히는 것은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로서 적절치 못한 언행이었다.

여기에 화학적 거세를 넘어 물리적 거세를 가능하게 하는 법을 제정하겠다느니, 형량을 늘리겠다느니, 인권침해와 이중처벌 논란 속에 이미 폐지된 보호감호제도를 이름만 보호수용으로 바꾸어 부활시키겠다느니 하면서 오로지 통제와 형벌만을 강화하는 방침들을 쏟아 내고 있는 정치권 인사들과 정부의 대책은 2년 전 부산 초등학생 성폭행 살해사건이 났을 때와 똑같을 뿐이다.

이렇게 형벌을 강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참혹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점검하는 일이며, 피해자들을 위한 제도와 장치를 만드는 일이라는 주장들은 그냥 구색 맞추기로 지면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안전망에 대한 점검과 개선을 위한 대책도 없고, 피해자들의 사회 복귀와 안정된 삶을 위한 제도적 장치도 마련하지 못하면서 가장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형벌의 강화만을 주장하는 구시대적인 발상은 범죄의 사회적 책임을 망각한 무책임한 처사다.

또한, 자극적인 기사에만 혈안이 되어 사회적 갈등과 불안을 가중시키는 기사와 주장을 마구잡이로 보도하고 지나치게 상세한 개인정보를 노출시키면서 또 다른 피해를 양산하고 있는 언론들도 깊이 반성하고 진정한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사형제도를 폐지하자는 것은 단순히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관대하게 처벌하자는 것이 아니다. 폭력과 죽음의 악순환은 누군가가 먼저 멈추지 않는다면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사형제도의 폐지로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는 것이다." 사진은 2010년 10월 6일 국회에서 열린 '세계사형폐지의 날' 기념식에서 사형제 폐지를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활동가들 ⓒ정현진 기자

전세계 140여개국에서 사형제도가 사실상 폐지되었고, UN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에 걸친 연구 끝에 사형제도가 범죄 억지력이 없다는 것을 발표하며 전세계의 사형 폐지를 천명한 바 있다.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이고 내년 다시 한번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 진출을 꿈꾸고 있는 대한민국은 15년 동안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사실상 사형폐지국으로 사형 집행이 가장 많은 아시아에서 사형 폐지 운동을 이끌고 있다. 국제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막중한 책임과 의무 또한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헌법재판소가 지난 2010년 헌법재판관 9명 중 5명이 동의하여 사형제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합헌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관들도 사형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국회가 사형제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하였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두 개의 판결' 운운하며 다시 한 번 유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인혁당재건위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과거 독재정권 시절 공권력에 의해 조작된 사건으로 죄 없이 사형 당했던 우리의 역사를 보더라도, 오판의 가능성이 1%라도 있는 한 사형은 정당한 형벌이 될 수 없으며 사형 집행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문화와 비뚤어진 성문화를 바로잡기 위한 전국민적인 노력이 시작되어야 할 때다. 분노한 여론에 편승하여 마치 정의를 집행하는 양 사형 집행과 강한 형벌을 주장할 때가 아니란 얘기다. 지난해 77명이 희생된 참혹한 테러 앞에서 노르웨이 정부와 국민들이 분노를 삭이고 눈물을 닦아 내며 지켜 낸 생명과 평화의 가치, 관용과 화해의 정신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사형 집행과 형벌 강화는 길이 아니다

이러한 사건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처럼, 15년간 중단되었던 사형 집행 역시 절대로 재개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 19대 국회에서는 반드시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이러한 논란을 종식시켜야 한다.

또, 정부는 강한 형벌과 국민 통제 일변도의 정책을 포기하고 실효성 있는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한 진심 어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더불어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불심검문 확대, 주취자 처벌 강화, 보호감호 부활 등은 대책이 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사회안전망 구축과 함께 폭력과 범죄에 희생되고 피해 입은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고 노력해야 한다. 참혹한 범죄들의 발생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의견을 모아 연구하고 실행해 보아야 한다.

지난 15년간 사형 집행 재개의 위기 때마다 성숙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성을 가다듬고 냉정을 찾아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사형제도를 폐지하자는 것은 단순히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관대하게 처벌하자는 것이 아니다. 폭력과 죽음의 악순환은 누군가가 먼저 멈추지 않는다면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사형제도의 폐지로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는 것이다.

선의가 반드시 선의로 돌아올 수는 없지만, 악의는 반드시 악의로 돌아온다. 사형제도가 폐지된다고 참혹한 범죄들이 늘어날 리가 없다. 사형제도 폐지로 대한민국의 인권 수준이 한걸음 향상되면 국민의 인권의식과 인권감수성이 높아질 것이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러한 노력이 사회를 더 안전하고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가 우리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사형 폐지에 관한 의견서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유럽에서는 사형이 인간 존엄성 및 생명권에 대한 존중이라는 근본 가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배척하는 방향으로 법적 입장이 진화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화는 사형 폐지에 대한 대중의 지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사형에 찬성하는 유럽인들이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럽이든 다른 지역이든 사형 폐지는 근본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에 여론조사로 그 방향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사형은 범죄를 감소시키거나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하거나 정의를 구현하는 해법은 아닙니다. 사형 폐지는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근본 가치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김덕진 (대건안드레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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