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핵을 넘어 생태사회로-1]

▲ 이화여대 장윤재 교수 ⓒ 베리타스
“핵을 넘어 생태사회로” 라는 주제로 지난 7월 10일 예수살기등이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공동주최한 생명평화를 지향하는 개신교 운동의 비전공유를 위한 연속 토론회에서 장윤재교수(이대 기독교학부)가 발표한 논문을 앞으로 5회에 나누어 연재하려고 한다.  -편집자

제1회 핵시대의 신학과 핵 없는 시대의 신학
제2회 피폭자의 자리에 서서 
제3회 탐욕과 소비주의에 기초한 핵문명에서의 해방 
제4회 한국정부는 핵발전 중심의 사이비 녹색정책을 포기해야 한다
제5회 핵과 기독교 신앙은 양립할 수 없다 

인간은 미국 시카고대학 한 구석에 최초로 ‘인공’ 원자로를 설치했고 거기서 사상 처음으로 핵분열에 따른 연쇄반응 실험을 성공시킨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폭탄을 만드는 일이었다. 실험 3년 후인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의 ‘죽음의 여행’이라는 뜻을 가진 한 사막지대에서 사상 첫 핵폭탄 실험이 실시되었다. 엄청난 뇌성과 충격파가 사막을 집어삼켰다. 상공 9킬로미터까지 거대한 버섯 모양의 구름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투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이었으며, 장엄하고, 두려웠다”고 한 육군 장성은 회고했다.

같은 해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 ‘리틀보이’(소년)란 암호명의 두 번째 핵폭탄이 떨어졌다. 며칠 후 나가사키에는 ‘팻맨’(뚱보)이라는 이름의 세 번째 핵폭탄이 투하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각각 16만, 8만이 사망했다. 미국에 뒤이어 소련이 핵무장을 했다(1949년). 영국(1952년)과 프랑스(1960년)와 중국(1966년)이 뒤를 이었다. 동서 냉전이 절정에 이르렀던 1985년에 지구촌에는 약 6만기의 핵탄두가 발사대기 상태에 있었다. 숨도 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냉전이 끝난 지금도 지구촌에는 약 2만기의 핵탄두가 있다. 숫자는 줄었지만 파괴력은 오히려 더 커졌다. 미국과 러시아가 보유한 핵탄두 중 2천기는 지금도 단추만 누르면 발사가 가능한 상태다.

우리는 또한 핵발전으로 인한 피폭의 위협 아래 살고 있다. 일본에 핵폭탄이 떨어진 후, 그 가공할 파괴력에 대한 죄의식까지 한 몫 하면서, 아이젠하워는 이른바 “핵의 평화적 이용”(Atom for Peace)이라는 구호를 표방하게 되었고, 이 때 ‘폭탄용’ 원자로는 ‘상업용’ 원자로로 변형을 거치게 된다. 그 결과 1956년 영국에 셀라필드(Sellafield), 1957년 미국에 십핑포트(Shippingport) 핵발전소가 세워지면서 핵산업(nuclear industry)이라는 것이 태동한다. 하지만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섬(Three Mile Island) 핵발전소 폭발과 1986년 구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 대참사로 핵산업은 급격히 위축되다가, 이후 각국이 지구온난화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기사회생 하는가 싶더니, 작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대재앙으로 다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다음은 후쿠시마 대재앙 1년이 지난 뒤 이 곳을 찾는 사람의 방문기이다. (과장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보수신문의 보도를 인용한다.)

후쿠시마 원전 일대는 지옥 상황이다. 젖소들은 물 한 모금을 먹겠다고 마른 수로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고, 방사선에 피폭한 애완동물들이 인적 끊긴 거리를 헤매고, 소와 돼지 사체가 곳곳에 널려 썩어가고 있다. 논과 밭에는 키만큼 자란 잡초만 우겨져 있다. 바닷가인 후쿠시마 원전에서 반경 20킬로미터 반원형 지역 628제곱킬로미터가 출입 금지 구역이다. 서울(605제곱킬로미터)보다 넓은 면적이 유령 지대가 돼가고 있는 것이다. 사고 원전에서 핵연료를 회수하고 시설을 해체하는 데는 30~40년이 더 걸릴 거라고 한다. 도쿄 사람들은 규슈 쌀을 사다 먹고, 수돗물이 겁나 생수를 사 마시고, 원전 사고 이전에 만든 통조림만 아이에게 먹인다는 주부도 많다. 일본 정부는 향후 10년간의 복구비용을 23조엔(약 314조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조선일보 2012년 3월 10일자 사설 중에서)

우리는 핵무기와 핵발전의 위협 아래 살고 있다. 핵은 - 무기든 발전이든 - 생명에 대한 근원적 위협이고 정의에 대한 철저한 모독이며 평화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배신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핵에 기초한 문명을 넘어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고 생명이 꽃피는 생태사회로 나아갈 것인가? 나는 그것이 ‘핵 시대’(nuclear age)에 대한 철저한 신학적 반성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믿는다.

▲ 지난 8월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종교인 순례단의 순례길 너머로 신고리원자력발전소가 보이고 순례단 머리 위로 고압 전선이 즐비하다. ⓒ문양효숙 기자

카우프만의 핵 시대의 신학

핵무기의 위협이 절정에 이르렀던 1985년, 미국 하버드 대학의 신학자 고든 카우프만(Gordon D. Kaufman)은 핵은 창조주 하느님을 대적하고, 적그리스도적이며, 그 자체로 성령의 역사에 반대된다고 선언했다. 그는 ‘핵 시대의 도래’가 가진 문명사적 의미와 신학적 함의를 깊이 성찰했다. 핵 시대의 도래로 인류는 지구 위 모든 생명을 파멸시킬 수 있는 권세(power)를 갖게 됐다. 그러므로 핵 시대의 도래는 신학자들은 물론 모든 종교인들에게 지금까지 그들의 사유와 담론에서 당연시했던 모든 전제들을 근원적으로 다시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카우프만이 <핵시대의 신학 Theology for a Nuclear Age>에서 급진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던 기독교의 전통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주권’(divine sovereignty)이었다. 인류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지구 생명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철저하게도 새로운 상황 속에서 과연 우리는 계속해서 하느님의 경륜과 사랑과 돌보심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카우프만은 그 둘 사이에 중대한 논리적 모순이 발생함을 보았다.

카우프만은 먼저 핵을 ‘종말론’과 연결시켜 사유했다. 그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핵 대학살’(nuclear holocaust)의 가능성은 더 이상 아무런 구속적(redemptive) 의미가 없는 종말론적 사건이라 단언한다. 전통적으로 서구신학의 종말론에서 역사의 종말은 어떤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창조주와 역사의 주관자에 대한 믿음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 형태가 궁극적 파국이든 아니면 궁극적 구원이든 종말은 언제나 하느님의 행위의 절정이고 궁극적으로 악에 대한 하느님의 최종적 승리의 성취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20세기 중반 이후 우리가 숙고해야 할 종말은 ‘핵 대학살에 의한 종말’로서, 그것은 전혀 하느님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임을 카우프만은 강조한다. 그것은 더 이상 인류의 구원을 가져오기 위한 어떤 원대한 섭리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생명의 소멸 혹은 전적인 말살이며, 그것은 모든 희망의 종말, 모든 바람의 종말이다. 또한 그것은 모든 희망하는 자들의 종말, 모든 미래 세대의 종말이다. 핵폭발 이후 찾아올 핵겨울(nuclear winter)은 지구 위 모든 생명의 생존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며, 지구를 생명이 없었던 초기의 황폐한 상황으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

요약하면, 전통적 종말론에서는 늘 어떤 긍정적 의미가 있었다. 마침내 하느님의 정의가 승리할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상황은 이와 전적으로 다르다. 핵으로 인한 종말은 아무런 긍정적 의미도 찾을 수 없게 한다. 거기에서는 아무 적극적 의미도 산출될 수 없다는 것이 카우프만의 통찰이다.

카우프만은 이러한 특이한 상황에 대해 두 가지의 신학적 응답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나는 이러한 종말을 하느님의 의지의 결과나 행위로, 즉 노아시대에 하느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하느님이 인류의 멸절을 홍수가 아니라 핵폭탄을 통해 이루신다고 보는 것이다. (핵전쟁을 지상 최후 아마겟돈 전쟁으로 이해하려는 근본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창조주이자 구속자가 되시는 하느님은 인류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결단코 그런 불행한 파국을 허용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후자는 전자와 같이 극단적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카우프만은 둘 다 ‘핵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신학적 응답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둘 다 ‘하느님의 주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우프만에게 ‘하느님의 주권’이라는 신학적 개념은 오늘날 인류가 처한 문제의 본질을 밝혀주기보다 도리어 감추어 줄 뿐이다. 하느님의 주권이라는 서구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 원리는 이제 “낡았고”(outmoded), “잘못 인도하며”(misleading), “위험하기”(dangerous)까지 하다. 사도 바울은 “아무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낼 수 없다”(롬 8:38-39)고 말했다. 하지만 카우프만은 이 말이 더 이상 우리 앞에 현실로 다가온 “우연성의 미래”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더 이상 역사를 하느님의 ‘구원사’(salvation history)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핵무기로 인한 종말의 가능성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핵무기로 인한 멸절의 가능성은 “우리 남자와 여자들”, 혹은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 시민들 손에” 달려 있다.

하느님이 우리를 핵으로 망하게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문제가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책임에 면죄부를 발행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손에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이 쥐어진 상황에서 이제 인간의 행위는 신적인 삶(divine life) 그 자체에 비참할 결과를 초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헌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헌신은 이제 지구 위에서 생명이 지속되도록 우리 인간이 완전한 책임을 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카우프만에게 하느님의 주권을 전제로 한 어떤 신학적 응답도 해결책이 아니다. 카우프만은 이전까지의 신학자들이 주로 주어진 전통에 충실했다면 오늘날 핵 시대의 신학자들은 그들보다 과감하고 창조적이어야 한다. 핵 시대의 신학자들은 물려받은 전통을 ‘탈구축’(deconstruction)하고 ‘재구축’(reconstruction) 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우프만은 특히 이 작업에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상징들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카우프만에게 ‘하느님’은 누구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카우프만에게 ‘하느님’이라는 상징의 기능은 어떤 실재나 존재를 명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간화(humanize)하고 상대화(relativize)할 수 있는 우리의 의식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과거에는 인간의 구원이 하늘에 있는 아버지와 땅에 있는 자녀들 사이의 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특정한 개별적 인격의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카우프만은 어느 개인적 인격도 그러한 종류의 절대적 중요성과 모두에게 유효한 우주적 효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개별자들은 복잡한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서로 연결되고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역시 더 이상 단독자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느님은 모든 생명을 창조하고 양육하며 그 생명을 더욱 증진시키기 위해 일하는, 생태적이고 역사적인 생명의 그물망을 일치시키는 상징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구원 역시 더 이상 어떤 단일한 과정이나 활동이 아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와 주로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어떤 일방적 행동이 아니다. 구원에는 인간사 안에서 폭력과 소외와 착취, 그리고 모든 형태의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억압을 극복하는 행동과 과정도 포함되어야 한다.

맥페이그의 신학-하느님의 새로운 은유와 모델

 
카우프만의 문제제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화답한 이는 생태여성주의신학자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이다. 카우프만이 ‘핵 시대’ 도래의 혁명적 의미와 그 깊은 신학적 함의를 잘 포착하고 새로운 상상적 구성을 주장했다면, 실제로 의미 있는 신학적 재구성을 시도한 이는 맥페이그라 말할 수 있다. 핵 시대를 맞아 전통적인 하느님의 그림언어(imagery)가 군국주의나 도피주의를 조장하는 방식들과 맞서 싸우라는 카우프만의 요청에 응답하여, 맥페이그는 <하느님의 모델들 Models of God: Theology for an Ecological, Nuclear Age> (<어머니 연인 친구 - 생태학적 핵 시대와 하느님의 세 모델> (정애성 옮김 서울 : 뜰밖, 2006).)에서 새로운 하느님 은유와 모델을 제안한다.

맥페이그 역시 핵 문제를 우리 시대의 ‘가장 중대한 문제’로 규정한다. 카우프만을 따라 그 역시 ‘인간의 책임’을 고취시키지 않는 어떤 신학적 해석도 거부하며, 싫든 좋든 이제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힘을 가진 인간이 하느님과 ‘공동의 창조자’가 되었고, 따라서 과거에 하느님의 힘과 우리의 힘의 관계가 ‘이원적’이고 ‘비대칭적’인 것이었다면, 이제는 ‘연합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카우프만을 따라 전통적인 하나님 이해에 문제를 제기한다. 세계 밖에 존재하며 단독적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힘으로서의 하느님은 핵 시대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안으로 맥페이그는 “세계와 연합하고 상호 의존하는 당신 하느님”의 은유와 모델로서 ‘어머니’ 하느님, ‘연인’ 하느님, ‘친구’ 하느님을 제안한다. 이 세 가지 은유나 모델의 공통점은 연합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사랑의 힘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맥페이그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지배와 통제, 절대 지배권과 주권으로 이해되는 힘(power) 이해이다. 그 힘이 지금까지 서양의 하느님 견해에서 핵심적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핵 문제와 정치사회적 억압의 문제 사이에는 내적 연관성이 있다. 그것 역시 힘의 문제, 즉 누가 힘을 행사하고 그것은 또 어떤 종류의 힘인가가 문제이다. 문제의 핵심은 ‘지배로서의 힘’ 이해인 것이다. 지배와 통제, 절대적 지배권과 주권으로 이해되는 힘이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힘 이해는 핵 시대에 적합하지 않고 유해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런 힘 이해에 바탕한 전통적 서구신학의 하느님 이해도 바뀌어야 한다.

예를 들어 유대-기독교의 하느님 묘사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형용사는 ‘전능하신’이다. 물론 그러한 견해가 반드시 지배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맥페이그에게 문제는 여전히 힘이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런 힘은 공유될 수 없는 힘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나온 개념이 바로 ‘하느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인데, 맥페이그는 이 견해를 “더욱 노골적으로 묘사하자면,” 하느님은 자신이 선택한 백성 편에서 싸우고 그들의 적을 물리치는 왕이며, 이를 “더욱 세련되게 해석하자면,” 하느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고통당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아버지라는 말이 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전자의 하느님 이해는 ‘군국주의’를 강화하고 후자의 하느님 이해는 ‘도피주의’를 강화한다. 실제로 오늘의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그룹으로 갈라져 있다. 하지만 맥페이그는 군국주의를 지탱하는 ‘지배로서의 힘’은 핵 학살로 귀결되고, 도피주의를 지지하는 ‘섭리로서의 힘’은 우리를 복종으로 잠재운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 둘이 아닌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안의 시작은 우리 인간에게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힘”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힘과 인간의 힘의 관계를 연합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맥페이그는 정확히 카우프만의 입장과 함께 하고 있다.

정리하면, 맥페이그에게 하느님은 더 이상 세계 밖에 존재하면서 단독적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일방적 힘이 아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다스리고 구원하는, 지고하고 거룩한 인격적 존재라고 보는 관점은 쉽게 분리와 이원론 그리고 통제의 개념들을 수반한다. 그래서 맥페이그는 “세계와 연합하고 상호 의존하는 당신 하느님”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이 하느님의 새로운 은유와 모델로서 ‘어머니’ ‘연인’ ‘친구’를 제안하는 것이다. 이 은유와 모델들은 하느님과 세계 사이의 거리를 강조하고 세계의 하느님에 대한 일방적인 의존을 부추기는 위계론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이론적인 은유와는 거리가 멀다. 이 은유들은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초월적이고, 또한 전능한 하느님 개념 대신 상호성, 책임 공유, 호혜성, 사랑의 하느님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녀는 핵전쟁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그런 의미에서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것은 언제나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핵무기를 터뜨리지 않더라도 실제로 날마다 피폭을 당하고 있는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의 현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라늄 채굴 광산 주위에 사는, 미국과 세계 곳곳의 원주민들에게 핵전쟁은 사실 매일 경험하는 실재다. 실제로 미국에서 우라늄 채굴 광산은 주로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아울러 핵발전으로 그리고 인공방사능의 ‘내부피폭’으로 날마다 사실상의 핵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현실을 맥페이그는 아직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핵없는 시대의 신학을 위하여

카우프만과 맥페이그는 모두 ‘하느님의 주권’을 문제로 삼았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우리가 핵 문제를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침해와 도전으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주권은 신앙의 언어이다. 하느님의 주권을 말한다는 것은 이 세계의 궁극적 주권이 저 “통치자들과 권세자들”(powers and principalities, 골로 2:15, 에페 6:12)에게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는 것을, 그래서 제 아무리 그들의 힘이 강해도 그들의 지배는 정의롭지 않다고 선언하는 신앙의 언어다. 그것은 실재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이 아니라 통치의 정당성(legitimacy)에 대한 물음이고 실재를 넘어선 것에 대한 희망이다.

맥페이그는 위계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이원론적인 개념들, 예를 들어 왕, 지배자, 주인, 통치자와 같은 하느님의 은유들을 비판하지만, 이런 개념은 핵으로 세상을 지배하며 주권자 노릇을 하고 있는 이 땅의 왕, 지배자, 주인, 통치자들을 ‘상대화’하는 언어로 여전히 사용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의 주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인간의 책임이 약화되거나 간과되는 것은 아니다.

맥페이그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과 다른 생명들을 파괴할 힘이 있다는 ‘지식’과 그 지식이 동반하는 ‘책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과연 지식에서 책임이 나올지는 미지수다. 책임은 사랑과 열정 그리고 분노와 소명에서 나오지 않던가. 더욱이 맥페이그는 마치 ‘우리’ 모두가 세상을 멸절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처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그의 저서 여러 군데에서 “우리의 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누구이고 또 ‘인간’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가? 엄밀히 말하면 나는 그녀가 말하는 ‘우리’에 속해 있지 않다.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있는 지구상 대부분 나라의 국민들도 그가 말하는 ‘우리’에 속해 있지 않다. 아니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그의 나라의 국민들조차 그 ‘우리’에 속해 있지 않다. 과연 핵보유국가의 시민들이 핵무기 발사권과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은 정말 그들의 정부를 민주적으로 통제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왜 자신도 갖고 있지 못한 권한을 ‘우리’ 모두가 가진 것처럼 이야기하는가? 왜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을 ‘인간’으로 일반화시키는가? 핵에 대한 권력과 지식은 일부에게 독점되어 있고 정보의 공개와 투명성은 언제나 문제였다. 그 힘이 왜 핵보유국, 핵 마피아, 팩 패밀리의 힘이 아니라 ‘우리’의 힘인가?

맥페이그와 카우프만은 공통적으로 핵무기뿐만 아니라 핵발전도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카우프만은 핵무기 경쟁을 중지시키고 핵무기의 전적인 폐기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핵발전에 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핵무기와 핵발전이 동전의 양면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카우프만과 맥페이그는 핵 시대 도래의 혁명적 의미와 신학적 함의를 잘 포착하고 ‘핵 시대의 신학’(theology for a nuclear age)을 상상하고 구상하자고 제안했지만, 정작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신학’(theology for a nuclear-free world)을 상상하고 구상하는 데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계속)
 

장윤재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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