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로시 데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주보
1933년 5월 1일 미국 뉴욕의 유니언 광장에 2천 5백 부의 가톨릭 신문이 뿌려졌다. 그것은 <가톨릭일꾼>이라는 신문의 창간호였다. 1페니에 팔려나간 이 신문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1페니에 팔린다. ‘1페니’의 신문 값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누구나 사 볼 수 있는 보잘 것 없는 푼돈이었으며, 가난한 이들도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며 제 돈으로 주고 살 수 있는 금액이며, 이 신문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려주는 1페니였다.

이 신문은 가톨릭 신앙의 눈으로 사회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연결 짓고 싶어 하던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채 2년도 안 되어 발행부수가 15만 부로 껑충 뛰었다. 그 지역의 신학교와 교회에서도 수십 부를 주문했다. 열성 청년들이 길거리로 나가 자발적으로 신문을 팔았다. 독자들은 다른 종교, 정치 계통의 신문에서 볼 수 없는, 특별히 가깝고 가정적인 느낌의 <가톨릭일꾼> 신문만이 갖고 있는 목소리를 발견하였다. 원칙이 있고 뉴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친구끼리 편지라도 교환하듯이 쓴 글이었다.

이 신문을 만든 사람은 피터 모린과 도로시 데이라는 한 여성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1952년 4월 <가톨릭일꾼> 신문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비참함과 가난한 이들의 신음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만드는 세계 고통의 한 부분”이라고 하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는 특별히 리지외 소화 데레사 성인의 ‘작은 길의 영성’을 소중하게 여겼는데, 데레사의 가르침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작은 행동이 지닌 의미! 우리가 실행하지 못한 작은 것들의 의미! 우리가 하지 못한 항의들,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기준들!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작은 행동의 의미에 대하여 숙고가 필요하다. 우리는 생명을 선호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인간의 형제애를 위하여 일하고자 한다. 소수인들, 소수의 사람들만이라도 불의에 저항하여 외칠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고통에 대항하여 굶주리고 집 없는 이들, 일이 없는 이들, 죽어 가는 이들을 대신하여 외칠 수 있다고 믿는 ‘고집 센’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가톨릭일꾼> 신문은 도로시의 부엌을 편집실 삼아 시작하였다. 자금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걱정할 때, 피터 모린은 이렇게 말했다. “성인의 역사를 보면 자본은 기도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하느님께서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보내 주십니다. 인쇄비를 댈 수 있을 거예요. 성인들의 일생을 읽으면 알게 됩니다.” 규정도 없고 재단도 이사회도 없이 오로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은총과 선의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에 의존하여 신문을 발행한 것이다. 그러나 여지껏 단 한 번도 신문을 거른 적이 없다. 세상에 기적이 있다면 이 또한 기적이다. 우리로 하여금 정의로운 사랑에 대한 세상의 따뜻한 지지와 응답을 경험하게 만들어 주는 기적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한국 교회에서도 이런 신문이 나오길 기대하였다.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 메시지와 교부들의 신앙, 그리고 사회적 가르침에 따라서 세상과 의사소통을 감행하며, 세상의 한 부분이 되어 복음을 놓치기 쉬운 교회 자신마저도 각성을 하도록 돕는 신문이 생기면 좋겠다, 생각하였다. 물론 지금도 교계에서 발행하는 신문이 있다. 평화신문과 가톨릭신문. 그러나 이미 덩치가 커 버린 교계언론은 이미 하느님 말씀의 양날칼에 몸을 베인듯 하다. 복음과 신앙에 의지해서 기사를 쓰려 하지만, 생존을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처지라고 하면 지나친 평가일까?

<가톨릭일꾼> 신문이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과 운영하는 방식에서 일치하려고 애를 썼다면, 그래서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도 소박한 모습을 유지한다면, 한국 교회의 언론은 막대한 교계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항상 적자를 고민하며 생존을 염려하기 때문에 교계의 소식지 역할에 몰두하면서, 세상사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세상으로부터 닫혀 있는, 그래서 비교적 교회 안에서만 안전한 신문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 염려된다. ‘저들만의 천국’을 알리는 신문이라면 응당 세상에서 분리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마저 온전치 못하다. 신문지상에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부들의 가르침과 복음을 선포하지만, 하단 광고에서는 세계여행과 돌침대 등 교우들의 육신적 건강을 위한 값진 상품 광고가 즐비하고, 가난한 교우들은 여전히 이런 광고에서 다시 한 번 소외감을 느낀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효과적으로 선포하는 언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을 줄기차게 보여주는 언론, 언어가 아니라 태도에서 세상과 다른 언론, 누가 보아도 나자렛 예수의 다감한 눈빛을 읽을 수 있는 언론이 필요함을 절감한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언론 역시 교회의 빛이 아니라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위로와 희망을 주어야 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그런 언론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작지만 소중한 결실을 안고, 언론을 시작한 지 벌서 3년이 훌쩍 넘어 버렸다. 식구들도 6명으로 늘어났다. 밥그릇이 늘어났으니 그만큼 고민도 깊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이사회도 있고, 운영위원도 있고, 편집위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독자들의 소액후원에 크게 기대어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의 비중이 커질수록 우리 언론은 더 순정해질 것이다. 독자들을 더 귀하게 여기고, 더 가련한 인생들에게 시선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가을이다. 새삼 새록 '우리 시대의 언론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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