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위의 마을 취화당]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들은 자신들이 들고 있는 등에 기름이 없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밤중에 신랑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기름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겠지요.
형식과 본질 등은 그릇이고 기름은 밥입니다. 밥솥에 있는 밥이 그릇에 담겨집니다. 손님을 대접하는데 정작 먹는 시간은 순식간입니다. 제사나 잔치의 행사는 몇 분 걸리지 않는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음식이나 혼인을 준비하는 시간은 무척 많이 걸립니다. 행사라는 형식은 준비라는 본질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거든요. 기름을 준비하는 일이 곧 신랑의 영접을 가능케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수행도 그렇습니다. 평소 기름을 준비하는 생활이었는가? 의식 수행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었는가는 신랑이 나타난 순간, 즉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야 알아보게 됩니다. 평소에는 잘 알아볼 수 없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공동체의 하루 일과에 열심하면서 생활하는데 공동생활이 쉬운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인내합니다. 나를 무시하고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자존심 상하게 하고, 뒷말 하고 그럴 때는 인내가 최고의 덕이겠지요. 그러나 참고 참는 것은 ‘건드리면 툭하고 터질 것만 같은 봉숭화’ 모양새일 뿐입니다. 풍선도, 고무줄도 한없이 늘어날 수는 없기 때문에 무엇인가가 툭 건드리는 순간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터지거나 폭발하겠지요. 그 순간이 바로 신랑이 나타난 시점입니다. 평소의 수덕생활이 있다면 등불을 들고 신랑을 영접하게 됩니다.
모든 삶은 사물을 대하게 됩니다. 그 사물은 나의 감정에 따라서 수용도 되고 거부도 됩니다. 거부감이란 싫거나 기분 나쁘거나 하는 감정인데, 그때가 바로 신랑이 나타난 순간으로 보겠습니다. 원불교의 마음공부에서는 그 순간을 ‘경계(境界)’라고 합니다. ‘앗! 경계가 나타났구나!’ 하고 느끼면 유념(有念), 못 느끼고 저지르면 무념(無念)이라 합니다. 유념의 대응을 위한 수행을 마음공부라고 합니다. ‘경계’란 표현이 좀 이상하면 ‘떴다!’ 라고 생각해도 좋겠지요.
‘선생님 떴다! 빨리 제자리 앉아! 신랑이 떴다! 등불을 들고 마중 나가자!’
비록 어떤 나쁜 감정의 경계가 나타날지라도 평소에 유념으로 생활한다면 수행의 센서가 작동하여 대응합니다. 그러니까 수행자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이지요. 수행자는 경계를 만나면 감사합니다. 신랑이 나타나서 등불에 기름을 있는지 없는지 알게 했듯이, 경계에 부딪혔으므로 자신이 감정을 바라볼 수 있도록 깨어 있게 했으니까 감사한 거지요.
공동체로 사는 사람들은 모두 불완전한 수행자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거절하고 거부할 수도 있고, 마지 못해 응할 수도 있고, 이성을 잃고 욕구대로 대응할 수도 있고, 더러는 비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를, 내가 지금 마지못해 하는구나, 이건 좀 비겁한 거 같구나! 하는 의식과 생각이 들어야 수행자입니다.
그러면 태도가 달라집니다. 초심자는 다 저질러 놓고 나서야 생각이 들게 되어 이미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부상을 입힌 후입니다. 그러나 저지르고 상처 내고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도 성찰조차 안 되는 이가 있다면……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불쌍히 여기고 마늘과 쑥을 100일 정도 먹여야겠지요.
평소에 늘 성찰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이 부딪히는 순간이 오면 마음 속으로 ‘떴구나!’ 하면서 수행의 등불을 밝히도록 하십시오. (2012. 8. 31)
박기호 신부(예수살이 공동체 산위의 마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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