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6일: 마르 8,27-3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 질문하십니다. 첫 질문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 혹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사람들이 그분을 예언자라고 생각하였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초기 신앙인들이 그분에 대해 믿던 바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기록한 복음서들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전기와 같이 기록되었지만, 그것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만 보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믿던 바를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예수님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이 가미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당신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이르시면서, 당신이 유대인 지도자들의 배척을 당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은 것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 곧 영광스럽게 군림하는 메시아, 강대국이 되겠다는 이스라엘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메시아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에 발생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다는 말씀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하였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그렇게 배척 당하고 무력하게 죽는 메시아는 있을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정서가 반영된 반박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격한 반응을 소개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아야 한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죽음을 하나의 패배로 보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수난사에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놓고, 유대교 대사제와 율사들은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냉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을 터인데"(마르 15,32). 그들은 실패자로 죽어가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들의 승리를 뽐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어 가는 예수는 하느님과 관련이 있을 수 없다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는 생각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이것이 초기 신앙인들의 깨달음이고 또한 실천입니다. 십자가로 끝난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을 복음이라 부른 것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초기 신앙인들이 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시대 유대인들이 가졌던 메시아 상(像)을 근본적으로 수정합니다. 그들이 상상한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강대국으로 만들어 주는 영광스런 인물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지적합니다. 인류는 하느님을 말하면서 자기 욕망의 성취를 항상 꿈꾸었습니다. 인간을 성공하게 해 주고, 부귀와 영화를 주는 하느님입니다. 인류는 비를 오게 하기 위해 하늘에 빌고, 병들었을 때는 신에게 빌어서 병을 고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그리스도 신앙은 전혀 다른 하느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이용하여 내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배워서 그분의 일을 내가 실천하겠다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생명을 살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을 배워 실천합니다. 아버지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분이면, 그 자녀도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며 삽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서 하느님으로부터 혜택을 얻는다는 유대교의 가르침을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장하여 상상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높은 사람의 법을 지키고, 높은 사람에게 정성을 바쳐야 잘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베드로를 격하게 비난하셨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당연히 이 세상의 강자로 군림해야 한다는 베드로의 생각을 예수님이 비난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그분의 죽음을 중심으로 발생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여는 존재입니다. 예수가 메시아인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의 세계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끝에 말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질서의 세계, 곧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소모하는 세계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세계입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가 발견하는 하느님은 강자도 아니고, 높은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가 보는 하느님의 일은 자기 스스로를 내어 주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자비롭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스스로를 내어 주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하느님은 사람들을 지켜보고, 판단하고, 벌주는 분이 아닙니다. 지켜보고 판단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닌 사람들, 곧 높고 강하다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신약성서는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분,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1요한 4,10) 그 사랑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신약성서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시작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잘 믿지 못합니다. 내가 사랑한 그만큼 상대방이 반응하지 않으면, 우리는 불안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즉시 사랑을 취소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중히 생각한 나머지, 대가 없이 사랑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서 이해타산적인 우리의 사랑에서 구원 받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과 같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배워야 하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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