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지금여기가 추천하는 책-정현진]

여름 휴가 기간을 맞아 책을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한지 두 달, 어느새 계절이 바뀌고 있다.

가을은 개인적으로 우울한 기분을 많이 타는 시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을 가장 사랑하는 이유는, 깊이깊이 가라앉다 보면 마음의 바닥에 내려앉아 있는 생각의 알곡을 잡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지난 두 계절의 삶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살아갈 모양에 대해 가다듬고 곱씹을 거리를 마련하는 시절이기도 하다. 겨울잠을 앞두고 양분을 보충하 듯, 겨울을 견뎌 생명을 내기 위해 고운 빛의 잎을 떨구는 나무처럼…….

책 소개를 앞두고 가장 마지막 순서임에도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글은 시간 많다고 잘 쓰는 게 아님이 결정적으로 증명됐다. 어떤 책을 소개해야 할지, 어떻게 써야 할지…… 어떻게 쓰느냐에 대해서는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 자체를 고민했음을, 그리고 야심 차게 늘어놓은 리스트에서 상당 부분 차례로 지워 버렸음을 고백한다.

마지막까지 장하게 살아남은 이 세 권의 책은 한때 세상을 이해해 보려고 씨름하던 시절의 흔적이다. 막연하게 분노하고, 막연하게 안타까워하고 또 방향 없이 뛰어다녔던, 감정과 감성 덩어리의 나를 다잡아 주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위아래, 좌우 5도 정도 확장해 준 고마운 책들이다.

다소 우울하고 무거울 수 있으며, 중간에 책장을 덮으며 눈물을 흘릴 수도 있을 것이다. 지친 여름 끝의 산뜻한 기분을 해칠 수 있으리란 우려에 죄송한 마음도 든다. 하지만, 무언가 명확해졌을 때, 안개처럼 불투명한 것을 걷어 냈을 때의 시원함이 저 깊숙한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 있으리란 믿음으로 조심스럽게 내놓으려 한다. 사랑스런 9월, 모쪼록 평화로우시길…….


<자기 앞의 생(生)>, 에밀 아자르,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357쪽, 2003 (소설)

나는 '삶'이란 단어를 좋아한다. 내 삶이 도저히 설명되지 않아서, 삶의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서, 누군가 '삶이 무엇인지, 삶이 이래도 되는 것인지' 설명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삶이 어쩌고 하는 책은 보이는 족족 들여다봤던 시절이 있었다. 여전히 헤매고 속시원히 해결된 것은 없지만 '삶'이란 단어에 정이 든 것인지 볼 때마다 반갑다. 이 책 역시 그런 과정에서 얻은 선물이다. 한 권 책값으로 여러 권 산 것처럼,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은 비단 기억력이 짧은 탓만은 아닐 것이다.

도저히 행복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어린 모모가 '자기 앞에 주어진 생'을 껴안고 맞서 살아가는 모습에서 다시 소중한 진리를 확인한다. 어떤 삶이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주어진 삶을 지켜 내고, 또 힘을 다해 사랑하는 시간이 그 삶을 '진짜'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왜 내 앞에 주어진 것이 희고 말랑하고 따끈한 빵이 아니냐며 투정하는 것은 결국 그 빵마저 상하게 두는 것일 뿐. 내게 주어진 것이 시커멓고 딱딱한 보리빵이라도, 눈물이든, 빗물이든 말아 먹어야 한다면 꾹꾹 열심히 씹어 삼키자. 온 근육으로 씹고 넘기는 그 순간만은 오롯이 내 삶이 될 테니…….

온 생으로 사랑한 아이, 모모의 지독하고도 아름다운 성장통 

 
열 살짜리 소년 모모(모하메드) 앞에 주어진 생이란……. 창녀였던 엄마, 누군지 모르는 아빠에게서 버림받고, 역시 폴란드 출신 유태인이자 창녀였던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살아가는 것.

어린 모모는 자신을 돌봤던 로자 아줌마가 죽음에 임박하자 그녀를 돌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의 주변에는 함께 생을 나누는 이들이 있다. 이를테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 주는 하밀 할아버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온 유태인, 젊은 창녀들, 모모와 로자를 돕는 의사 선생, 유일하게 부유한 포주, 창녀들의 아이를 돌보는 여자들, 성 전환자……. 이들은 누구도 서로를 원망하거나 불행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를 서로의 방식으로 보듬을 뿐이다. 아주 기쁘게.

유일하게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줬던 하밀 할아버지에게 모모가 생에 대해 던진 첫 질문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였고, "그렇다"는 대답을 들은 모모는 울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것이 더 나은 많은 일'들과 로자 아줌마의 죽음을 겪은 모모는 너무도 일찌감치 알아버린다. 생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사랑할 사람 없이 살 수 없다는 것, 결국 사랑해야 한다는 것…….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 야피, 라우드 알 라야힌

소설의 첫 머리에 있던 메시지. 아마도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한마디가 아니었을까.  그 자신이 지독한 사랑을 앓았던 노년의 작가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랑하라"였다. 생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고 다만 사랑에 미친 이에게 오는 것이므로.

내가 두 번째 만난 모모의 생은 놀랍게도 처음인 듯 생소했지만, 다음에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또 낯설 것이 분명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를 줄 알았던 아이, 모모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


<9월이여, 오라>, 아룬다티 로이, 박혜영 옮김, 녹색평론사, 224쪽, 2004 (에세이)

<작은 것들의 신>(1997)이라는 소설로 알려진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정치 평론집. 그녀는 소설가로 출발했지만, 이후 미국의 패권주의 비판으로 펜 끝을 세워 온 정치 평론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은 인도의 핵 개발과 댐 건설 공사를 비판한 에세이 <생존의 비용>, 평론 모음집 <보통사람을 위한 제국 가이드>가 있으며, <9월이여, 오라> 역시 그녀의 정치 에세이와 강연문을 편집한 책이다.

 
<9월이여, 오라>에 실린 8편의 에세이와 강연록은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바라보며 영국 가디언지에 기고한 '왜 미국은 당장 전쟁을 중지해야 하는가?' 등과 함께 실린 동명의 연설문 '9월이여, 오라'는 특히 "아름다운 선동문"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녀는 9·11 이후 1년이 지나, 라난 재단(Lannan Foundation) 주최로 2002년 9월 29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페에서 열린 강연에서 9·11 테러로 희생된 이들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무수한 9월의 희생자들을 호명했다. 미국의 한 복판에서…….

"내가 쓰는 글은 국가와 역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력, 권력의 편집증과 잔인함에 관한 얘기며, 권력의 물리학에 관한 얘기입니다."

아룬다티 로이는 자신이 외치는 반미, 패권주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그녀는 "반미적이라는 용어는 무슨 뜻입니까? 재즈, 언론자유, 미국산 삼나무, 토니 모리슨 싫어한다는 뜻인가요?" 하고 반문하면서 "미국 정부의 외교 정책에 대한 비판을 미국의 문화, 음악, 문학, 숨막히게 아름다운 땅,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즐거움에 대한 비판으로 혼동하게 하는 것은 고의적이며, 극히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말한다. 아룬다티 로이는 "누군가를 반미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상력의 결핍이며, 기성체제가 제시해준 것 이외의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없는 무능력"이라고 비판한다.

그녀는 "'9월 11일'의 의미를 기억하는 것은 역사의 아픔을 공유하기 위함"이라면서, 수많은 9월의 죽음을 상기시킨다. CIA 지원 아래 감행된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가 전복된 1973년의 9월 11일,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를 선포한 1922년의 9월 11일과 2002년 9월 11일에 이르는 80년의 전쟁, 미국의 조지 W. 부시 1세가 이라크에 선전포고한 1990년의 9월 11일. 그리고 베트남, 한반도, 인도네시아,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폭격과 학살이 자행된 동안 지나간 수많은 9월,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지나간 수많은 9월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아룬다티 로이는 이렇게 호소한다.

"(전쟁과 테러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전쟁도, 어떠한 복수 행위도, 다른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그 아이들에게로 투하되는 어떠한 폭탄도, 자기의 고통을 덜어주거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되살려낼 수는 없다는 것을, 내밀히, 깊이, 틀림없이 알고 있습니다. 전쟁은 이미 죽은 사람들의 원수를 갚지 못합니다. 전쟁은 단지 그들에 대한 기억을 욕되게 할 뿐입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유영미 옮김, 갈라파고스, 201쪽, 2007 (에세이)

이 책을 지은 장 지글러는 학자이자 활동가, 유엔 식량 특별 조사관으로 식량문제 전문가다. 그는 유엔 민간지원단의 자문관으로 활동하면서 목격한 '굶주림과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아들 키림에게 조목조목 들려주고, 굶주림을 조장하는 다국적 식량기업 등을 낱낱이 고발한다.

이 책에서 밝히는 '기아'의 문제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무수한 아이들이 있으며,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시혜적 차원이 아니다. 기아는 단순히 결식이 아니라 부지런하고 현명한 농부들이 끊임없이 농사를 짓는데도 굶을 수밖에 없는 구조의 문제, 전쟁, 정치적 무기가 된 기아, 기아를 악용해 이윤을 극대화하는 다국적 기업 등 '기아'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구조와 배후세력의 문제다.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곡물 잔재량으로 전세계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고, 프랑스의 곡물 생산으로 유럽 전체가 먹고살 수 있는 전세계적 식량 과잉의 시대, 8억 2,800만 명의 기아 인구(1999년 유엔 식량농업기구 자료)가 죽어 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이는 묻는다. "농산물이 그렇게 남아돈다면 부자 나라들은 곡물창고에 쌓아둔 곡물들을 다 어떻게 하고 있는 건가요?"

"부유한 나라들은 식량을 대량으로 폐기처분하거나, 법률이나 그 밖의 조치를 통해서 농산물의 생산을 크게 제한하고 있어. 생산자들에게 최저가격을 보장한다는 것이 그 이유란다."

아옌데의 비극.. 기아를 악용하는 국제 기업

장 지글러는 식량과 기아를 무기로 삼은 다국적 기업에 대해 고발하면서, 스위스의 네슬레와 칠레 아옌데 대통령의 일화를 들려준다.

1970년 11월 인민전선의 후보로 칠레 대통령에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는 약속했던 것처럼 15세 이하의 모든 아이들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으로 배급할 계획을 밝혔다. 아이들의 영양실조는 칠레가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분유와 유아식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며 칠레의 분유 시장을 독점했던 네슬레는 제값을 주고 사겠다고 했음에도 칠레 민주정부와의 협력을 거부했다. 이유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가 아옌데 정부의 사회주의적 개혁정책을 꺼렸기 때문. 결국 아옌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1973년 9월 11일, 아옌데 대통령은 살해됐다. 수만 명의 아이들은 이전처럼 다시 영양실조와 배고픔에 시달리게 됐다.

장 지글러는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시장원리주의의 폐해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비극적 기아에서 벗어나려면 결국 자급경제를 스스로 이뤄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을 호소하면서 "우리는 인류의 6분의 1을 파멸로 몰아넣는 세계 질서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지구에서 속히 배고픔이 사라지지 않으면 누가 인간성, 인정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며 불합리하고 악한 구조에 저항할 것을 촉구한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파블로 네루다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들은 모든 꽃들을 꺾어 버릴 수는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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