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핵을 넘어 생태사회로-3]

세계 핵산업은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섬 핵발전소 폭발과 1986년 체르노빌 핵발전소 대참사 이후 급속히 쇠퇴하는 듯 했지만, 지구온난화를 빌미로 기사회생했다. 지금도 핵발전은 마치 기후변화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인 것처럼 선전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핵에너지가 온실가스를 방출하지 않는 저탄소 청정에너지라는 거짓 신화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설사 발전 부문에 국한해서 핵발전이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핵발전의 전 과정에서, 특히 우라늄의 채굴과 가공 및 농축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온실가스가 발생한다. 그런데도 핵발전이 기후변화의 대안이라고 말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이다.

핵발전은 지구온난화 극복을 위한 대안이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핵발전은 발전 부문에 있어서도 낭비가 심한, 대단히 비효율적인 에너지다. 물리적으로 핵발전 과정에서는 핵분열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의 단 3분의 1만이 전력으로 전환되고 나머지 3분의 2는 섭씨 30도가 넘은 온배수(溫排水) 형태로 바다에 버려져 주변 생태계를 심각히 오염시킨다.

게다가 핵발전은 전력의 낭비를 조장하는, 극도로 융통성이 떨어지는 에너지다. 핵발전은 한번 가동을 시작하면 전력 수요에 맞추어 출력을 조정하지 못한다. 낮이나 밤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1년 내내 동일한 출력으로, 그것도 언제나 최고의 소비 시점에 맞추어 전기를 생산해야만 한다. 그래서 핵발전에는 언제나 '남는 전기'라는 문제가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지난 수십 년간 그렇게 이른바 '심야 전기'를 사용하라고 권장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한 사회의 에너지 소비 전체를 과도하게 만들어 도리어 지구온난화에 기여한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사실은 현재 전세계에서 가동 중인 모든 핵발전소가 생산하는 전력이 전세계 총 에너지 수요의 고작 2%만 충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달리 재생가능 자연에너지는 벌써 오늘날 전세계 에너지 소비의 약 13%나 충당하고 있다. 결국 화려한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핵은 한낱 틈새 기술에 불과하며 기후붕괴를 막을 수 있는 대안적 에너지가 아닌 것이다.

이미 수많은 과학적 연구와 사례들은 재생가능 자연에너지로 인류의 에너지 공급을 100% 충당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가 화석연료와 핵에너지로부터 탈피하여 재생가능 자연에너지의 시대를 여는 것은 이제 과학기술적으로도 가능하다. 나는 하느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햇빛과 바람과 지열과 파도와 같은 재생가능 자연에너지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길임을 확신한다.

핵발전은 오히려 재생가능 자연에너지로의 전환을 방해한다. 전력 낭비를 부추기고, 미래의 지속가능한 에너지 시스템을 위한 투자도 억제한다. 그러므로 핵에너지와 지속가능성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핵에너지는 결코 재생가능 자연에너지로 가는 중간 과정의 징검다리 에너지도 아니다. 핵무기가 세계평화에 대한 틀린 해답이었듯이, 핵발전도 지구온난화에 대한 틀린 해법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핵발전이 지구온난화의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확언하기 위해 넘어야 할 한 산이 있다. 지구를 살아 있는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Gaia)로 정의 내림으로써 환경운동에 크게 이바지한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이라는 큰 산이다. 뜻밖에도 러브록은 기후변화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핵발전을 옹호하고 있다. 그는 '핵에너지를 사랑하는 환경론자들'(Environmentalists For Nuclear Energy, EFN)이라는 이름의 환경단체의 회원인데, 이 단체가 핵발전 대국인 프랑스의 환경단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왜 제임스 러브록이 이 단체의 회원인지 우리는 솔직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기후변화를 핑계로 핵발전을 소생시켜 보려는 전세계 핵 관련자들에게 그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다.

▲ 2005년의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 지구를 살아 있는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Gaia)로 정의 내림으로써 환경운동에 크게 이바지한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은 뜻밖에도 기후변화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핵발전을 옹호하고 있다. ⓒBruno Comby

[이하 러브록에 대한 인용은 진상현 교수(경북대 행정학부)의 글 <러브록의 착각, 원자력>에서 발췌했다.] 러브록은 지금 인류가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 정도가 아니라 지구가열(global heating) 상태로 접어들었다고 본다. 상황은 절박하다. 이런 급박한 위기 속에서 러브록은 수소경제로의 이행만이 궁극적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수소연료는 이산화탄소가 전혀 배출되지 않는 청정에너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 상태로는 수소연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핵발전을 이용한 수소연료전지 생산이 가장 바람직하다. 알다시피 원자력은 두 가지 방식으로 활용이 가능한데, 하나는 우라늄이나 플루토늄과 같은 무거운 원자를 쪼개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핵분열'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수소 같은 가벼운 원소를 합쳐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핵융합' 방식이다. 러브록은 후자를 선호한다. 실로 그는 전화번호부 크기의 작은 상자형 핵융합 발전로를 집집마다 보급하는 미래를 상상할 정도로 핵융합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갖고 있다.

사실 러브록은 가이아에 관한 그의 첫 번째 책을 출간했던 1979년부터 핵발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다. 그 이유는―뜻밖에도― '폐기물 처리가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석연료는 이산화탄소라는 막대한 양의, 그것도 공중으로 흩어져 수집하기 힘든 폐기물을 발생시킨다. 하지만 발전소 한구석에 매립이 가능한 방사성 폐기물은 가이아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심지어 콘크리트로 잘 처리된 고준위 폐기물을 집집마다 한 덩어리씩만 보관하면 가정용 난방도 함께 해결할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러브록은 이렇게 방사능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도리어 그는 제3세계 사망자의 대부분이 원자력이 아닌 과로, 영양부족, 전염병으로 죽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방사능으로 인한 암 발생과 핵전쟁에 대한 서구인의 두려움은 한낱 허상에 불과하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는 원자력과 관련해서는 "두려움 말고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루즈벨트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중국 양자강의 삼협댐 건설과 비교하면서 체르노빌을 저평가한다.

그런데 러브록은 왜 이렇게 방사능 오염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일까? 사실 러브록에게 진정한 오염원은 원자력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가이아론을 이야기하는 초기부터 러브록은 지속적으로 "지상에는 오직 한 종류의 오염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리고 인류가 탄생한 이래 환경파괴에 일조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에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이 부분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스스로를 '행성 의사'(planet doctor)라 자임하는 러브록에게 가이아의 암적 존재는 핵발전소가 아니라 인간인 것이다.

심층생태주의(deep ecology)로 분류될 수 있는 러브록의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가이아의 위대한 능력이지 가이아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의무가 아니다. 그리고 러브록이 핵발전 자체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배경에도 '초월의 지평'을 상실한 심층생태주의적 사고가 작동하고 있다. 러브록이 핵발전을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원자력을 '대단히 자연적인 에너지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러브록에게 우주의 본질적인 에너지, 즉 별을 빛나게 하는 근본적인 에너지는 원자력이다.

그러니까 이런 우주적인 입장에서 보면 지구상에 있는 풍력, 수력 등은 오히려 대단히 희귀한 에너지다. 따라서 그에게 원자력이나 방사능 물질은 '정상적인 자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가 핵발전 그 자체와 거기서 배출되는 핵폐기물의 위험성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원자력은 위대한 가이아의 일부분이 아니던가!

여기서 우리는 초월의 지평을 상실한 심층생태주의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을 볼 수 있다. 결국 세계관의 차이다. 러브록에게는 초월에 대한 이해가 없다. 기독교의 창조신앙이 가지고 있는 초월의 지평이 없다. 그래서 가이아에 대한 비판의 지렛대가 없다. 이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원자력을 이 땅의 불이 아닌 '하늘의 불'로 생각한 다카기 진자부로의 말을 들어보자.

"저는 원자력은 하늘의 불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지구상에서 태워야 하는 불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의 자연과학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밤하늘에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원자의 불이 타고 있는 것입니다.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별을 보고 있으면 번쩍 하고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핵분열이죠. 핵이 빛나는 것, 핵이 별을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 우주의 불, 하늘의 불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생물은 하나도 살지 않습니다. 역시 하늘의 이치와 땅의 이치는 다르기 때문에 하늘의 이치가 있는 데는 생물이 사는 세계가 아닙니다. 생물이 있는 세계에 이런 핵의 불이 있으면 그건 재앙의 불이 됩니다."

러브록은 이 '하늘의 불'을 '자연의 불'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에게는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카기 진자부로에게 하늘의 불은 우주의 불로서 이 땅의 불과는 구분되는 어떤 것이다. 하늘의 이치와 땅의 이치는 다른 어떤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땅에 생명이 존속하기 위해서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지구라는 것은 태고시대에 우주의 부스러기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생성되었을 당시는 방사능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늘의 불이 남아 지구에 죽음의 재가 가득히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는 이러한 타고 남은 찌꺼기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꽤 강한 방사능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지구에 생물이 없었던 시대였죠. 아주 원시적인 생물이 생기는 데 10억 년쯤 걸렸다고 합니다. …… 수억 년이 걸려서 방사능이 차츰 식은 후에야 마침내 생물이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생물이 살 수 있게 된 지구에 다시 인공적으로 새 방사능을 만들어서 방사능의 불을 일으킨 것이 바로 핵발전인 것입니다. 확실히 하늘의 불을 훔친 것은 인간의 오만이 저지른 잘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생명의 자리에서 핵발전을 생각한다', <녹색평론> 제118호)

러브록에게 원자력은 가이아의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다카기 진자부로에게 원자력은 오만해진 인간이 하늘에서 훔쳐온 불이다. 이런 우주론적 세계관의 차이가 한 사람은 핵발전을 찬성하게 하고, 다른 사람은 반대하게 만들었다. 세계관이 중요하다. 신학이 중요하다.

다카기 진자부로는 핵에너지가 일상적인 세계의 에너지와 완전히 이질적인 에너지임을 강조한다. 일상의 조건에서 원자는 안정되어 있다. 원자를 구성하는 원자핵은 항상 안정되어 있고, 원자핵의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가 이러저러하게 결합되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에너지가 공업적으로 생성되거나 소멸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인체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는 생명의 세계란 바로 그러한 세계다. 즉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발 딛고 사는 세계는 "원자핵의 안정을 토대로 이루어진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핵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에서 본래부터 전제되어 온 원자핵의 안정성에 감히 도전함으로써, 즉 원자핵의 안정성을 깨뜨려 방대한 에너지를 생산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생활을 위협한다.

이제 우리는 제임스 러브록과 결별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그를 떠나겠지만 그는 우리에게 '하늘'이라는 초월의 지평이 생명과 평화의 신학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잊지 않게 해주는 반면교사로 남을 것이다.

핵폐기물로 인한 지구오염은 창조질서의 파괴이고 신성모독의 죄다

러브록은 핵폐기물의 위험성을 간과했지만 사실 이것은 핵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신학적 문제의 하나다. 정말 믿기지 않지만, 인류는 핵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지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지난 반세기 동안 수백 개의 핵발전소를 지구 여기저기에 지어 왔다. 하지만 단 1그램의 핵폐기물도 안전하게 처리되지 않는다. 이른바 폐연료봉의 재처리는 더 많은 핵폐기물을 만들어낼 뿐이다.

인류는 아직도 핵폐기물의 최종 보관 방법을 모른다. 핵폐기물은 100만년 동안이나 방사선을 내뿜지만 그것을 생태계와 격리시키는 인간의 드럼 용기 수명은 고작 40년 간다. 전세계적으로 오늘날까지 고준위 폐기물을 안전하게 최종적으로 보관할 장소는 지구상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우리나라의 핵발전소 수조에는 약 1만 1,370우라늄톤의 폐연료봉이 '임시로' 보관되어 있다. 오는 2016년이면 그 보관용량이 한계에 이른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이 폐연료봉들을 어디에 어떻게 보관할지 논의조차 시작하지 않았다. 또 한 차례 핵폐기장 문제를 놓고 한국 사회가 깊은 분열과 민란에 가까운 진통을 겪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엄청난 핵폐기물을 후손들에게 떠넘기게 될 것이다.

▲ "인류는 아직도 핵폐기물의 최종 보관 방법을 모른다." 사진은 경주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 공사 현장 ⓒ문양효숙 기자

하지만 이렇게 대대손손 생명과 안전에 위협을 가하는 행위는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이며 범죄행위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를 방사능으로 오염시키는 것은 창조질서에 대한 파괴행위일 뿐이다. 나아가 그것은 그것을 지으신 분에 대한 모독이다. 현재와 미래의 모든 생명은 건강하고 안전하게 생명의 축복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우리 세대가 잠시 편하자고 다른 생명과 또 앞으로 올 생명의 권리를 부인하는 것은 모든 생명을 사랑으로 지으시고 성실하게 양육하시며 지탱하시는 하느님의 신성에 대한 모독이다.

에너지 탐욕과 소비주의에 기초한 핵문명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그런데 핵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우리의 탐욕과 이기심에 대한 영적 회심을 포함한다. 우리 모두가 연루되었고 공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핵발전소가 생산한 전력을 마음껏 사용하는 호사를 누려 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핵발전소가 9기던 1991년에 2,312kWh이던 1인당 전력소비량은 2005년에 7,403kWh로 3배나 증가해 이미 일본, 독일, 영국, 이탈리아를 앞질렀다. 2010년에 우리나라는 그 4배나 되는 9,493kWh의 전력을 소비했다.

이 과정에서 피폭자였던 한국인들은 동시에 '핵 생산자', '핵 소비자', 나아가 '핵 가해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잔치'는 끝났다. 이제부터 우리는 핵폐기물의 처리와 핵발전소의 폐쇄라는, 처음부터 예고되었던 문제와 부딪쳐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우리가 핵발전을 통한 전기의 풍요라는 '단맛'을 봤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핵발전소의 폐쇄와 핵폐기물의 처리라는 '쓴맛'을 보아야 하는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1950년대에 시작된 인류의 핵발전은 이제 공통적으로 수명을 다한 핵발전소의 폐기 문제를 논의해야 하는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었다. 한국은 1978년 부산 기장에 고리발전소를 지으면서 매 18개월마다 1기씩의 속도로 지금까지 총 21기의 핵발전소를 지어 왔다. (2기가 곧 추가 가동될 전망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매 18개월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1기씩의 핵발전소를 철거해 나가야 한다. 핵발전소 1기당 철거해체 비용은 무려 6,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거짓 풍요'의 기반을 냉철히 돌아보도록 촉구한다. 산업화를 위한 에너지 과용은 인간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무한 경제성장과 이윤극대화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체제는 필연적으로 에너지 과소비와 소비주의로 귀결된다. 이계삼은 우리가 이러한 핵발전을 유지하면서, 유지하고자 하는 생활양식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 실상을 이렇게 폭로한다.

"새벽 세시, 네시가 될 때까지 미친 듯 깜빡이는 술집들의 네온사인, 밤을 모르는 환한 밤거리, 열두 시, 한 시까지 꺼질 줄 모르는 심야학원의 불빛,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방방곡곡 온 학교에 밤늦은 시간까지 쉭쉭 돌아가는 냉방기와 난방기들…… 그저 밤에는 불 끄고 잠자리에 들면 될 것을."

이정배 교수는 한국전력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 한 노인의 죽음으로 귀결된 밀양의 송전탑 반대 투쟁을 소개하면서, 우리가 삶의 양식을 달리하지 않으면 탈핵, 탈원전을 부르짖는 것이 약자의 죽음을 언제든 방조할 수 있는 것이라 경종을 울린다. 결국 탈원전은 내 삶과 욕망과 길들여짐과 너무도 깊게 연루되어 있기에, "밖을 멈추기를 원한다면 내 삶에서도 멈춰야 할 것이 분명히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은 생명 가치를 본질로 하는 종교적 힘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강조한다.

▲ "핵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우리의 탐욕과 이기심에 대한 영적 회심을 포함한다." 사진은 지난 9월 3일 밀양 부북면 송전탑 공사 현장에서 기도하는 수도자들 ⓒ정현진 기자

실로 그렇다. 핵에 대한 물음은 곧 우리 문명의 근본을 묻는 물음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기가 필요하다는 현대문명의 신화로부터 과연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가의 물음이다. 한 달에 단 한 시간도 소등하지 못하는 우리의 '밝음의 문화'가 얼마나 일방적이고 허황된 것인지 냉철하게 돌아보게 하는 질문이다. 여기에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여 항상 전자에 모든 긍정과 가치를 부여한 기독교의 전통적 사유체계 자체를 근원적으로 돌아보는 작업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최근 서울시도 '원전 하나 줄이기 종합 대책'에 나섰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건물 1만 여 채 지붕에 태양광 발전소를 세우고, 수소연료전지 발전소 131개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2011년 현재 2.8%에 그치는 서울의 전력 자급률을 2014년에 8%, 2020년에는 20%까지 높인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이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핵발전소인 영광 5호기가 생산하는 발전량에 해당하는 전력을 절약하고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서울시는 우선 주요 건물 옥상이나 지붕에 태양광 발전소를 설치하는 '햇빛도시' 건설에 나서겠다고 했다. 설치를 원하는 민간단체에는 설치비 30% 범위에서 연리 2.5%의 장기 융자 혜택도 준다고 했다. 나아가 공공시설 26개소에 30MW 규모의 '나눔발전소'를 짓고, 자치구별로 1곳씩은 외부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에너지 자립 마을'도 조성하겠다고 했다. 이번 종합대책 추진을 위해 2014년까지 총 3조 2,444억 원(시비 6,366억, 국비 2,321억, 민자유치 2조 3,757억)을 투입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각 지자체의 이런 사업들이 계획대로 전개되는지 살펴보고 이미 열심히 추진하고 있는 녹색교회 운동 등과 연계해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검토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끝없는 에너지 탐욕과 소비주의 위에 번성하고 있는 핵문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작년 3월의 후쿠시마 대재앙은 인류가 핵으로부터 시급히 문명사적 전환을 꾀해야 한다는 일대 경종이었다. 당장의 소비지향적 삶을 위해 사회와 자연에 해악을 끼치는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이다. 이와 달리 절제와 인내로 재생가능 자연에너지를 촉진하려는 노력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이다(마태 7,13-14).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계속)

장윤재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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