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6일 연중 제24주일: 마르 8,27-35

얼마 전, 가족과 함께 시내에 외출했다가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에 잠시 들렀다. 분향소 옆에 마련된 포장마차 카페에서 음료수를 사 마시며, 길가에 잠시 주저앉아 아이들에게 쌍용차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아저씨들이 왜 이렇게 거리에 나와 있는지, 그 앞에서 팔고 있는 책 <의자놀이>는 무슨 내용인지를.

그때 시청 앞 광장에서 무슨 행사가 열리는지 요란한 음악과 춤으로 시끌벅적하고 젊은이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듣자 하니 개신교 청소년 신앙대회가 곧 열릴 예정이라고 했다. 흥분되고 상기된 표정으로 가스펠송을 흥얼거리며 밝게 지나가는 젊은이들과 분향소 앞을 지키는 어둡고 지쳐 보이는 노동자의 모습이 동시에 내 눈에 들어왔을 때, 참으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 자리에 모인 수만 명의 젊은이가 열광적으로 찬양하는 예수와, 매주 월요일 저녁 대한문 거리 미사에서 분노와 통곡으로 호소하는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예수는 정말 같은 분일까? 분향소 쪽으로는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광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젊은이의 목에 걸린 십자가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이런 낯설음은 사실 본당 안에서 더 자주 느낀다. 매일 아침 페이스북을 열어 보면 곳곳에서 고통받는 이들과 연대하는 활동가와 성직자들의 소식이 빼곡하다. 하지만 본당 주일 미사에서나 본당 신자들과의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는 들어볼 수도 없다. 강정마을에서 성체가 짓밟혔을 때도 신자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관심도 없고, 그런 사실을 전해 주면 성체를 짓밟은 경찰보다 성체를 감히 시위현장으로 끌어낸 사제를 더 비난한다. 춥게 느껴질 만큼 빵빵하게 에어컨을 틀어 놓고 모임을 하는 본당 안에서, 핵발전소를 더 짓지 말아야 한다는 수도자들의 호소는 공허하기만 하다.

가난하고 소박한 삶 대신 화려하고 편안한 삶이 선망의 대상이고, 고통받는 이들보다는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과 함께하고 싶어진다. 전혀 복음의 가르침과 다른 이런 낯설음과 불편함이, 사실 내 삶과 신앙 안에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문득 개그콘서트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도대체 이 신앙은 누구를 위한 신앙이란 말입니까?"

▲ "시청 앞 신앙대회에 모인 수만 명의 젊은이가 열광적으로 찬양하는 예수와, 매주 월요일 저녁 대한문 거리 미사에서 분노와 통곡으로 호소하는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예수는 정말 같은 분일까?" 사진은 지난 8월 27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봉헌하는 월요 미사에 참여한 사람들 ⓒ문양효숙 기자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한다. 베드로가 기대한 그리스도는 분명 이스라엘 민족을 정치적으로 해방하는 영광과 승리의 메시아였을 것이다. 그래서 수난과 죽음이 그리스도의 운명이라고 가르치는 스승을 꼭 붙들고 반박한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오랫동안 믿고 기다려 온 메시아는 그런 무기력하고 패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그런 베드로를 두고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고까지 심하게 꾸짖으신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영광스러운 꽃길이 아니라 고난의 십자가의 길이라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높은 자리에서 화려하게 세상 사람들의 찬미와 영광을 받으시지 않고, 고통과 수난을 감내하면서도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길을 걸어가셨다. 그리고 제자인 우리에게도 그런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고, 그렇게 살라고 하신다.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용기를 내어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가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의 신앙도 복음대로 살지 않으면, 우리의 탐욕을 그리스도요 복음이라고 고백하게 될 수 있다. 베드로를 꾸짖는 예수님의 호통이 지금도 메아리치는 것 같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이미영 (발비나,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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