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핵을 넘어 생태사회로-2]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신학과 실천은 ‘피폭자’(被爆者)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제3자의 관찰자의 자리가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인들은 종종 자신들이 피폭자였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피해자의 10분의 1은 ‘조선인’(朝鮮人)들이었다. 그들은 일본 식민주의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름답기로 소문난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있는 원폭박물관에는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기록이 단 한 줄도 없다.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은 오늘도 사람들의 망각과 무관심 속에 고통받으며 살고 있다. 지금도 희생자들을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사회가 먼저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먼저 피해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1945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있지 않았어도 모든 한국인들은 지난 30여 년간 이 땅 위에 지어진 수많은 핵발전소로부터 이미 많은 피폭을 당해 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이 땅 위에 전술 핵무기가 배치되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피폭자였고 지금도 피폭자인 것이다.

우리는 핵보유국의 눈이 아니라 피폭자의 눈으로 핵 문제를 보아야 한다. 과학기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생명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우리 세대만이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수많은 세대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눈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나아가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을 포괄하는 전 우주 생명공동체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만약 이렇게 분명한 입장에 서서 핵 문제에 접근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칫 ‘핵 문제는 과학기술적으로 복잡한 문제여서 섣부른 판결을 내릴 수 없는 양면 가치의 문제’라는 애매한 태도에 빠질 수 있다.

▲ "우리는 핵보유국의 눈이 아니라 피폭자의 눈으로 핵 문제를 보아야 한다. 우리 세대만이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수많은 세대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눈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사진은 신고리원자력발전소의 모습 ⓒ문양효숙 기자

감리교신학대학 구약학 이환진 교수는, 최근 필자가 조직한 한 심포지엄에서, 바벨탑 사건으로부터 핵과 성서의 긴밀한 연관성을 발견한다. 저 유명한 바벨탑 이야기(창세 11,1-9)에서 사람들은 돌 대신 ‘벽돌’로, 그리고 진흙 대신 ‘돌 기름’[石油]으로 높은 층대를 쌓는다. 이환진은 이 두 가지가 오늘날 컴퓨터 칩을 만든 것만큼이나 당대 최첨단 과학기술임을 환기시킨다. 고대 메포소타미아인들은 이 혁신적인 신기술 덕분에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신기술이 모두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오히려 흩어짐이었다. 분열이었고 불통이었다. 이환진은 그때나 지금이나 분열과 불통의 한가운데에는 소위 최첨단 신기술이 자리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신기술을 앞세워 모든 제국의 식민지가 하나 될 수 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포로를 경험한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인들은 도리어 바벨탑 이야기를 통해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불통이라고 꼬집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핵 역시 최첨단 신기술로 선전되고 있다. 핵 보유국들은 마치 이를 통해 인류가 편리함과 진보를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이환진은 핵이라는 바벨탑 사건을 통해 이른바 첨단 과학기술의 실상이 흩어짐이고 분열이며 또한 불통이고 재앙임을 읽어낸다.

과학기술이 아니다. 피폭자의 자리에 함께 서는 것이 ‘핵 없는 세상’을 위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의 시작이고 끝임을 우리는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 생명과 평화의 신학은 생명을 빼앗기고 평화가 부인 당하는 현장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것은 학자들의 언어유희로 끝난다.

김정수 박사(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공동대표)는 실제로 피폭자의 자리에서 이 문제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십자가의 대속론을 다시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실로 한국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는 피폭자와 희생자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특히 여성과 어린이와 노약자들이 방사능 노출에 더욱 취약하여 각종 암과 대사장애, 불임, 그리고 기형아 출산 등의 고통을 세대를 이어가며 당하고 있다. 김정수는 땅 덩어리가 좁은 한국에서 한번 핵발전소 사고가 나면 서울이나 수도권도 핵 방사능 오염의 ‘사정거리’ 안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우리가 ‘피폭자의 자리에 서서’ 핵 문제를 본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잠재적 피폭자’로서 혹은 ‘유예된 피폭자’로서의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렇게 피폭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십자가 대속론’의 의미를 다시 성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동안 십자가의 신학은 부활신학을 준비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졌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의 금요일은 영광과 기쁨의 부활 새벽을 위해 존재하는 임시 징검다리 정도로 인식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도인들은 부지불식중에 가능하면 그 십자가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아니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지셨다는 위로감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김정수는 이런 대속론적 십자가 이해를 유비론적으로 따르면 핵발전소 사고의 피폭자들과 피폭된 자연은 수도권 지역의 사람들이 값싼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불가피한 희생양이라는 왜곡된 정당화의 위험성을 동반할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모두가 피폭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속적’ 십자가는 없다. 그렇다면 “피폭자들의 얼굴은 우리의 얼굴임을 ……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이다. 김정수는 모든 피폭자들을 타자화하는 거리두기를 중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그것이 곧 회개(메타노이아)임을 주장했다.

피폭자의 자리에 서서 한국 교회가 할 일이 많이 있다. 우선 원폭 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보상을 받는 일이다. 현재 대한적십자사에 등록된 재한 원폭 피해자 1세에 정부는 한해 월 10만 원씩 분기별로 진료보조비를 지급하고 있으나 이는 턱없이 모자라는 액수다. 희생자들을 위해 추모예배와 추모제를 열어 주는 것도 한국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둘째로 핵발전소 온배수로 피해를 입은 전국의 어민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들 또한 ‘피폭자’다.
지난 한겨레신문 6월 13일자에는 노현웅 기자의 “원전 온배수 ‘콸콸’ … 쭈꾸미 없는 ‘쭈꾸미 명품마을’”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전라북도 고창군 구시포항 입구에는 ‘쭈꾸미 명품마을’이라는 비석이 놓여 있는데 영광 핵발전소에서 온배수를 내뿜고, 또한 1km가 넘는 방류제를 쌓은 이후 수온이 높아지고 물길도 바뀌어 이제는 쭈꾸미 없는 ‘쭈꾸미 명품마을’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원래 구시포항이 있는 고창과 영광군 앞바다는 ‘칠보 해안’이라 불릴 정도로 해산 자원이 풍부했다. 그러던 2002년 영광 핵발전소가 5 · 6호기 추가 핵발전소를 가동하고, 온배수 배출 통로를 만든다며 1,132m 방류제와 342m 돌제(퇴적물 방지 및 수심 유지를 위한 인공 둑)를 바다를 가로질러 건설하고 난 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영광 핵발전소가 1초에 쏟아 내는 온배수는 300t이 넘는다. 365일 24시간 내내 바닷물보다 섭씨 7~8도나 뜨거운 물을 쏟아내고 있다. 이에 여름이면 바닷물 표면이 최고 섭씨 41도까지 오르고, 겨울에는 유독 온배수 배출구 쪽에만 안개가 끼곤 한다. 그 결과 영광군과 고창 지역의 어장은 어장으로서 기능을 이미 상실해 버렸다. 당연히 관광객도 줄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려 오는 피서객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생계가 막막해진 어민들이 피해 보상을 원하고 있지만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10년째 감감무소식이다. 왜냐하면 구시포의 어민들이 정식 어업권을 허가 받은 것이 1995년의 일인데, 이때는 이미 영광 핵발전소가 가동된 뒤였고, 이 탓에 고창군은 어민들의 어업권에 ‘부관’(조건)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온배수로 인한 피해 보상 청구는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이 한 문장이 ‘주홍 글씨’가 되고 말았다.

지금 싸움은 한수원과 고창군의 싸움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참다못한 어민들이 지난 5월 18일에 한수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영광 핵발전소 5호기가 가동되기 시작한 2002년 5월 20일로부터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인 10년을 바로 코앞에 둔 아슬아슬한 시점이었다. 한수원은 “전국 각지에서 온배수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에, 일방적인 민원을 모두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수원이 제대로 말했다. 핵발전소의 온배수 문제는 정말이지 “전국 각지”의 문제인 것이다. 피폭자의 자리에 서서 핵 없는 세상을 기도하고 실천하려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전국 각지”에서 핵발전소 온배수로 인해 살 길이 없어진 약자들과 함께해야 한다.

▲ 지난 1월 16일 경남 밀양 희곡리에서 일어난 농민 이치우 씨의 분신 사망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 줬고, 밀양 송전탑과 핵발전소 문제를 알리는 계기도 됐다.

셋째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또 다른 ‘피폭자’인 밀양의 노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연대해야 한다.
밀양에서 초고압 송전탑 공사에 반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치우 씨의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최근 한국전력이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밀양 주민들을 상대로 10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고 한다. 게다가 손해배상 소송과 별개로 주민들에게 ‘벌금 폭탄’을 내릴 수 있는 공사방해금지 가처분신청도 냈다고 한다. 공사방해 행위에 대해 1인당 하루 100만 원씩 과태료 처분을 내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소송 및 가처분신청을 제기 당한 주민은 모두 15명인데 대부분 60~70대 노인들이라고 하니 기가 찰 일이다. 이분들은 농사를 짓거나 달리 하는 일이 없는 무직자들이다. 이들 중 당뇨 합병증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고 있는 곽정섭 씨는 “버는 돈도 없이 남의 집에 얹혀사는 내게 한전이 하루 백만 원씩 내라고 하는 건 죽으라는 말”이라며 “지금이라도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콱 죽어버리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한겨레신문 2012년 7월 6일자, 10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피폭자’들과 함께해야 한다. 핵을 넘어서 생태사회로 진입하는 길에는 지름길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 하셨던 것처럼 고난 받는 자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이 핵을 넘어 생태사회로 나아가는 유일하고 참된 길이다.

핵과 평화는 양립할 수 없다

핵은 워낙 많은 거짓과 신화로 가려져 있어서 ‘핵 없는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끈질긴 성찰과 공부를 요구한다. 우리가 핵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는 핵무기(nuclear weapons)는 군사용이고 핵발전(nuclear power plant)은 평화용이라는 거짓 신화부터 넘어서야 한다.

원자력은 처음부터 군사적 이용, 즉 원자탄 개발을 위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보통 원자로 하면 발전(發電)을 연상하지만, 원자로란 본래 우라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라늄238을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239로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장치다.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발산시키는 것이 핵무기이고, 그것을 천천히 발산시켜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핵발전이다. 핵무기와 핵발전의 뿌리는 하나라는 말이다.

실로 수많은 나라들이 민간 핵발전이라는 덮개 아래서 핵무기를 개발했다. 잘 알다시피, 핵은 안전하지도, 깨끗하지도, 또 싸지도 않다. 핵 과학자들도 그것을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핵발전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핵발전이 핵무기의 원료를 생산해 주기 때문이다.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의 말대로 후쿠시마 사고로 일본 열도의 절반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치인과 관료, 재계는 어떻게든 핵발전 산업체제를 유지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유는 간단한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핵발전에서 핵무기의 원료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핵발전은 핵무기에 대한 욕망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핵무기가 문제라면 핵발전도 동시에 문제여야 한다. 이 연결 고리를 잃어버리면 ‘핵 없는 생태사회’는 오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 for Peace)이라는 구호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우주소년 아톰’을 아직도 정의와 평화의 상징으로 기억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핵발전과 핵무기는 동전의 양면이다. 핵은, 무기든 발전이든, 평화와 양립할 수 없다.

오히려 핵발전이 많아지면 평화를 더욱 위협한다. 핵발전소에 대한 군사적 혹은 테러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핵발전소는 현대 비대칭 전쟁에서 공격목표 1번 중 하나다. 만약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남한의 핵발전소들은 북한 장사정포의 전략적 타격지에 포함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다. 핵은 그 원료를 생산하는 지역의 평화마저 심각히 위협한다. 실제로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우라늄 부족은 수십 년 전부터 분쟁의 씨앗이 되어 왔다. ‘피 묻은 다이아몬드’(bloody diamond)만 있는 게 아니다. ‘피 묻은 우라늄’(bloody uranium)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우라늄은 오래전부터 경제적 투기의 대상물이다. 그것을 둘러싼 전쟁은 석유를 둘러싼 전쟁만큼이나 세계평화를 위협한다. 그러니까 핵은, 그것이 무기든 발전이든, 결코 평화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계속)

장윤재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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