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적은 오늘의 고객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보험금을 남긴다.' 황구 어머니 김 여사의 보험판매전략이다. 팔십을 바라보는 김 여사, 오늘도 일찌감치 집을 나선다. 오라는 데는 없지만 갈 데는 많다. 김 여사의 앙상한 어깨에는 지난 40여 년의 보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낡은 가죽가방이 무겁게 달려 있다.

고향에서 보험의 베테랑인 김 여사를 모르면 간첩이다. 실적 때문이 아니다. 실적은커녕 매달 적자를 메우느라 쫓겼으니까 보험계의 마이더스가 아니라 마이너스의 손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보험을 때려치우지 않는 것은 그녀의 딱한 사정을 훤히 아는 고향 이웃들의 동정 덕분이었다. 그 기구한 팔자 때문이다.

김 여사의 외아들 황구는 초등학교 때 내 짝이었다. '신구'라는 이름이 어엿히 있지만 머리카락, 눈동자, 피부색이 누렁이를 꼭 빼닮아서 반 아이들은 '황구'라고 불렀다. 황구는 김 여사가 40대 후반에 들어 얻은 늦둥이 아들이다. 위로 누나가 둘 있지만 남편 황 선생의 바람기를 잡으려고 내린 특단의 처방으로 얻은 귀한 아들이다. 그러나 황구도 남편의 바람기를 잡는데 효험이 없었다. 황구가 세 살 때 서울 여자와 아예 딴 살림을 차렸다.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떠난 가장을 대신해서 김 여사는 보험을 생계수단으로 삼았다. 황 선생의 천인공노할 만행은 동네 아주머니들의 화를 돋구었고 너도나도 김 여사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쳤다.

"키익킥 킥킥." 황구는 조용한 교실에서 괴성과 함께 연신 몸을 비튼다. 틱(tic), 간질 발작이다. 덩치 큰 황구가 경련을 일으킬 때마다 책상과 의자는 요동을 친다. 선생님은 황구가 주위가 산만한 아이라고 나무라지만 황구의 증상은 부모님의 불화에서 오는 정서불안에서 생겼다. 황구네 부모님이 갈라서기까지 어린 황구에게는 충격과 상처로 남았다.

드디어 선생님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차분하다는 이유로 맨 뒷자리의 황구를 맨 앞줄의 내 옆 짝으로 앉혔다. 내게는 황구의 생활을 '관리'하고 학습을 '지도'할 책임이 주어졌다. "죽어도 싫다"고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황구가 만들어 내는 경련과 소음이 하도 지겨워서 학교 가기가 죽기보다 싫어지기까지 했다.

황구는 항상 웃었다. 내 변덕과 짜증에도 태산처럼 끄떡도 하지 않았다. 까칠하게 톡 쏘는 못된 내 성질도 재롱처럼 넙죽 받아 주었다. 체육 시간에 남학생을 4명이나 넘어뜨리고 씨름왕이 되었을 때 운동장이 떠나가라 손뼉 치며 모래판에 뛰어나와 내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까지 추는 주책에다 내 핀잔에도 아랑곳없이 늦게까지 교실에 남아 내가 맡은 환경 정리를 거들어 주는 멍청이, 그 큰 덩치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실없이 웃는 그런 웬수였다.

황구를 다시 만난 것은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에서였다. "단돈 천 원이요." 승객 사이를 비집고 내 무릎에 볼펜 꾸러미를 내미는 아저씨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황구야!" 나도 모르게 덥석 잡았다.

황구는 이혼했다고 한다. 아니, 이혼 당했다. 황구의 어머니 김 여사는 평소 점찍어 둔 단골 미용실의 미스 박을 아들과 맺어 주었다. 부실한 아들을 둔 죄로 평생 보험으로 모은 전 재산을 털어서 며느리 앞으로 미용실과 아파트를 사 주었다. 심성만 착하고 욕심 없는 천진한 어린아이 같은 황구가 미스 박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틱 장애를 가진 남편과 평생 살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나 보다. 결국 미스 박은 미용실에 드나들던 청년과 눈이 맞아 가게와 집을 몽땅 팔고 야반도주를 했다.

동대문 역 근처의 순댓국집에서 나와 마주앉은 황구는 순댓국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여전히 "킥 키익킥" 가늘게 몸을 떨면서. 어머니 김 여사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황구는 여기저기 정처 없이 다닌다고 한다.요즘은 서울역 근처 노숙인 쉼터에서 지낸다며 머리를 긁적인다.

"볼펜 팔아야 해." 자리에서 일어서던 황구가 볼펜이 잔뜩 들어 있는 가방 속을 뒤적거린다. "젤 예쁜 거다"며 내민다. 알록달록한 천연색 볼펜 세 자루가 비닐 포장 안에 들어 있다.

황구가 사라진 뒤 동대문역을 떠날 수가 없었다. 내 손 안에 쥐어 준 조잡하고 허접스러운 싸구려 불량 볼펜이 갑자기 내 손을 꼬옥 잡는다. 비로소 황구가 내 소중한 친구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친구'란 어떤 존재일까?
'내가 지금보다 더 나아져도 더 못해져도 괜찮은 사람, 내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는 사람, 내 결점을 알아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 항상 내게 무죄를 선고해 주는 사람, 조심스럽지 않아도, 소홀히 해도, 용서해 주지 않아도 모든 것을 충심의 바다에 풀어 버리는 사람, 이 모든 것들을 통해 나를 보고 알고 사랑해 주는 사람.'

동대문역을 나오는데 황구가 볼펜을 다 팔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 황구가 옆 짝인 내게 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무조건 그의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친구, 황구가 부러웠다.

심명희 (마리아. 약사. 선우경식기념자활터 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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