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발전소 문제에 대한 신앙인의 성찰과 실천-2

양기석 신부 ⓒ정현진 기자
3. 불의를 꾸짖으시는 하느님

탈핵 사회로 가는 것은 마치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이 모세를 시켜 당신의 백성을 위험하고,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죽음의 땅 이집트에서 안전하고, 자유롭고 정의로운 생명의 땅인 가나안으로 이끄신 것과 같은 여정이다. 모세를 파라오에게 보내신 하느님은 그로 하여금 열 가지 표징을 드러내게 하셨다(탈출 12,29-36).

하느님이 아닌 물질을 가장 우선시 여기는 이들에 의해 추진되고 뿌리내려 온 행위들 중에 생명을 위협해 온 가장 큰 위험은 현 시대의 원자력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운전 과정에서 벌어지는 위험한 상황들로 인한 크고 작은 피해들, 이것은 마치 권력을 통해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위협하던 파라오가 초래한 크고 작은 재앙들과 같다.

파라오가 초래한 열 가지 재앙 중 가장 끔찍한 것이 맏아들과 뭇 생명 중 맏배의 생명을 거두어 가는 재앙이다. 절대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거대 자본인 핵산업계와 결탁한 부도덕하고 비민주적인 정부에 의해 추진된 원자력발전소의 사고는 바로 이 열 번째 재앙에 해당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후쿠시마 사태는 인류에게 던지는 최후의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첫 생명을 잃은 슬픔을 겪고 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파라오와 같이 되돌릴 수 없는 재앙을 통해, 고통을 당하는 후쿠시마는 앞으로 세계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는 징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성경에서의 하느님은 떠돌이 생활하던 부랑자들인 히브리인들, 노예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을 당당한 자유인으로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노예살이하던 이집트에서의 탈출이 하느님의 뜻을 관철시키는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희년의 법을 통해 종살이에 빠진 이를 자유롭게 하여 공동체로 되돌려 놓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항상 소외 당하고 배척 받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 주신 분이시다(마태 25장).

그런데 하느님의 마음을 그토록 안타깝게 했던 이웃들이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수많은 이유 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사연은 원전 사고 지역에 살던 이들에게 돌아오는 사회의 냉대와 외면이다. 체르노빌 사태 이후 그 일대 주민들은 '체르노빌레츠'라 불리며 어느 곳에서든 배척 당했다 한다. 이러한 일이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다. 피폭의 위험을 피해 도쿄 등지로 전학을 간 아이들을 이지메, 따돌리는 사회 분위기는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전가하고 있다. 이렇듯 원전 사고는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이웃들 간의 존중과 배려도 파괴하는 비인간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 "이 나라의 높으신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중요한 것이 우리 아이들의 목숨인가요, 아니면 돈인가요." 사진은 지난 8월 20일, 신고리 3 · 4호기 건설 현장 근처를 걷고 있는 '핵 없는 세상을 위한 범종교 생명평화 순례단'. ⓒ문양효숙 기자


4. 대안으로서의 생태민주주의와 삶의 전환

1) 생태민주주의

"이 나라의 높으신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중요한 것이 우리 아이들의 목숨인가요, 아니면 돈인가요." "장래의 꿈은 과학자가 되는 것이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건강하고 싶습니다." ('아이들 목숨보다 중요한게 원전인가요? 일 기성세대 울린 호소', 한국일보 2012년 1월 16일자 기사)

"전기는 도쿄 사람들을 위해 만들었는데, 왜 후쿠시마 사람들이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원전 사고 이후 밖에서는 전혀 뛰어놀 수가 없어요." "우리는 몇 살까지 살 수 있나요?" "우리도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나요?" "간 나오토 총리, 모든 원전을 즉시 멈춰 주세요." (2011. 8. 17, 후쿠시마 네트워크 모임에서 '후쿠시마 어린아이들의 목소리')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서쪽으로 50km 떨어진 고리야마. 이 지역에 사는 주부 야기누마 요시코(가명, 37)는 두 자녀가 외출할 때 긴 소매 옷을 입히고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시키고 있다. 방사능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장남(9)은 최근 눈 밑에 기미가 생기고 안색도 창백해졌다. 딸(8)도 코피를 흘리는 횟수가 잦아지고 있다. 야기누마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후쿠시마현 전체에서 원인불명의 건강 이상을 호소하는 아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툭하면 코피... 후쿠시마 아이들이 떨고 있다', 세계일보)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코린토 전서 12,12-27)

한창 성장할 시기에 마음껏 맑은 공기를 마시고 산과 들에서, 공원에서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에게 원전 사고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모든 것에 인과법칙이 있는 것처럼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며 생명을 도외시하는 핵산업은 이런 어린아이들과 임산부를 가장 큰 피해자로 삼는다. 결국 우리의 미래를 파멸시키는 것이 핵산업의 본 모습이다.

"크고 붉은 용인데 ……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 그때 하늘에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미카엘과 그의 천사들이 용과 싸운 것입니다. 용과 그의 부하들도 맞서 싸웠지만 당해 내지 못하여, 하늘에는 더 이상 그들의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큰 용, 그 옛날의 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자, 온 세계를 속이던 자가 떨어졌습니다." (요한묵시록 12,3-9)

온 세상을 향하여 감언이설로 맑고 깨끗하고 싸고, 안전한 에너지라고 외치는 핵산업계의 목소리는 이제 세계를 속여 온 거짓 속삭임이었다는 것이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재차 확인되었다.

미래 세대와의 단절이 아닌 종말을 생각하게 하는 핵산업은 이제 종말을 고해야 한다. 그 자리에 생명과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것이 자리잡아야한다. 이것이 바로 '생태민주주의'다. 생태민주주의는 지구 상 모든 존재의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하고 보장하며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정신과 시스템이다. 여기서 사회정의와 환경정의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양 축인 것이다.

생태민주주의의 핵심은 두 가지다. 그 중 첫 번째는 성경에서 말하는 어린이와 같은 작은 존재들이 생태계의 존속과 발전에서도 의미 있고, 동등한 존재로서 인정받고 대우받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권력과 부,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고 착취 당하던 존재들이 그 자신들의 존엄과 주권을 회복하여 공동체성과 공존이 비로소 실현되는 상태다.

두 번째로 모든 행위는 미래와 미래 세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대 간의 형평성 차원에서도 현재를 사는 우리는 미래 세대에 부담을 주는 행위들을 자제하고 조절할 의무가 있다. 이런 점에서 핵발전은 그 자체로의 위험성뿐만 아니라 핵폐기물을 발생시킨다는 측면에서 반생명적이고 반평화적이다.

더불어 핵발전 시스템은 사용자인 시민들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민주적인 에너지 시스템이다. 우리는 세상에 창조될 당시부터 자율적인 선택과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다. 그러기에 스스로 윤리적이고 평화적인 에너지 사용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 "우리의 행복이 모두 물질의 풍요에서만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은 마치 홍해 건너 자유의 땅으로 자신들을 이끈 것이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금붙이로 만들어 낸 황금소라고 착각하고 믿고 싶어하는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모습이다." 그림은 17세기 프랑스 화가 푸생의 '금송아지 숭배'.

2) 삶의 전환

탈핵 문제는 우리가 추구해 온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바꾸는 과정을 통해 다가가야 한다. 탈핵을 이야기하는 것은 공포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싶고, 어린아이들과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다. 미래 세대에 부당한 짐을 지워주고, 현세대의 힘없는 이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핵발전소는 더 이상 안 돼!"라고 외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양심에 따른 윤리적이고 신앙적인 선택과 책임에 의한 것이다. 더 이상 성장제일주의에 근거한 에너지 과소비의 삶을 살지 않고 생명을 존중하는 삶으로의 전환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구와 경제 규모에 비해 너무나 과한 에너지 소비를 하는 사회구조와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 성장률에 집착하고, 편리를 추구하며,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고,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는 이러한 세태는 이제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의 행복이 모두 물질의 풍요에서만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은 마치 홍해 건너 자유의 땅으로 자신들을 이끈 것이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금붙이로 만들어 낸 황금소라고 착각하고 믿고 싶어하는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모습이다(탈출 32,1-6).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된다"(탈출 20,2-3).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창세 1,1-4)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창세 3,8)

태초부터 빛, 태양 에너지와 바람, 풍력 에너지는 하느님과 인간과 함께한 에너지원이다. 이 에너지원들은 생태계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모든 존재에게 공평하고 친절한 에너지원이다. 힘 있는 어떤 권력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 아니다. 세상 태초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느님의 참된 뜻에 따라 죽음이 아닌 생명을 위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에너지원이 바로 태양과 바람이다.

핵산업계는 우리에게 생명을 지켜 주고, 생태계를 보전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눈앞의 이익을 좇아 핵발전만이 생태계를 보전하고 인류의 안정을 지켜줄 수 있노라고 세계 시민들을 현혹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기만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후쿠시마 사태를 겪은 일본과 탈핵을 선언한 독일의 예에서 쉽게 알 수 있다. 54기의 원전 중 현재 2기만을 가동하고 있는 일본의 경우에도 절전운동을 통해 안정된 상태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은 여기에 더해 안전하고 깨끗하고 고갈 위험이 없는 친환경 에너지시스템의 선두주자가 된 것을 기회라고 여기고 있다. 탈핵과 더불어 친환경 대안 에너지가 전세계의 대세로 떠오르는 가운데 핵심기술의 선점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들이 바로 탈핵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인간의 탐욕으로 잃어버렸던 낙원과 그 안에서 누리던 생명과 평화가 넘치는 에너지를 다시 되찾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최고 덕목은 사랑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탈핵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며 이루어 나가야 한다. 사랑하는 아이들의 미래를 진정으로 걱정한다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가장 훌륭한 유산을 그들도 누리고 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탈핵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5. 마무리(환경에 관한 교회 문헌)

"환경은 하느님께서 모든 이에게 주신 선물로서, 이를 사용하는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 미래 세대와 인류 전체에 대한 책임이 있다. …… 자연환경은 우리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원료 이상으로 소중한 창조주의 놀라운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에는 그것을 무분별하게 착취하지 않고 현명하게 사용하기 위한 목적과 기준을 알려주는 '공식'이 담겨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진리 안의 사랑> 48항)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연계에 대한 지배는 절대 권력이 아니다. 자원의 개발과 이용에는 지켜야 할 도덕적인 요청이 따른다. 창조주께서 친히 설정하신 한계는 우리가 자연을 대할 때 생태학적인 법칙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법칙에 귀속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를 어길시 징벌이 따르게 되어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사회적 관심> 3항)

"개발에 관한 참다운 개념은 자연 요소들의 이용, 자원의 재생 가능성 여부, 위험스러운 공업화의 후속 결과 등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으며, 이 세 가지 고찰은 개발의 도덕적 차원에 관하여 우리 양심에 경종을 울린다." (<사회적 관심>, 34항)

"이 땅에는 모든 이를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온 인류 가족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주신 선물인 자연의 도움으로, 그리고 근면한 노동과 창의력으로 품위 있는 삶에 필요한 자원을 개발해 나가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는 미래 세대 역시 계속해서 이 땅을 일구며 거기에서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 땅을 보존하여 물려줄 막중한 의무가 있음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진리 안의 사랑> 50항)

(끝)

양기석 신부 (스테파노,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환경소위원회 총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관련기사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