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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그 여자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광장으로 관원들에게로 끌고 갔다."(사도행전」 16장 19절)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는 한 세일즈맨의 자살에서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의 사회적 모순을 들추어냅니다. 유복한 가정의 가장으로 비교적 좋은 직장의 세일즈맨이던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성실하게 일하면 성공하게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두 아들은 아버지의 그 열정에 반항하며 탈선했고, 그 역시 대공황기를 맞아 직장에서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삶의 막바지에 몰린 그는 자식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겨주고자 사고를 가장한 자살을 했는데 그 보험금을 탈 아들은 이미 그를 떠나버린 뒤였습니다.

지난 8월 22일 또 다른 세일즈맨이 칼을 휘둘러 전 직장동료 2명과 행인 2명에게 큰 부상을 입히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파리 같은 자기 목숨을 끊는 대신 자기를 해코지 한 전 동료들의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는 2005년 더 이상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대학을 중퇴하고 직장인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7년 동안 그는 네 곳의 직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했고 마지막 직장에서 퇴사한 지난 4월, 그간의 노동의 대가로 남은 것은 4천만 원의 부채였습니다. 곧 그는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노동의욕을 상실하였으며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첫 두 번의 직장은 대기업의 하청을 받아 휴대폰 미납요금을 독촉하는 일이었고, 모두 2년이 되어 정규직으로 전환되기 직전 고용계약이 해지되었습니다.

세 번째 직장도 휴대폰 미납요금을 받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역시 대기업에서 위탁받은 회사입니다. 그런데 이 회사는 개인사업자 형식으로 계약하여 실적에 따라 수당을 지급하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업무가 종료될 때 개인 실적과 팀별 실적을 공개하여 심한 노동압박을 가했습니다. 세 번째 직장에서 그는 불과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취업한 회사는 한 시중은행의 대출상품을 위탁판매하는 곳이었습니다. 한데 이 회사는 지금까지의 회사보다도 더 안 좋은 방식으로 노동자를 고용했습니다. 기본급은 없었고 실적만으로 급여를 지급했습니다.

그의 급여로는 기초생계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저리인 은행대출은 꿈조차 꿀 수 없습니다. 결국 이자율이 높은 카드빚을 져야 했고, 상환기일을 못 지켜 고리의 이자가 발생했습니다. 일할수록 그의 부채는 늘었고, 그나마 네 번째 작장을 그만둔 뒤 그는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최선을 다하면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거라고 믿었습니다. 해서 몸이 부수어지도록 일했습니다. 회사의 고강도의 강박을 받으며 그의 전 노동력, 아니 몸 전체를 세일즈했습니다. 한데 7년 동안 그는 늘어만 가는, 아니 더 이상은 늘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한 부채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7년은 그의 노동의욕을 소진시켰고, 감정조절 능력도 분쇄시켜 버렸습니다. 하여 그는 더 이상 세일즈맨이 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세일즈맨은 7년 만에 사실상 죽어버린 셈입니다.

이것은 2천년대 우리의 삶을 휘둘리게 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재앙인지를 보여주는 한 전형적 사례입니다. 그 체제는 모든 사람들을 세일즈휴먼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노동력을 팔고 몸을 팔며 끝내는 정신까지 팔아버리게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노동력은 물론이고 몸과 정신까지 ‘소진’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 존재가 소진되어 버린 사람은 여간해선 회복이 어렵습니다. 왜냐면 존재의 바닥까지 소진된 그이는 회생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없을 만큼 자아가 붕괴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최근 크게 늘어난 이른바 ‘묻지마 범죄’(방화, 폭력, 살인)는 그 붕괴의 한 실례입니다. 감정조절에 실패하여 모르는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자살은 그 또 다른 예입니다.

또 많은 이들은 ‘언어 붕괴’ 양상을 보입니다. 횡설수설, 무차별적인 독설 등이 그 양상의 전형적 사례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많은 이들을 피곤하게 합니다. 해서 사람들은 그이를 외면해 버리거나, 심지어는 가까지 못하도록 쫓아내기도 합니다.

해서 그런 이는 자기를 외면하지 않는 이들을 만나면 지겹도록 따라다니면서 말을 겁니다. 어떤 때는 듣기 벅차게 존경을 표현하고 어떤 때는 분노를 표합니다. 그러나 대화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언어 붕괴 상황에 놓인 그는 뜬금없는 말을 하고 횡설수설하며 상대를 배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존재의 소진 상황에 놓인 이들은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지만 동시에 어떤 부분에서는 주위사람에게 폭력으로 느껴질 만큼 지나치게 열정이 넘칩니다. 자녀나 아내, 혹은 약한 이웃이나 동료에 대한 상습적 폭력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비인간적 체제의 폭력적 할거는 이런 사람들이 넘쳐나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 한상봉 기자

빌립보에서 바울이 만났던 한 여자도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그녀는 ‘점치는 귀신’이 들러붙은 소녀입니다. ‘점치는 귀신’의 그리스어는 프뉴마 퓌토나(pneuma puthōna)입니다. ‘퓌톤’(puthōn)이 ‘점쟁이 영’을 뜻하고 ‘퓌토네스’(puthōnes)가 ‘복화술사’를 가리키는 단어임을 감안하면, 이 소녀는 복화술처럼 말하여 점을 치게 하는 영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주인들’에 고용되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주인이 그녀로 인해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녀는 점치는 조합에 고용된 노예이고 그 조합의 운영자들이 점술사들의 점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사회는 점치는 귀신 들린 소녀 같은 이를 신령한 자로 여겼습니다. 빌립보에는 그런 이가 많았습니다. 해서 그런 회사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은 불과 반세기 전 이 도시가 겪은 엄청난 재앙 때문입니다. 부르투스와 캇시우스가 이끄는 공화군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부대와 바로 이 도시 앞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것입니다. 두 공화군 지도자가 자살하는 것으로 전투가 종료되는데, 이때 양군의 전사자의 수가 무려 2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잘 훈련된 로마군끼리의 전쟁에서 전사자의 수가 이렇다면 이 도시 민간인의 피해는 훨씬 혹독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이후 이 도시는 격변을 거치면서 바울 당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혹독한 역사, 그리고 빠른 변화는 이 도시 주민을 고강도의 집단적 스트레스 상황에 몰아넣은 것 같습니다. 해서 점에 대한 수요도 넘치게 많았고, 광인들 가운데 점치는 광인이 많았으며, 또 그이들을 고용한 회사들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근데 여기서 주지할 것은 그 광인들을 사람들이 신령스럽게 여겼다 해도 그이들은 몸과 마음에 깊은 병이 들어 있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녀가 몇날 며칠을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예요. 그분들이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습니다.”고 외쳐댔다고 합니다(17절). 이에 바울은 ‘귀찮아서’ 그녀에게 들러붙은 귀신을 쫓아냈다고 합니다(18절).

이상한 구절입니다. 귀신을 쫓아낸 것이 그녀가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귀찮아서입니다. 그것은 그녀가 바울이 자기를 애틋이 여긴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존경하며 따랐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언어 붕괴 상황에 있어서 그녀의 말투에 바울 일행이 괴로워했다는 것을 시사할 것입니다.

바울이 만난 소녀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전쟁으로, 전쟁의 상흔으로 영혼이 파괴된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의 자본은 그런 이를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그것을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파괴된 영혼으로까지 세일즈해야 하는 소녀, 그런 도시에서 바울은 바로 그런 이들의 해방을 뜻하는 복음을 전합니다. 비록 바울은 그 소녀를 이해하지 못했고 귀찮아했지만, 아무튼 그 도시는 그런 죽임의 시스템을 교란시켰던 바울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따라 죽임의 시스템과 맞서야 할 것입니다. 한데 과연 우리는 그 소녀를 귀찮아했던 바울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여의도에서 칼부림한 청년을 보는 우리의 태도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교연구소 연구실장)

<기사제공/ 웹진 제3시대 48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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