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발전소 문제에 대한 신앙인의 성찰과 실천-1

'생명과 탈핵'을 주제로 지난 3월 26일에 열린 개신교 · 불교 · 원불교 · 천주교 합동 세미나에서 양기석 신부(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환경소위원회 총무)가 발표한 글을 2회에 나누어 연재합니다. ― 편집자

양기석 신부 ⓒ정현진 기자
후쿠시마 원전 폭발과 방사성 물질 누출 사고는 일본 정부도, 도쿄전력도 확실한 답을 내놓고 있지 못하는 현재 진행형인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다. 후쿠시마 사고가 난지 1년이 된 지금도 미디어는 연일 이 사고의 후유증에 대해 관련 기사를 내놓고 있다. 강제 이주한 이들의 고통과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상 문제 때문에 그 수치를 터무니없이 올린 새로운 안전기준에 의해 안전하다고 판정된 지역에 사는 이들, 그리고 자발적으로 고향을 떠난 이들의 삶과 후유증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는 벌써 이 모든 사실을 잊은 듯 무관심하게 살고 있다. 이미 많은 자료가 후쿠시마에서 누출된 방사능에 한국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지만, 우리 정부와 공적 기관들은 그 위험성을 알리지 않고 있거나, 애써 이웃나라인 일본에서 벌어진 핵재앙이 우리와는 상관없는 양 호도하고 있다. 여전히 정부는 한수원을 통해 수십억의 직간접적인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고, 그 예산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있고, 국정원이 개입하여 사고 직후에 작성된 '한반도 방사성 물질 유입 보고서'가 폐기되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 생명의 존엄함은 사라지고 경제적인 계산만을 앞세우는 이런 태도는 윤리적으로도, 신앙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에 본 소고에서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폭발을 계기로 우리 세계에 던져진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과 핵산업계의 비윤리성, 이를 가능하게 한 우리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을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 정리해 보려 한다. 성경 안의 여러 주요한 사건들과 원전 문제의 유사성을 따져 보며, 현대 교회의 여러 가르침 등을 통해 우리 삶과 사회 의식과 구조의 변화를 통해 후쿠시마 이후의 세계가 지속 가능할 수 있는 방안을 가톨릭 신앙의 틀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1. 근본적인 문제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세 2,16-17)

우리 인간의 삶 안에는 넘지 말아야 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발전해 온 과학이 많은 편의를 인간에게 제공해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학적 진보가 인간에게 행복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 진일보한 과학의 산물로 인해 많은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많은 생명체들이 그 생명을 잃기도 하였다.

이 모두가 다 더 많은 것을 가지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사고를 갖게 된 인간이 낳은 죽음의 그림자다. 특히나 원자력발전소를 통해 얻는 전력으로 유지되는 사회구조는 인간의 오만함과 탐욕이 결국 자신의 생명까지도 위협하게 되었던 창세기의 낙원추방 사건과 바벨탑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 결코 손대서는 안 되는 것을 욕심내는 인간의 본성이 낳은 재앙을 생각하게 한다.

1945년 여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단 두 발의 핵폭탄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히로시마 14만 명, 나가사키 7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망자를 냈다. 이 사건으로 세계는 이미 핵폭탄이 보여준 폭력성, 반문명성, 반생명성, 반평화적인 속성을 통해 방사성 물질의 위험성이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이 위험천만한 방사성 물질을 평화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원자력발전이다. 그러나 이 역시 인류의 생존에 치명적인 걸림돌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의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로 인류는 다시금 자신들이 가졌던 생각이 잘못되었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체르노빌의 경우 사고 발생 이후 25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로 인한 사망자가 25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그 규모면에서 체르노빌을 압도하는 후쿠시마의 경우 20~30년 후에는 그 사망자가 100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들이 있다(영국 인디펜던스지 2011년 8월 29일자).

원자력발전소를 통해 얻는 전기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는 편리한 에너지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욕구를 자극해 이익을 얻으려는 이들이 교묘하게 꾸며 놓은 죽음의 덫이다. 방사성 물질은 인간뿐만 아니라 그 어떤 생명체와도 공존할 수 없는 물질이다.

지구상에 방사성 물질이 없어지고 나서야 생명체가 등장했다고 한다. 성경에서는 이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해로운 원소는 없애 주시고 질서를 만들어 주시고 나서야 인간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창세기 1장). 방사성 물질은 생명체의 유전 정보에 혼란을 일으킨다. 염색체가 절단되면 세포의 복제가 불가능해지고, 염색체에 이상이 생겨 변이를 일으키는 것이다. 방사성 물질은 개별 생명뿐만 아니라 종의 존속을 위협한다. 인류 종말을 가지고 올 수 있는 위험한 요소를 꼽으라면 첫 번째로 죽음의 물질인 방사성 물질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탐하면 죽을 것이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조차 가지려 했던 인간의 탐욕적 본성을 잘 이용한 것이 바로 핵산업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편리한 것이 선인양 물질 지향적이고, 물질 중심적인 사고와 생활방식은 현재와 같은 과소비 지향의 삶의 구조를 만들었고, 이는 원자력발전과도 같은 위험천만한 핵산업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이는 인간의 삶을 위해 도구로 쓰여져야 할 것들이 목적이 되어 버린 병든 세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2. 비인간적인 문제

1) 윤리적인 문제

일본 원자력안전위윈회는 유사시 원자로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도 비상용 디젤 엔진이 작동해서 원자로를 냉각시키기에 사고가 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며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성을 호언장담하였었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로 이 또한 추측일 뿐인 허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통해 얻은 교훈이 있다면 어디에도 안전한 원전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생활 속에서 불현듯 겪게 되는 여러 사건·사고 중 그 피해 정도와 회복 여부에 있어서 치명적인 수준을 넘어 인간의 통제, 조절 기능을 넘어서는 것이 바로 원전사고다. 원전사고는 수천, 수만 명의 인명 피해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의 삶까지도 송두리째 앗아가는 인간이 만들어 낸 회복불능의 재앙이다.

이렇게 위험한 원전을 고집하는 이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첨단과학이 자랑하는 기술력이다. 현재의 기술로도 충분히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고,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허언(虛言)이라는 것은 이미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로 만천하에 다 드러났다.

그러나 이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운전되는 과정에서도 원전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사람들에게 치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주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관리 인력의 피폭 문제다. 원자로는 한 번 가동되면 70~150기압의 높은 기압과 섭씨 300도의 뜨거운 물을 견뎌내야 하는 수천 개의 배관이 있다. 그러나 배관 두께가 일정하지 않아 관이나 밸브를 갈아끼우는 경우 작업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20년 동안 원전 현장에서 일하다 암에 걸려 죽은 히라이 노무오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작업에 투입되는 이들이 피폭 당하게 된다. 숙련된 전문가들이 원전을 관리할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작업자들에게 허용된 연간 피폭량에 금방 도달하기에 계속해서 미숙련공이 투입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 원전 현장이라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강제 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려고 그들 위에 부역 감독들을 세웠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양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되었다. …… 그리하여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과 온갖 들일 등,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 (탈출 1,11. 13-14)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 (탈출 2,24)

일본 잡지들에 의하면 현재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 현장의 복구 작업에 아마추어인 계절노동자들을 투입하고 있다고 한다. 높은 임금을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조폭들과 연결된 브로커들을 통해 턱없이 낮은 임금을 강요받는 농한기의 농민들, 어민 출신, 임시직 노동자들, 거주불명자 등 사회적인 약자들이 이런 위험천만한 작업에 내몰리고 있다.

이마저도 어렵게 되자 한국의 3월 5일자 일간지들이 일제히 "일, 원전주변 복구 한국근로자 '묻지마 구인'"(서울신문, 3월 5일자)이라고 보도한 내용처럼 이제는 연고가 불확실한 노숙자들과 중국의 가난한 조선족 등을 모집하고 있는 처지에 이르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원전이 얼마나 위험한 물질을 다루어 왔고,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사업이었는지를 알려 주는 대목이다.

2) 비민주적 문제, 세대간 불균형 ― 미래세대에 대한 형평성의 문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시고, 지성과 자유를 통해 인간에게 이 세상을 다스릴 능력과 권한을 주셨다(창세 1,28).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권한이자 창조 질서를 보전하라는 절대적인 과제를 부여 받은 인간의 책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자연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이나 지배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통치는 자신이 위임 받은 권한 내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섬기고 배려하는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지속 가능한 세계를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책무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부와 핵산업계가 확대 추진하고 있는 원자력발전은 운전 과정에서의 사고 위험뿐만 아니라 폐쇄 이후의 처리과정에서 있는 핵폐기물의 치명적인 문제로 인해 하느님의 창조질서 자체를 크게 위협하는 행위이다.

핵폐기물 또한 원자력 발전의 위험한 속성처럼 그 처리 자체가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지하 수백 미터 이하의 암반층에 격납고를 만들고, 폐기물을 수천 년, 혹은 수만 년, 심지어는 백만 년을 보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체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지금까지 인간이 가진 기술력으로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거기에 더해 원전 폐쇄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비용은 이제 원전 건설 비용 이상이 될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고 있고, 핵폐기장 건설과 관리 비용을 미래 세대에 떠넘기는 것 자체가 비도덕적이고 무책임한 자세다.

안타깝게도 원전과 핵폐기장의 문제는 후세대에 엄청난 부담을 떠넘기는 비도덕적 행태로만 남지 않고 현재를 살고 있는 지역 주민들에게도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이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말하였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에 끌고 왔소?" (탈출 16,2-3)

나봇은 아합 왕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제가 제 조상들에게서 받은 상속 재산을 임금님께 넘겨 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제벨이 그의 남편 아합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내 나봇을 고발할 것을 명한다. "나봇은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나봇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였다.
나봇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합 왕은 일어나, 이즈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으로 내려갔다. (열왕기 상권 21장)

원자력발전소와 핵폐기장은 일반적인 위험시설이나 혐오시설 등과는 그 차원이 다르기에 최대한 인구가 적은 지역에, 혹은 다른 국가의 국경과 인접한 지역에 자리한다. 아무리 친환경과 청정에너지라는 홍보를 하여도 원자력발전소나 핵폐기장은 그것이 지닌 태생적 공포를 극복할 수 없기에 어느 지역이든, 누구든 이를 쉽게 환영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핵산업계는 건설부지의 안전성 등과 같은 환경영향평가 등은 부차적인 요소로 생각하며, 일차적으로는 주민의 저항이 적은, 소위 힘없는 지역을 선정하곤 한다.

도시 지역의 전력 공급을 위해 핵발전소가 건설되지만, 결국 그 위험성은 핵발전소가 자리잡는 지역의 주민, 생태계, 그리고 미래 세대가 책임져야 한다는 비윤리적이며, 반민주적인 폭력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 핵산업의 진실이다. 그럼에도 지역에서 일어나는 저항은 만만치 않다. 이러한 저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핵산업계가 선택하는 전술은 바로 '낙후된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킨다'는 기만전술이다. 결국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논리다. 이 결과 유치 신청 소식이 들리는 모든 지역과 마을에서 지역 간, 주민 간에 충돌과 분열이 일어난다.

이것은 원자력발전소와 핵폐기장 부지로 선정된 지역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도시에서 사용할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건설되는 원자력발전소의 생리상 생산된 전기를 먼 곳에 위치한 도시로 공급하기 위해 건설되는 송전탑 문제도 바로 핵산업계가 이익을 위해 발생시키는 비인간적이고, 반생명적인 문제다. 지난 1월 신고리 원자력발전소에서 만들어질 전기를 도시로 공급하기 위해 밀양에 송전탑을 건설하는 도중 일어난 고(故) 이치우 어르신의 분신은 원전 부지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힘없는 주민들에게도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핵산업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발전소보다 송전선로 건설이 문제, 분신자살 등 애매한 송전선로 보상기준 수면위 급부상, 요구 받아 주면 천문학적인 예산 문제 …… 고민에 빠진 정부" (에너지타임즈, 2월 10일자 기사)

"송전탑 건설 여전히 주먹구구? 주변토지 보상, 개선 필요해 ― 최근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던 70대 노인이 분신자살을 하였다. 말도 안 되는 보상기준에 대한 반발이었다." (에너지경제, 2월 1일자)

권력과 금력의 힘으로 힘없는 이들을 억압해서 더 많은 힘과 부를 얻으려고 하는 어두운 세력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감언이설로 진실을 은폐하고, 권력과 돈으로 이웃을 분열시키고, 종래에는 힘없는 이의 고통을 당연한 듯 여기는 모습은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먹었던 고기국의 추억을 떠올리며 노예살이의 불의한 상황과 타협하려는 이들, 아합 왕 시절 권력의 눈치를 보며 그 안에 기대어 안위를 얻고자 했던 이들이 불의에 타협하며 이웃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현실과 너무나 닮아 있다.

이러한 상황을 조작했던 그 옛날의 권력자들처럼 현재의 정부와 핵산업계는 시민의 편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원자력발전을 수용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비민주적인 행태인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작은 시골 지역의 주민들의 권리쯤은 제한되어도, 희생되어도 괜찮다는 논리가 버젓이 판치는 세상을 어찌 민주사회라 할 수 있는가? 자신들의 최소한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저항을 지역이기주의, 님비 현상이라고 폄하하는 국가기관과 언론이 있는 사회가 어찌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회라 할 수 있는가? (계속)

양기석 신부 (스테파노,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환경소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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