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핵을 넘어 생태사회로-5]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어떤 원리로 창조하셨는가 이야기해 보자.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93가지 원소로 되어 있습니다. 그 93가지의 원소 중에 가장 가벼운 것(원자번호 1번)이 수소이고 가장 무거운 것(원자번호 93번)이 우라늄입니다. 그 가운데는 산소, 질소, 칼슘, 철, 알루미늄, 납, 금, 은 등이 있습니다. 이들 원소들은 상온에서 기체, 액체, 고체로 존재하는데, 서로 결합하여 물, 도리, 나무 등 온갖 생물과 무생물을 이룹니다. 이렇듯 모든 물질을 이루고 있는 최소 단위는 원자인데, 그 원자는 태양계와 같이 가운데에 핵이 있고 주변에 전자가 돌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가운데 가장 작은 원자의 세계와 가장 큰 우주의 모습이 닮은꼴이니 얼마나 오묘합니까?

그런데 원자는 또 '핵(核)'과 '전자(電子)'로, 그리고 '핵'(혹은 원자핵)은 다시 '양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핵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원자력'이라고 합니다. 핵을 분열시키거나 융합시키면 막대한 에너지가 방출되는데, 그 원자력을 순간적으로 발산시키는 것이 '핵폭탄'이고, 천천히 발산시켜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핵발전'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이 같은 핵발전은 '현대판 선악과'요 '물질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으신 물질의 구조를 인위적을 깨뜨리면서 탐스럽기도 하고 먹음직도 한 '제3의 불'을 취하려 하는 것은 '탐욕'입니다. 그리고 핵반응은 태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인데, 그를 통해 에너지를 취하려는 것은 '교만'입니다." (김영락 목사, 한국교회환경연구소 초대 소장)

실로 20세기에 접어들어 인간은 그동안 불변의 것이라고 믿었던 원자핵을 쪼갤 수 있고, 원자핵이 쪼개지면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가장 근원적인 자연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폭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원자력은 사실 그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거대한 프로젝트였고, 신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 낸 프로메테우스의 불이었다. 플루토늄은 하느님이 지으신 물질이 아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우주를 만드신 물질 가운데 가장 무거운 원소인 우라늄에서 플루토늄이라는 맹독성 물질을 추출하여 그것으로 하느님이 지으신 생명세계를 멸절시킬 수 있는 무기를 만들었다. 플루토늄은 각설탕 5개 정도의 크기만 가지고도 일본 인구 2억을 멸절시킬 수 있는 정도의 '맹독성' 물질이다.

▲ "원자력은 전대미문의 권력과 지배의 상징이다. 그것은 먹음직스럽기도 하고 보암직하기도 한 절대 권능에 대한 금단의 유혹이다." 사진은 신고리원자력발전소의 모습 ⓒ문양효숙 기자

원자력은 전대미문의 권력과 지배의 상징이다. 그것은 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국가들에게 욕망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다. 그것은 먹음직스럽기도 하고 보암직하기도 한 절대 권능에 대한 금단의 유혹이다. 인간은 그것을 얻기 위해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악마와 거래했다. 핵기술은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악마에게 담보로 건낸 '파우스트의 거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핵 문제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인간의 문제로 귀결된다. 핵 문제는 환경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의 위기로 판명된다. 다카기 진자부로는 구약성서의 욥기에서 핵발전에 대한 하느님의 '가장 좋은 계시'를 찾았다. 잘 알다시피, 욥은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었으나 온갖 재난을 겪는다. 친구들의 위로도 욥의 고뇌를 풀어 주지 못한다. 결국 욥은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 다카기 진자부로가 욥기에서 특히 영감을 받은 구절은 38장 31절 이하이다.

"네가 북두칠성의 별 떼를 한데 묶을 수 있으며, 오리온성좌를 묶은 띠를 풀 수 있느냐? 네가 철을 따라서 성좌들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며, 큰곰자리와 그 별 떼를 인도하여 낼 수 있느냐? 하늘을 다스리는 질서가 무엇인지 아느냐? 또 그런 법칙을 땅에 적용할 수 있느냐?" (욥 38,31-33)

여기서 욥은 욥 개인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이다. 그 인간에게 하느님은 하늘의 이치를 아느냐고 물으신다. 자연계는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니고 인간이 속속들이 아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느님이 욥에게 묻는다. 너는 그것을 아느냐고. 자연의 깊이, 자연의 균형, 그런 것도 알지 못하면서 오만하게 그것을 개조하려는 인간에 대해 하느님은 엄중한 경고를 보내신다. 그래서 다카기 진자부로는 "지금 환경의 위기라고들 말하는데 그것은 환경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의 위기입니다"라고 말한다('생명의 자리에서 원자력을 생각한다', <녹색평론> 제118호).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서균렬 교수는 "오클로 자연 원자로가 멈춰선 지 20억 년이 지난 후, CP-1이라는 세계 최초의 인공 원자로가 시카고대학 운동장의 서쪽에 있는 스쿼시 코트에 들어서게 되면서 인류는 조물주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고 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과학자들은 아프리카 가봉에 있는 노천 우라늄 광산인 오클로 자연 원자로에서 수십만 년 동안 우라늄 235가 스스로 핵분열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멈춘 지 20억 년이 지난 후, 인간은 미국 시카고대학 한 구석에 최초로 '인공' 원자로를 설치했고 거기서 사상 처음으로 핵분열에 따른 연쇄반응 실험을 성공시켰다. 그들은 조물주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자부했지만 하느님은 예언자 에제키엘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아, 두로의 통치자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말하기를 너는 네가 신이라고 하고 네가 바다 한가운데 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지만, 그래서, 네가 마음속으로 신이라도 된 듯이 우쭐대지만,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에제 28,2)

죄는, 생태학적 의미에서, 우리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레리 라스무센(Larry L. Rasmussen)의 말대로 "죄를 짓는다는 것은 유한성을 무시하고 뛰어넘는 것이요, 그 가능성과 한계를 부인하는 것이며,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도 "인간의 범죄는 단순히 자기 자신에 대한 오류, 자기소외, 자기중심성, 자기 폐쇄성만이 아니라, 광기와 영웅주의, 하느님의 영광의 찬탈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탈하고 그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고 한다. 이러한 혼동 속에서 죄인은 자신을 거짓 신으로 만든다"고 질타한 바 있다. 오래 전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친 바와 같이, 죄란 우리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유형의 교만이다. 그것은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핵은 하느님 없이 이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콜로 2:15, 에페 6,12)의 절대 권능에 대한 욕망이고, 과학과 기술의 이름으로 온 우주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이사 9,6, 욥 25,2, 1티모 6,15)을 거부하고자 하는 현대판 선악과 사건이며, 또한 하느님이 지으시고(창세 1,1) 사랑하신(요한 3,16) 모든 지구 생명체를 멸절시킬 수 있는 "사망의 권세"(시편 49,15)다. 그래서 핵과 기독교 신앙은 양립할 수 없다.

핵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과학기술공학체제(Technocracy)와 대량살생의 군사무기 및 무한성장을 통하여 지정학적 패권과 이윤극대화를 도모하려는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융합으로서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는 권력체제다. 이런 체제와 기독교 신앙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핵무기를 지지하거나 핵발전을 옹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둘은 서로 모순어법이기 때문이다.

▲ "강원돈은 핵체제를 보면서 욥기에 등장하는 '레비아탄'을 떠올렸다." 그림은 폴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 '레비아탄의 파멸'.
강원돈은 이러한 핵체제를 보면서 욥기 41,1-34에 등장하는 '레비아탄'을 떠올렸다. 배현주는 이 땅 곳곳에 시한폭탄처럼 박힌 핵발전소들을 보면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마르 13,14)을 연상했다. 실로 핵은 창조주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 생명의 하느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마성적으로 악용하는 죄악이다. 그것은 또한 이 세상을 힘을 통해 다스리고자 하는 집권자들 앞에서 섬김과 나눔과 사랑의 길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핵에 의한 평화(Pax Nucleus)는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의 길이 아니다. 나아가 그것은 스스로 죽음에 대한 사랑(necrophilia)에 빠져들어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으시는 생명의 영을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핵은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모반이며, 자신과 지구 전 생명 공동체의 진정한 안보, 즉 생명안보를 위협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자멸의 길인 것이다.

생명을 택하여라

지금 우리는 핵무기와 핵발전으로 말미암은 총체적 생명의 위기 앞에 서 있다. 지금 우리는 핵 위주의 에너지 과다소비 사회로 갈 것인지, 아니면 재생가능 자연에너지 중심의 지속 가능한 생태사회로 갈 것인지의 갈림길에 서 있다. 40년간의 광야생활 후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 하느님께서는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아 "너희와 너희의 자손이 살려거든, 이제 생명을 택하여라"(신명 30,19)고 명령하신다. 십자가 위에서 피폭자들의 고통과 죽음을 나누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참 생명과 평화의 길이 되어 주신다. 성령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탄식하시며(로마 8,22) 모든 생명의 안녕과 안전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

이제 우리는 핵에 대한 유혹과 환상, 그리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집착과 탐욕에서 벗어나는 영적 대각성이 우리의 신앙적 과제이고 신학적 의제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핵의 실상을 바로 알리고, 피해자의 아픔을 나누며, 피폭자의 고통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일을 신앙적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탈핵 에너지 전환운동'에 힘쓸 수 있도록 핵에너지에 의존하지 않는 교회론, 즉 '생명평화 교회론'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 일을 생명의 지혜를 보유하고 있는 모든 종교 · 문화 · 사상을 수렴하고 융합하면서 이웃종교와의 생명연대 속에 추진해야 한다. 기술만능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과학윤리를 비판하면서 핵 문제에 대한 종교와 과학 간 대화를 꾸준히 실행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생명과 평화의 길을 가는 우리들은 '파수꾼'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울리히 벡은 우리가 사는 '위험사회' 안의 '제도화된 무책임성'을 고발한다. 오늘의 위험사회 속에서 누구도 위험에 대해 독자적으로 책임질 수 없고 전문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위험이 일상화되어 위험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고, 설사 느낀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럴 때일수록 어느 때보다 종교와 언론 그리고 대학의 역할이 중요하다. 성서적으로 보면 이 역할은 파수꾼의 역할이다. 파수꾼은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거짓 평화와 안보를 이야기할 때에 눈앞에 닥친 위험을 알려야 한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1테살 5,3)

그런데 두려운 것이 있다. 그것은 만약 우리가 이 파수꾼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에는 하느님께서 그 죄를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시겠다는 말씀이다. 에제키엘을 통해 하느님이 말씀하신다.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에제 33,6)

(끝)

장윤재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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