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문양효숙]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사춘기 시절부터였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이하던 나는 연약하고 예민한 데다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으면 끝까지 움직이지 않는 수동적 공격형 아이였고, 그런 나를 기다려 주기에 아버지는 너무 불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에게 나는 어른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고집불통 아이였고, 나에게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이었다. 우리는 사사건건 부딪혔고 그때마다 기나긴 냉전기를 보내야 했다.

그날도 언제나 그랬듯 사소한 분쟁으로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큰소리가 오갔고, 집에 있을 수 없던 나는 독서실로 대피했다. 며칠간의 냉전기를 보내고 독서실에서 밤늦게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파트 입구에 아버지가 나와 계셨다. 대면할 용기가 없던 나는 아버지를 피해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지나치는 나의 팔을 잡으며 나즈막히 말씀하셨다. "미안하다."

그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던 감정에 휩싸인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아무 말도 못 하고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아버지가 내민 손을 잡고 "괜찮다"라고 하기에 나는 너무 유약했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내게는 아버지의 사과가 매우 갑작스러웠고 소화해 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괜찮다"면서 아버지의 손을 잡을 때까지 긴 호흡으로 기다려 주지는 않았다. 아버지에게는 사과가 곧 화해를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기다리기엔 그 모든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생긴 생채기도 무척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런 것을 깨닫기에는 가장인 아버지의 힘과 아이에서 갓 벗어난 나의 힘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컸고, 힘없는 나는 거기에 생각이 닿기 까지 한참 더 어른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와 제대로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날의 기억은 아물었으나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았다. 더이상 쓰라리고 아프진 않지만 내 존재의 일부로, 나를 구성하는 그 무엇으로 남아 있다.

ⓒ 문양효숙 기자


화해의 필요충분조건

시간이 한참 지나서 누군가가 내민 화해의 손을 잡으려면 마음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간혹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힘센 이가 내민 손은 힘없는 이에게 화해가 아닌 또 다른 폭력으로 작용하는 것도 보았다. 괜찮지 않은 상황에서, 실제로 괜찮지 않은 이에게 "우리 이제 평화롭게 지내보자"라고 무턱대고 내미는 힘센 손은 자기애(自己愛)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무례함의 과오를 저지르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손을 내밀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임을 아버지의 '미안하다'로부터 배웠다. 비록 그 손을 잡지는 못했지만 '진정성'을 사람을 대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로 가지게 된 것은 그날 밤 아버지가 보여 준 진정성이 내 존재 깊숙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라고, 나이가 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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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화해의 진정성을 바라며

그가 '화해'를 말한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탄압했던, 그가 침묵으로 핍박했던, 그리고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던 이들을 찾아가 손을 내민다. 품이 넓은 어떤 이들은 내치지 않고 그를 대면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가 내민 손에 분노한다. 진정성이 없으며 화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봉하마을을 방문하고 이희호 여사를 만난 후, 8월 28일 오전 전태일재단을 찾았을 때 유가족과 노동자들은 그의 방문을 거부했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 씨는 "전태일 정신 없이 재단을 찾아오는 것을 유가족 입장에선 받아들일 수 없다"며 길을 막았고, 청계천 전태일 동상 앞에 헌화하려는 박근혜 후보에게 항의하던 쌍용자동차 노조 김정우 지부장은 관계자들에게 멱살을 잡혔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순옥 민주통합당 의원은 28일 오후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쌍용차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어 가고 거리에서 싸우고 있고, 용산참사로 남편은 목숨을 잃고 아들은 감옥에 가 있는 그 어머니는 아직 거리에서 울고 있다"며 "현실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하겠다는 것에 진정성은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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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박근혜 후보를 막아섰던 노동자들은 그의 진정성과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분열 조장 세력'이 되었다.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특별위원장은 29일 박근혜 후보의 전태일재단 방문이 무산된 것에 대해 "쌍용차 노조 문제는 굉장히 감정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 자체에 대해서 박 후보에 대해 어떤 불만을 표시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상일 새누리당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국민을 분열시켜 계층 간, 세대 간, 지역 간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을 반드시 물리치고 국민통합의 '100% 대한민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말했다.

묻고 싶다. 화해와 통합을 원하느냐고. 당신이 원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느냐고. 당신들이 건설한다는 그 '100% 대한민국' 안에 당신들이 거리로 내몰았던, 죽음으로 내몰았던 이들에게 용서를 비는 진정성이 있느냐고 말이다. 정치인의 진정성은 결국 오랜 시간에 걸친 그의 행보와 선택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한 번의 방문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화해에는 예의도 필요하다. 화해를 원한다는 박근혜 후보 측은 8월 21일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참배 당시, 방문 몇 시간 전에서야 노무현재단에 방문을 통보했다. 전태일 열사의 유족들도 일방적 방문을 중단해 달라는 뜻을 밝혔지만 방문은 강행됐다. 쌍용차범국민대책위는 여의도 새누리당사 박근혜 후보 캠프 앞에서 지난 8일부터 쌍용차 문제 해결과 이를 위한 박 후보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20일 넘게 천막 농성을 진행 중이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대꾸가 없다.

힘있는 이가 힘없는 이를 계속 괴롭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활짝 웃으며 "우리 화해하자. 내 화해를 받아 줘" 하고 손 내민다면 그것은 화해가 아니라 자기애를 기반으로 한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무례한 폭력이 아닌 진정성 있는 사과와 화해를, 일회성이 아닌 통합을 향한 계속되는 변화를, 그리고 실질적 정책 변화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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