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서 주체할 수 없도록 눈물이 흐른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때와 장소에서였다. 독자들은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대단히 미안하지만 나는 스페인에 머무는 만 49일 동안 일행 중 한분의 전화를 통하여 얻어 들은 제18대 총선의 한나라당 압승 소식 밖에는 국내 소식을 접한 게 없으니 시청앞 서울광장을 꽉 메운 촛불들의 군무를 보고 감격에 겨워 흘린 눈물이 아님을 미리 밝혀 둔다. 눈물의 진원지는 엉뚱하게도 힘겨운 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산티아고에서 수도 마드리드로 가는 기차 안이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2천리를 걸으면서도(꼬박 34일 걸렸다) 앞서 간 여러 사람들이 쓴 책에서 본 갖가지 다양한 감동들을 그리 절절하게 느끼지 못했다. 허구한 날 몰아치는 비바람과 젖은 신발에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진흙길이 지겨웠고 지친 몸을 뉘는 잠자리가 조금만 더 편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돌길을 걸을 때는 배낭 벗어 팽개치고 털썩 주저앉고만 싶었고 우리네 헛간 같은 합숙소(알베르게)에서 추위에 웅크릴 때는 따뜻한 온돌방이 그리웠다. 평소에는 잘 가지도 않는 찜질방 생각은 왜 그리도 많이 나던지.... 거센 비바람에 고개도 못 들고 걷던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가 못 견디게 보고 싶어 빗물과 범벅이 되어 흐르는 눈물을 꾹꾹 훔쳐낸 적은 있었지만 그리스도 신자가 아니라도 감격의 눈물이 절로 난다는 산티아고 대성당의 순례자를 위한 미사에 참례할 때는 민망하리만큼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했다. 그게 다였다. 워낙 감정이 무뎌선가? 아니면 순례길에 기도하는 마음이 부족해서였을까? 그런 내가 그 날, 거기서는 왜 그랬을까?

초고속으로 달리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스페인의 연녹색 들판은 지평선의 연속이었다. 산봉우리 하나 보이지 않는 끝없는 밀밭. 이럴 수가! 하루 이틀 사흘씩 밀밭 사이를 걸을 때는 넓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넓은 땅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때 갑자기 우리나라의 손바닥만한 논배미 밭뙈기 그림이 차창에 오버랩 되면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땅이, 우리 서민들이 농부들이 한없이 불쌍하고 안됐다는 생각이 들면서 설움이 북받쳐 오르는 것이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복이 이리도 많아 잠잘 거 다 자고 놀 거 다 놀며 쉬엄쉬엄 일해도 양식이 넘쳐나고 우리는 무슨 큰 업보를 치르느라 꼭두새벽부터 오밤중까지 허리가 꼬부라지도록 논밭에 엎드려 있어도 빡빡한 살림살이를 면치 못하나? 이 나라는 그리스도 신앙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이슬람교도들을 죽이고 내쫓고, 남의 땅을 침략해서 강도질 도둑질 다 한 나라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들에게 이 많은 선물을 주셨다. 우리 백성은 늘 얻어터지고 빼앗기고 짓눌려서 억울하게만 살아왔는데 아직도 고생보따리를 내려놓지 못한다. 결코 새삼스럽지 않은 것이 새삼스럽게 내 가슴을 후볐다.

하느님은 공평치 못하셨다. 하느님을 만나게 될 거라는 남들의 말에 기대를 걸고 이제나 저제나 작은 깨달음 하나쯤 얻겠지 하며 2천리를 걸어온 내게 하느님은 더 이상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나 비를 내려”(마태5,45)주시는 분이 아니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통로 건너편의 조성교 형은 눈을 지그시 감고 묵주알을 돌리고 있었고 옆자리의 엄종희 선생은 청승맞게 울고 있는 나를 흘끔흘끔 훔쳐보면서도 무슨 일이냐고 묻지를 않았다. 우리는 그 시각에 같은 상념에 잠겨있던 걸까? 그날 나는 이제 우리 땅에 돌아가면 아무도 미워하지 말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미워하고 저주하기엔 너무도 안쓰러운 내 동포 아닌가?

집에 돌아온 나는 6월의 어느 날 밤, 부끄럽게도 내 방 컴퓨터 앞에 앉아 또 한번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엉엉 울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서럽고 불쌍한 내 피붙이들이 화면 가득 촛불로 일렁이고 있었다.

호인수 200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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